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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바젤 - 준비 (113/181)

아트 바젤 - 준비

다움의 구애는 태호의 가족, 특히 할아버지에게 집중적 되었는데, 태호의 어릴 적 그림의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는 게 할아버지였기 때문이다.

두 교수와 미술학원 원장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꽤 많은 그림을 가지고 있었고, 그중 몇몇은 태호가 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그린 그림들도 있었다.

그 그림들의 가치는 공개가 안되어서 그렇지 그의 공개된 작품에 육박할 정도였고, 태호 식구 외에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그림들이다.

당연히 다움은 이런 그림이 많을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공을 들여 태호의 할아버지에게 그림을 대여해 줄 것을 끊임없이 요청했다.

태호의 할아버지는 지금까지 미술관의 요청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태호 그림의 가치가 천정부지로 치솟자 주위 사람들이 태호 할아버지의 미술품 보관 창고를 마치 보물섬 보듯 한 이후로는 생각이 달라졌다.

불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손자의 그림을 자신만이 독점해서 보는 것도 지금까지는 즐거움이었지만 이제는 욕심처럼 느껴졌다.

“윌슨 씨에게 얘기해 둘 테니까 팔 그림들은 팔고 맡길 그림은 맡기죠.”

“뭘 판다는 얘기냐?”

“그리스 로마 신화 그림 있잖아요. 그건 이제 모델들에게 팔아야 될 거 같아서요. 시장에 그냥 내놓기도 그렇고. 버리자니 아깝고. 하하.”

태호는 할아버지와 통화 후 윌슨에게 연락해 할아버지가 가진 그림에 대한 정리를 부탁했다. 윌슨은 며칠 뒤 한국으로 날아가 통역까지 대동하고 할아버지를 만나 같이 창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정말 깜짝 놀랐다.

태호가 한국에 있으면서 그려온 그림들이 정말 낙서하나까지 소중히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호의 할아버지가 얼마나 손자와 손자의 그림을 아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록 컨테이너에 에어컨과 히터 등의 냉난방 시설을 설치한 수준의 보관소이지만 그 정성은 가히 일류 미술관의 수장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윌슨은 통역을 통해 사진사를 하나 수소문해 보관 중인 모든 그림을 사진으로 찍고 분류 작업을 시작했다. 분류작업을 할수록 윌슨은 여기에 있는 모든 그림이 아까웠다.

“태호, 이거 안 팔면 안 되나?”

윌슨은 고민하다 결론을 못 내고 태호에게 전화를 했다.

“그 여신화가 문제죠? 공개하기도 애매하고.”

태호는 아무래도 어릴 적 사춘기 때 그린 그림에 대해 살짝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윌슨의 생각은 달랐다.

“뭐 어떤가? 자네 어렸을 때 그린 건데? 그것도 자네의 일부고 굳이 감출 이유도 없어.”

“아무래도 그건 윌슨 씨가 그건 알아서 하세요. 들고 있기도 그런데··· 아, 대중에 공개하지 않는 조건으로 파셔도 되요.”

“흠. 알았네. 이건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윌슨이 판단하기에 정말 중요하다고생각되는 그림은 골라서 미국에 가져가기로 결정했다. 뉴욕에 있는 전문 그림 보관 업체에 맡겨 버리고 비용을 지불하는 게 이걸 다움에 줘버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한번 자기 손을 떠난 그림이 다시 자기에게 돌아오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움에 걸려있는 탱화처럼 말이다.

윌슨은 지금도 다움에 걸려있을 탱화를 생각할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다움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정말 생색만 낼 정도의 작품만을 다움에 넘기고, 나머지는 다 쓸어 모아서 항공편으로 미국에 보내버렸다.

미국에 도착한 태호의 어린 시절 그림들은 전문 미술품 보관 업체에 맡겨졌다. 나중에 태호의 미술관이 생긴다면 그때까지만 보관 업체에서 관리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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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은 태호에게 전화를 걸어 여신화 판매와 어린 시절 작품 관리에 대한 설명을 한 후, 스위스의 수도 바젤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 (아트 페어) 얘기를 꺼냈다.

"내년 6월 아트 바젤에 초청받았어."

"아, 축하드려요."

태호는 축하는 전했지만 썬 갤러리가 한동안 아트 바젤에 초청을 못 받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윌슨도 거의 10년 만에 다시 바젤의 초대를 받았기에 살짝 들뜬 것 같았다.

"혹시 자네의 새로운 작품을 제작할 수 있겠나?"

"아직 들고 계신 작품으로 뭐가 있어요? 대충 알아야 몇 작품을 추가 제작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보자. 런던에 출품했던 작품들은 아직 그대로 가지고 있고, 호박 시리즈도 몇 개 남았지. 또 사랑 6연작 한 세트와 사랑 시리즈도 몇 개 남아있고. 이번에 한국에서 들고 온 여신화 시리즈도 남아있고."

"생각보다 많네요."

"미술관에만 작품 판매를 주력을 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지. 이제 슬슬 개인들에게도 팔아도 될 것 같아."

"이번에 얼마나 들고 가실 생각이에요?"

"일단 다 들고 가보려고. 하지만 이게 메인은 아니야. 지난 그림이기도 하고. 난 이번 바젤을 위해 자네가 새로운 그림을 그려줬으면 하는데... 자네가 바쁘면 할 수 없고."

윌슨은 말수가 적어지는 태호를 보고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기 꺼려 한다는 생각을 했다.

"아, 무슨 그림을 그려야 될지 생각해 보고 있었어요. 생각 정리되면 다시 연락드릴게요."

윌슨의 우려와는 반대로 10년 만에 아트 바젤에 초대 받은 윌슨을 위해 무슨 그림을 그려야 할 지 고민했다.

*

10년 동안 아트 바젤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는 윌슨의 얘기를 듣고 태호는 흔쾌히 그림을 제작하기로 했다. 10년 전이라 함은 윌슨이 한국까지 날아와 태호를 만난 시기이기도 해 윌슨이 태호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 잘 아는 태호를 안쓰럽게 했다.

태호는 두 작품을 제작하기로 결정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하나는 자화상. 퍼스트라는 이름을 붙일 예정인 이 그림에는 한 손에는 붓을 들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정면을 주시하는 장면이었다.

옷은 검은색 티에 마크가 제작해 준 녹색 정장을 입었는데 재킷과 바지가 모두 7부로 손목과 발목이 드러났다. 신발은 루이비통의 황금색 스니커즈를 신었는데 양말은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사슬로 된 황금 팔찌를 찼으며 얼굴을 제외한 드러난 피부에는 루이비통 로고와 예일대 로고를 문신처럼 새겨 넣었다. 그림 자체는 전에 벨라의 전신 초상화처럼 부그로의 느낌이 가득했는데,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리얼리즘을 상당히 강조한 그림이었다.

두 번째 작품은 빛의 마리아 미니 에디션이었는데 이름을 황금의 마리아라 지었다. 아트 바젤이 어떤 장소인지 잘 아는 태호는 부자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 특히 황금빛,를 최대한 집어넣었다. 전에 마크에게 팔았던 작품과 똑같은 크기의 캔버스에 그렸다.

질감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거친 붓질로 물감이 캔버스에 덕지 덕지 남아있을 정도 채색을 했지만 얼굴은 빛의 마리아의 얼굴은 그대로 남겨 뒀으며, 빛을 묘사하는 황금빛 물감은 실제 금박으로 입히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매우 야성미가 넘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련됨과 고급스러움을 한껏 더한 매우 독특한 작품이 제작되었다. 제작 기간을 짧게 가져가려고 했지만 은근히 공을 들이다 보니 거의 제작 기간만 3개월이 걸렸는데 학업과 병행을 하다 보니 늦어진 것도 있고 물감을 두껍게 입히다 보니 건조가 늦어져 시간은 더 소요되었다.

*

5개월 후.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자 윌슨은 이번에 새로 구매한 험머 H2를 몰고 나타났다. 이 무게 4톤에 극악 연비 3-5km의 괴물 SUV인 이 차는 태호의 그림값이 점점 올라가서 작품마다 가볍게 백만 달러를 넘어서자 이송에 불안을 느껴 구매한 차다. 학교에 도착해 태호의 그림을 확인한 윌슨은 복잡한 눈으로 태호와 작품을 바라봤다.

“이런 그림을 주면 아까워 아트 바젤에서 어떻게 팔아? 거의 미술관에 팔아야 될 그림이구먼."

“그 정도의 의미는 없는 그림이에요. 초상화야 공식적으로 첫 그림이긴 하지만. 어때요?”

“자네 초상화는 아르노 루이비통 회장에게 팔아야 할 것 같아. 그도 이 정도 그림이라면 기꺼이 지갑을 열 거야.”

“그건 알아서 하세요. 그 바쁜 양반이 스위스 바젤까지 날아갈지는 의문이지만요.”

“이 정도 그림이면 와야지. 정말 판매자를 정해놓고 시작하다니 이것도 웃기는 노릇이야. 하하. 부탁인데, 다음부터는 부담스럽지 않게 아트 바젤에서 팔수 있는 그림을 그려줘. 전에 호박 시리즈 정도의 퀄리티로?”

“그건 뚜렷한 주제의식이 있어서 그렇게 그린 거지 제 취향의 그림은 아니란 거 아시잖아요.”

“제작 기간이 너무 길면 아무래도 많이 제작하기 힘들고, 그러면 유통량에 한계가 있어서 그것도 문제야. 자네 그림이 유통되는 일정한 규모가 필요해."

“그건 학교 졸업하고 나서 조수를 좀 고용하는 방향으로 처리해야겠어요.”

“음···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그렇게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앤디 워홀부터 제프 쿤스까지, 다들 조수를 썼고 쓰고 있지. 조수는 어떻게 구할 건가?”

"내년부터 알아보려고요. 손재주 좋은 친구들을 찾아봐야죠."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와야겠군. 아무튼 그림은 고맙고, 작품 하나 더 부탁하네. 참, 내년에 스위스 바젤은 어떻게 갈 참인가? 정해진 거 없으면 우리 갤러리 고객과 같이 가도 괜찮네만.”

“아, 데이비드네 식구들과 같이 가기로 했어요. 숙식도 데이비드가 준비하기로 했고요."

*

지난 추수 감사절 때 태호는 데이비드 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다가 왔다. 이번에는 스케줄이 엇갈려 차로 이동했다. 떠나기 전 데이비드가 ‘엄마가 동네방네 소문 다 내놨어’라는 말로 경고를 했고, 이에 태호는 작은 캔버스 수십 개와 아크릴 물감을 준비해 갔다.

앨리스는 지난번 방문 때와도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준비를 해놓고 태호를 반겼다. 매일 셰프를 바꿔가며 진수성찬 요리를 대접했는데 일식을 좋아한다는 말을 어디서 들은 건지 생선회에 쓰시, 사케까지 먹고 마실 수 있었다.

앨리스는 이미 태호의 골수팬이 되어 있었고, 태호가 이번에 자기 집에 온다고 동네 아줌마들에게 다 소문을 내는 통에, 추수 감사절 기간 동안 태호는 롱아일랜드 부자 아줌마들과 티타임을 거의 매일 했다.

태호는 준비해 간 작은 캔버스에 간단히 아크릴 물감으로 초상화를 그려주는 팬 서비스 혹은 마케팅 활동을 열심히 했다. 하얀 캔버스가 삼십분에서 한 시간 사이에 아름다운 전신 초상화로 변하는 마법을 본 사람들은 태호의 명성이 과장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고, 남편과 상의해 꼭 그림을 구매하겠다고 약속에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

스위스 바젤로의 여행은 토요일 저녁 만찬 때 데이비드네 식구들과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얘기 중에 졸업 후 계획을 주제로 얘기를 나누면서 나왔다.

"혹시 졸업하면 뭘 할 건가?" 마틴이 물었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구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해보려고요."

데이비드 식구는 당연히 그럴 거란 예상을 한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윌슨이 아트 바젤에도 작품을 출품하자고 해서 준비한다고 바쁘기도 하고요. 졸업하자마자 스위스로 넘어갈 거 같아요."

"아트 바젤이 뭔가?"

"갤러리가 주관해서 여는 초대형 그림 전시회에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갤러리들이 부스를 열고 그림을 판매하는데, 한눈에 전 세계 특급 혹은 A급 작가들 작품을 한눈에 볼 기회에요."

"그림을 산다고?" 앨리스가 물었다.

"네. 보통 작가는 안 가는데 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어서 이번에 가보려고요. 살만한 그림이 있으면 살 생각이기도 해요."

그림을 산다는 얘기에 앨리스의 안색이 달라졌다.

"그럼 우리도 같이 가서 몇 점 구매할까?"

"그러세요. 같이 보면서 괜찮은 그림이 있으면 설명해 드릴게요."

"정말? 그럼 내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아줌마들을 다 모아서 전세기를 띄워야 하겠는걸?"

갑자기 부산해지는 앨리스를 보며 태호가 그녀를 말렸다.

"저기... 앨리스. 다 같이 가면 좋은 그림 사기 힘들어요. 사실 진짜는 몇 점 없거든요."

"아? 그래? 그럼 우리끼리만 가야겠네?"

"그게 낫죠."

결국 데이비드네 식구들만 6월 초에 스위스 여행을 같이 가기로 그 자리에서 결정이 났다. 마틴은 그림 구경이나 구매에 딱히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이번 여행에 반대도 없을뿐더러 동행하기로 해 태호를 의아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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