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Faceless를 그렸나? 2
빌바오의 이사회는 태호가 제안한 공동 연구를 바로 승인하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직원을 프랑스로 보내 조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루브르 미술관에서 연락이 왔다.
어디서 냄새를 맡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파리에서 프랑스 미술가를 조사하는데 자신들을 빼고 하면 재미없을 것이라는 협박을 매우 정중하고 세련되게 표현하여 제이슨을 기겁하게 만들었다. 빌바오는 울며 겨자 먹기로 공동 조사를 승낙했다.
2개월 뒤, 루브르에서 파견된 직원까지 자료 수집에 참여하자 반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작업이 불과 2개월 만에 끝이 나 버렸다. 정확히 얘기하면 자료는 한 달 안에 다 찾았고 찾은 자료가 맞는 자료라는 걸 확인하는 데 걸린 시간이 한 달이었다. 거의 70년 가까운 세월, 그림의 제작자를 찾지 못해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허망할 정도로 빠른 결과였다.
사망 진단서를 못 찾아 조사가 미궁에 빠지나 싶더니, 태호의 조언으로 당시 파리의 한 의대가 작성한 것으로 확인된 시신 기증서와 그 이후 시신이 기증될 시점의 사망 일자와 사인, 그밖에 신체가 가지고 있던 각종 병명이 고스란히 기록된 서류까지 발견되었다. 물론 서류엔 주소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앙리는 당시 중증 폐렴과 말기 간 경화를 앓고 있었는데 강경화는 알코올에 의해 일어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도 적혀있었다. 아마도 저급한 압생트를 마신 게 각종 병의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해졌다.
Faceless의 소유권 이동도 깔끔히 확인되었는데 앙리가 죽은 집의 실소유주를 추적해 가다 보니 카사노 공작이 드러났고, 카사노 공작과 미셸 오프 티 대주교와의 관계가 드러나자 앙리부터 파리의 대성당까지 이어지는 그림의 이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태호가 제시한 가설이 매우 사실과 가깝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아카데미 출신 화가들의 일대기를 연구한 루브르 소속 연구원에 의해 앙리에 대한 추가 자료가 나왔고, 이를 통해 앙리의 이른 죽음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와 설명이 가능해졌다.
이렇게 조사는 진작에 끝이 났고 논문도 빌바오와 루브르를 오고 가며 영문 불문 두 개로 준비가 거의 완료가 되어가는 것으로 태호는 전해 들었지만, 발표를 언제 할지에 대한 소식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은 두 미술관이 앙리 보나의 그림을 선점하기 위해 논문 발표를 미루고 그림을 수집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긴 태호도 수집할 생각은 있었지만, 도저히 그림을 찾아다닐 능력이 안되어 포기했었다.
이 두 미술관은 돈도 있고 사람도 있다 보니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 갤러리는 물론 벼룩시장까지 싹 찾아다니며 앙리 보나의 이름이 적힌 작품이나 작가 미상인데 앙리 보나와 연관이 있어 보이는 작품을 무차별적으로 사들였다.
그동안 시장에서 무시당하든 혹은 관심이 없었던 아카데미 작가들의 작품 구매는 시장의 의아함과 의구심을 자아냈다. 곧 이 두 미술관이 뭔가를 알고 그림을 사들이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결국, 관련 매물이 자취를 감추고 나서야 광란의 구매가 끝이 났다.
그리고 나서야 두 미술관의 공동 연구를 통한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 소식은 바로 미술계를 강타했고,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다. 태호가 공동연구를 제안한 지 무려 6개월이 지난 후였다.
*
200x.9
태호가 파리에서 돌아온 뒤 한 달 정도 된 9월 중순, 태호는 다시 파리로 날아가 마크의 루이비통 패션쇼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마크는 인터뷰에서 태호와의 협업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하며 감사를 표했다.
"상상하기만 하면 현실이 되도록 해준 태호에게 특별한 감사를 전한다. 이토록 패션쇼 준비가 쉬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 태호와 일하면서 깨달았다."
늘 그렇긴 하지만 역대 급이라는 평가를 받은 마크의 패션쇼는 화려하게 패션 잡지와 언론에 소개되었고 태호와 타카시도 루이비통의 협업 작가로 이름값이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마크와 태호 그리고 타카시의 협업의 첫 성과는 2004년 상반기 결산 보고서가 나오자 분명해졌다. 패션과 가죽 제품에서 전년 대비 무려 12% 상승했는데 루이비통 그룹의 가장 큰 섹터가 패션 및 가죽 제품임을 생각하면 매우 큰 성장 폭이었다.
이로써 타카시는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팝 아트 작가로, 태호는 뉴욕을 대표하는 작가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
여름에 두 달을 마크에게 시달린 태호는 거의 탈진 혹은 그로기 상태였는데 한 달을 아무것도 안 하고 학교와 체육관만 들락거리며 체력을 회복했다. 9월을 보내고 10월도 흘러 중순이 되자 프랑스, 한국, 일본 세 나라에서 세 사람의 협업 내용이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다.
다큐멘터리는 6월부터 9월 패션쇼까지의 제품 디자인부터 제작 그리고 마지막 무대에 올리기까지의 과정을 순차적으로 보여줬다.
첫 장면은 마크 제이가 패션 업계에 어느 정도 위상을 가졌는지를 설명하는 자료로 시작했다. 이어서 무라카미가 일본에서 직원들과 디자인에 열중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배경으로 무라카미의 최근 예술세계와 일본 더 나아가 세계에서 무라카미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 설명이 나왔다.
그 뒤로 태호가 마크의 옆에서 옷들을 디자인하는 모습이 나왔는데 태호가 비교적 스트레스에 찌들기 전에 찍은 화면이었는지 마크의 옆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의상 디자인을 하는 장면이 나왔다. 주위에는 벨라가 태호 옆에서 그림을 보고 있었고 마크 뒤에서는 마크의 조수 빌이 그림을 보고 있었다. 태호와 벨라가 같이 앉아 있는 그림이 너무 잘 나와서 나중에 열애설이 터지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무라카미는 자기 회사 직원들과 같이 회의실에서 매우 사무적으로 마크를 대하는 데 비해, 태호는 마크 팀에 녹아들어 마치 동료처럼 일하는 데에서 차이가 보였다.
곧 태호의 최근 행적에 대해 설명이 이어졌다. 예일대 학생으로 최근 몇 년간 수천만 불에 달하는 뉴욕의 주요 미술관과 거래 내역 보여주며 태호가 뉴욕에서 갖는 예술가로서의 위상을 설명했다.
이번에 태호는 마크를 위해 그린 1/4 사이즈의 빛의 마리아 미니를 가지고 파리에 방문했는데, 이 그림을 공개되자 작업실 사람들은 모두 그저 놀라워하며 그림에 대한 극찬을 이어갔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화면에 담겼고 방송에 탔다. 크기는 작아졌지만, 그 특유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은 여전한 빛의 마리아였다.
무라카미와는 일어로, 마크와는 영어로, 파리 작업실 직원들과는 완벽한 불어로 대화하는 것을 보여주며 태호의 외국어 실력 역시 방송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다음으로 마크가 태호를 들들 볶으며 디자인을 수정하고 디자인에 맞춰서 제작된 옷도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나중에는 태호가 완성된 가방을 보며 ‘저 가방 정말 이쁜데? 쇼 끝나고 나 줘’라며 태호가 마크에게서 가방을 탈취하는 장면도 나왔다. 그렇게 방송은 태호와 마크가 계속해서 옷을 놓고 협업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분량이 무라카미에 비해 훨씬 길어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첫째는 마크요 둘째는 태호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줬다.
8월 초순이 되자 때쯤 태호가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모습이 나오고, 마크와 직원들은 의상 작업의 마무리와 패션쇼 무대 준비를 시작하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9월 중순, 전 세계에서 몰려든 VVIP 들이 패션쇼 무대의 맨 첫 줄에 앉아 무대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무라카미와 태호가 나란히 앉아 무대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렇게 쇼가 끝이나 자 캐주얼 차림의 마크가 무대 뒤에서 나와 양옆에 모델 둘을 대동한 채 무라카미와 태호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두 모델이 무라카미와 태호를 일으켜 세워 무대에 세운 뒤 관객의 박수를 유도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뒤 화면은 무대 뒤 장면으로 넘어가 무대의 성공적인 피날레를 환호하는 모델들과 스텝들이 서로 인사하는 장면과 VVIP 중 일부가 무대 뒤로 찾아와 축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방송은 끝이 났다.
방송을 지켜본 태호는 살짝 골치가 아파졌다.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벨라와의 커플설이 나올게 첫 번째요, 마크와의 연인설이 나올게 두 번째였다. 그리고 두 개가 조합되어 태호의 양성애자 설이 나올게 확실해 보여 다음날 신문이나 잡지 혹은 인터넷을 살펴보기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 방송을 보고 환호한 사람들이 많은 곳은 일본이었다. 태호의 잘생긴 얼굴과 예일대라는 배경, 그리고 뉴욕의 패션엔 마크가 있다면 예술엔 태호가 있다고 할 정도의 인지도는 한국인이라는 핸디캡을 가볍게 무시할 정도였다.
루이비통 재팬을 통해 각종 방송 출연부터 세이코 시계 광고까지 정말 다양한 제안들이 태호에게 들어왔다. 태호는 일본을 갈 시간도 없고, 광고 모델을 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었기에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제안 전부를 모두 거절해 버렸다.
학생이라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말이다. 토요타나 렉서스에서 들어왔으면 혹시 이 기회에 차를 바꿀까 생각도 해봤지만 둘 다 연락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반응은 일본과는 달랐는데 이미 몇 번의 다큐멘터리와 최근 700만 달러 거래로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 작가로 자리를 거의 굳힌 상태였기에 큰 반향은 없었다. 그냥 '태호가 태호 했네' 정도의 분위기였다. 하지만 미술 시장은 달랐다.
태호의 그림을 찾는 사람이 늘어났는데 심지어 어렸을 때 했던 낙서라도 구하겠다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이 난리의 피해는 고스란히 태호의 주변 사람들에게 미쳤는데 태호의 스승으로 알려진 두 교수는 사무실에 있던 태호의 그림들을 어디론가 치워버렸고, 태호의 그림이 몇 개 놓여있던 미술 학원에서도 태호의 그림을 치웠다.
세 사람은 태호가 첫 방송을 타고난 후 서로에게 연락을 취해 안전 등을 이유로 그림을 눈에 띄는 곳에서는 치운 것이다.
그렇지만 이젠 태호의 인지도가 올라감에 따라 이제는 집에 걸어둔 그림조차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세 사람이었다. 결정타는 700만 달러 거래가 방송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한 때인데 세 사람이 가지고 있던 태호의 그림에 이젠 명백히 가치가 매겨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위에서 그림을 팔라는 연락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세 사람을 괴롭혔다. 슬슬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가 되었는데 이때 이들에게 접근한 건 미술관 신관을 막 오픈한 다움이었다.
“이번에 다움 미술관에서 태호 특별 전시실을 만들 예정입니다. 그림을 판매하셔도 좋고 저희에게 대여하셔도 좋습니다. 안전 문제나 도난 문제에서 자유로우실 수 있고요. 여기 계약서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미술관에서는 그림의 평가액에 따라 소정의 대여료를 드립니다. 이율은 은행 이자율 정도고요. 대여료를 지급할 경우 다움 미술관에서는 태호의 그림을 해외 유수의 미술관에 대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대여를 하실 경우 다움 미술관에 상시 무료로 입장하실 수 있는 티켓과 특별전 무료 티켓이 제공되고, 그 외 네버공원이나 버뮤다 베이에 상시 50% 할인을 받으실 수 ···”
다움은 정말 저렴하고 끈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