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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바젤 - 준비2 (114/181)

아트 바젤 - 준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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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less의 원작가에 대한 루브르와 빌바오의 공통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은 곧 전 세계 언론에서 매우 중요한 뉴스로 다뤄졌다.

KBC의 예랑은 Faceless의 작가를 찾았다는 뉴스가 전 세계 언론의 실시간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 논문까지 챙겨서 읽어봤다. 그리고 제1 저자에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곧바로 윗선에 보고했는데, 보고를 받은 박 차장의 표정 역시 예랑이 놀랄 때와 다르지 않았다. 마치 ‘얘는 어디 안 끼는 데가 없니?’라는 표정으로 예랑을 쳐다봤다.

“우리 얼마 전에 태호, 마크, 타카시 이렇게 세 사람이 나온 다큐멘터리 방영하지 않았었어? 그때 시청률이 얼마였더라?”

“18%를 찍었죠. 그래서 국장님이 저 진급시켜주신다고 회식 때 약속하셨는데.”

“그래, 그랬지. 김 대리 진급할 때가 되었으니까 과장 가는 거야 당연한 건데. 내가 궁금한 건 그거야. 혹시 김 대리 태호 작가랑 무슨 혈연관계인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어떻게 태호는 하는 일마다 홈런을 쳐? 오해하지 마. 내가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런 거야. 도대체 태호는 어떤 사람인 거야?”

“아시잖아요. 같은 교수님에게 배웠다는 거. 태호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보시는 거면, 인간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님 능력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능력만을 보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죠. 하지만 인간성을 따지면... 예민하고 정말 까탈스럽죠. 거기에 매우 배타적이고.”

“천재라는 건 인정. 그리고 천재 중에 그 정도 성격 없는 사람이 있었나? 자네랑도 어찌 되었든 잘 지내는 걸 보면 '정'도 있는 녀석이고. 낯을 가리는 거지, 내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챙기는 스타일이고.”

“음··· 그런가요?”

“김 대리 운이 너무 좋아서 내가 부러워서 그래. 내 이건 국장님에게 보고하고 올 테니까 이거 방송으로 어떻게 만들지 기획안 짜서 보고해. 같이 회의해 보고 어떻게 갈지 생각해 보자고.”

박 차장은 국장에게 보고하고 기획안 잘 뽑아서 가지고 오라는 지시를 받아왔다. 일주일 뒤, 팀이 다 모인 회의실. 예랑은 기획안을 들고 앞에서 발표를 시작했다.

“이번에 발표된 논문 내용을 기준으로 해서 Faceless의 작가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아보는 걸 제안하는 바입니다. 빌바오에서 시작해서 루브르와 파리에서 원작자의 발자취를 찾아보는 거죠.

루브르에서는 그의 그림들을, 파리에서 관련 공공 기록물을 하나하나 되짚어가는 순서가 좋을 것 같습니다. 태호가 그림의 복원자이기도 하고 논문의 제1 저자이기도 해서 해설자로 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태호는 인물도 좋고 불어도 유창합니다.”

무난한 진행이었기에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기획안에 동의했다.

“촬영 시기 및 방영은 언제로 생각하나?” 회의에 참석한 최 국장이 물어봤다.

“태호는 지금 학기 중이기 때문에 빨라야 졸업 후인 6월에 촬영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예랑이 대답했다.

“지금이 마지막 학기라고 그랬나? 별수 없지. 6월은 확정된 건가?”

“아닙니다. 우리 쪽 기획안이 확정되어야 해서 아직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그쪽하고 연락해서 언제 가능한지 확정 지어.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운도 슬쩍 띄워보고. 만약 이거 촬영 들어가면 태호가 실제 촬영하는 시간은 얼마나 될 거 같은가?”

“자료 조사를 더 해봐야겠지만, 뉴욕에서 하루, 파리에서 2~3일,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앙리라는 작가의 발자취가 발견되면 이탈리아 촬영도 고려해야 합니다. 이탈리아 촬영은 하루나 이틀 정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이래저래 이동시간까지 다 하면 최소 10일은 소요가 되는군. 이것도 다 모든 일정이 맞게 돌아간다는 가정인데··· 김대리. 뉴욕을 먼저 찍어버리면 버리면 실제 태호랑 같이 유럽 촬영만 일주일 정도 맞추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럼 굳이 10일이나 걸릴 필요도 없고 일주일이면 끝나겠는데? 일주일에 끝날 거면 태호 봄방학 기간에 촬영 가능할 테고.”

“맞습니다. 국장님, 미국 대학 일정도 잘 아시네요.”

“내 아들이 미국 있잖아. 이 건은 4월에 찍는 걸로 추진해 봐. 안되면 졸업 후에. 지금 2월이니 시간은 충분하겠네.”

태호는 예랑의 연락을 받고 3월 봄방학 기간에 찍는 걸로 하고 뉴욕 촬영은 봄방학 전주 금요일에 하는 것을 했다. 예랑도 뉴욕-파리-이탈리아로 이어지는 동선이 훨씬 비용 측면에서 효율적이었기에 이 내용을 내부 승인을 거쳐 확정을 지었다.

태호가 KBC로부터 연락을 받은 지 얼마 후, 비슷한 아니 거의 똑같은 제안이 BBC를 통해 들어왔고,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텔리비지옹에서도 비슷한 제안이 들어왔다.

태호는 기존에 같이 작업한 KBC나 BBC에서의 연락은 이해가 되어도 텔리비지옹에서의 제안은 뜻밖이었는데, 빌바오 제이슨의 의견으로는 태호가 관련 논문의 제1 저자이자 Faceless 복원가이며 외국인이긴 해도 불어를 유창하게 한다는 게 섭외의 이유인 것 같았다.

세 개 방송사에서 제안이 오자 태호는 세 회사에 나란히 이멜을 보내 ‘나는 모르겠고 너희들이 결정해서 알려주세요.’하고 이메일을 보냈다.

나중에 들으니 일주일 만에 찍는 것은 미친 짓이라며 BBC와 텔리비지옹이 반대를 해 태호와 스케줄을 조정한 끝에 6월 말부터 찍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다만 KBC도 손해는 아니었던 게 뉴욕, 파리, 이탈리아에서의 촬영을 BBC와 텔리비지옹이 나란히 나눠서 하기로 해 돈이 꽤 굳었다는 점이었다. 일정 논의가 시작될 때쯤 KBC는 구상하고 있던 대본을 번역해 보냈다.

그걸 가지고 BBC와 텔리비지옹이 한참을 싸우더니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한 새로운 대본을 영문으로 KBC에 보냈다. 딱 봐도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단한 노하우가 있는 BBC의 입김이 많이 들어간 대본이었다.

KBC에서 대본을 확인해 보니 하나는 영문본 하나는 불어본 이렇게 두 개의 언어로 되어 있었는데, 미국에서의 촬영은 영어로, 프랑스에서의 촬영은 불어로, 이탈리아에서의 촬영은 이탈리아어로 한다고 적혀 있었다.

나중에 태호의 목소리로 불어나 영어로 더빙을 입힐 계획이었고 말이다. 한국어 더빙도 해야 하는데 '언제 하느냐'를 생각해 보니 그 자리에서 바로 해야 방송 일정에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외국 방송사가 KBC의 편의를 봐줄 거 같지도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KBC는 결국엔 예랑을 파견해 인터뷰와 더빙 등을 녹화, 녹음하기로 했다.

남들 좋은 일 시키는 것보다는 태호와 친한 예랑을 보내 BBC나 텔리비지옹 보다 이번 논문의 비사 같은 더 많은 정보를 담아야겠다는 계산도 곁들여 있었다.

*

예일대.

태호는 자신이 꿈속에서 본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루브르와 빌바오에게 연락해 받은 연구 논문 조사 자료를 참고삼아, 앙리 보나의 일대기를 소설 형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생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강렬한 인상과 비교적 자세한 기억이 남아 있었기에 글을 쓰는 속도는 무척 빨랐다.

앙리 보나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불현듯 든 생각 때문에 태호는 그림 작업도 병행할 수밖에 없었다. 앙리 보나가 Faceless를 그리는 장면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아 글을 쓸 수가 없을 지경이 되자, 그의 마지막 유고 작을 만드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기기로 맘먹은 것이다.

전에 태호가 호박 시리즈를 만들면서도 했던 트라우마에 대한 객관화를,

자신의 전생이라고 생각되는 앙리 보나에 대해서도 적용해 보기로 한 것이다.

윌슨이 보면 기겁을 하겠지만, 이걸 아트 바젤에 내걸 마지막 그림으로 할 생각이다.

글보다 그림이 더 빨리 끝이 났다. 1950년대 한국의 빈민가와 큰 차이가 없던 1870년대 파리의 빈민가. 환기는 물론 온종일 햇빛도 잘 들지 않아 눅눅하고 어두운 방에서 Faceless를 그리는 앙리 보나가 캔버스에 그려져 있었다.

캔버스 위쪽에는 성모 마리아 혹은 여신이 환한 빛에 휩싸여 찬란히 빛나고 있었고 캔버스 아래쪽에는 그 여신을 캔버스로 옮기려는 늙고 병들었으며 한쪽 눈이 거의 멀어버린 앙리 보나가 그려져 있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창작혼과 처절함에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맺힐 정도로 장엄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태호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앙리 보나의 얼굴을 기억해 보려고 갖은 애를 썼지만 거의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얼굴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너무 흐릿했다.

결국 수십 년 후의 늙고 병들었을 때의 상상 속의 자기 자신의 모습을 앙리 보나의 얼굴로 묘사했다. 마치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에 나오는 카라바지오처럼 말이다.

그림을 완성할 때는 거의 4월이 다 될 시점이었다. 글을 쓰며 비교적 천천히 그림을 그리다 보니 늦어졌는데 그림을 완성하고 보니 평소 태호의 그림답지 않게 그림이 매우 무거웠다. 그림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매우 엄숙했고 또 차분했다. 치밀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그리 신경 쓰지 않은 듯했고, 앙리 보나의 Faceless를 완성하려는 그 종교적 혹은 예술적 열정을 묘사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우연히 태호의 작업실에 놀러 왔다 그림을 보게 된 데이비드는 완성된 그림을 한참을 보고 있다가 눈이 붉어진 채 말없이 작업실을 나가 버렸다. 벨라랑 전화 통화를 하고 기분이 좋아진 후였는데도 말이다.

세 번째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바로 달려온 윌슨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명화를 보는 듯한 이 분위기와, 어딘가 눈에 익은 모습의 늙은 화가가 Faceless를 그리는 장면에서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그린 건가?”

“앙리 보나가 'Faceless를 어떻게 그렸을까' 문득 상상이 되더군요. 그런데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를 않아서 그리다 보니 이렇게 되었어요.”

“자네 얼굴이지? 왜 이렇게 그린 거야?”

“누구 얼굴을 넣어야 할지 안 떠올라서요.”

“그렇다고 해도 자네 얼굴을 왜 이렇게?”

“그래도 제법 프랑스 사람처럼 그리지 않았나요?”

“머리 노랗게 그리고 눈 파랗게 그리면 프랑스 사람인가?”

“그래도 꽤 비슷하게 그렸는데.”

윌슨은 또 하나의 자화상을 그린 태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다가 결국 그림만 챙겨 뉴욕으로 돌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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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두 달 전 미국 영주권을 받은 태호는 브루클린에 지은 지 70년이 넘은 5층짜리 학교 건물을 샀다. 건평 260평인 이 건물은 200억에 육박하는 가격 때문에 고민했지만, 계약을 진행했다.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앨리스와 마틴은 그 큰 부동산을 바로 지르는 태호의 배포에 놀라워했다. 물론 태호는 엄마에게 코치를 받고 지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뭘 그렇게 급하기 지른 거야? 그림 팔아서 연말에 질러도 되었을 텐데?”

딱 봐도 거금을 벌어들일게 확실해 보이는 그림 세 점을 그리는 걸 옆에서 지켜본 데이비드이다.

“딱 마음에 드는 위치에 있는 건물이라 지금 안 사면 다시는 못 구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저 큰 건물로 뭐 할 거야? 세놓을 거야?”

“아니. 내가 다 쓸 건데?”

“어떻게?”

“지금 계획은 최고급 디자인 브랜드를 만들어서 저 건물 안에서 생산하고 유통하려고.”

“거의 디자인 전문 브랜드겠네? 생산은 외주 주고?”

“외주를 줄 정도로 키울 생각은 없어. 그냥 최고급 제품을 소량 생산하는 그 정도 회사를 생각하고 있어.”

“배짱도 좋다. 그 정도까지 키우려면 한참 걸릴 텐데 건물부터 덜컥 사는 거 보면. 돈 잘 버니까 상관없나?”

이건 데이비드의 오해다. 건물 좋아하는 엄마와 그 코치를 받은 태호가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미친 척 지른 것이기에.

*

졸업식.

태호네 식구는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모든 식구가 뉴헤이븐까지 날아와 아들 손자의 졸업을 축하하고 뉴욕 구경을 실컷 한 후 돌아갔다. 그리고 태호는 데이비드네 식구들과 스위스 바젤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작년에 데이비드네 식구들과 스위스 바젤에 놀러 갈 계획을 세울 때는 평범하게 비즈니스 좌석을 끊어 갈 걸로 생각하고 데이비드에게 계획을 물어봤다. 그러자 집에서 다 준비할 예정이니 신경 쓰지 말라는 얘기를 하길래,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바젤로 출발하기 이틀 전, 데이비드로부터 몇 시까지 공항으로 오라는 얘기만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공항에 위치도 생소했다. 더군다나 무슨 항공 몇 시 비행기인지 얘기가 없었다.

전날 데이비드가 알려준 공항은 JFK가 아닌 라과디아 공항으로 데이비드네 집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착해서 보니 오래된 공항이었는데 개인 전용기 공항이었다. 데이비드네 가족은 전부 얼굴을 가릴 듯한 선글라스를 끼고 공항에서 대기 중이었는데 비서 혹은 가이드 혹은 보디가드로 보이는 여자 한 명과 남자 한 명이 데이비드네 가족 근처에 있었다. 태호는 굳이 비즈니스도 아닌데 개인 전용기를 왜 타나 싶어서 데이비드에게 물어봤다.

“아빠가 얼마 전에 새로 뽑은 비행기거든. 건수 만들어서 타보고 싶어 하셨어.”

걸프 스트림 G550은 짧은 활주로를 급가속해 데이비드 가족과 태호를 싣고 하늘로 날아올라 전속력으로 스위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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