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뉴욕의 거래1
벨라는 오늘도 예뻤다.
루이비통 패턴이 들어간 옅은 하늘색 투피스를 입고 온 그녀는 루이비통 디자이너가 아닌 패션 모델 같았다. 지금도 그녀가 움직일 때 주위 사람들의 눈도 따라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신랄한 자기 평가를 하니 왠지 데이비드가 안쓰러웠다. 데이비드가 보기에 벨라는 짧은 기간 충분히 큰 성취를 이뤘으며 칭찬을 들을 자격이 있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졸업 전에 마크 제이의 콜을 받아 본단 말인가? 그래서 데이비드는 자신이 한 발 더 다가가기로 했다. 지난 번에 만났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지금의 모습도 처음에 봤을 때의 도도함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지만, 첫 키스의 기억까지 떠오르며 몸이 살짝 흥분됐다.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을 의지한다고 하지 않던가? 데이비드는 슬쩍 더 벨라에게 다가가 벨라의 손을 잡았다.
벨라는 살짝 놀란 듯 데이비드를 쳐다봤지만 손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둘은 끊어질 듯 말듯 한 대화를 하며 손을 놓지 않은 채 뒤에서 태호와 마크를 쫓아다녔다.
“태호야. 쟤들 손잡고 다니는데? 둘이 사귀어?”
마크는 뒤따라오던 두 사람이 조용하기에 뒤를 돌아봤다. 벨라와 데이비드가 손을 잡고 다니는 걸 보고 마크가 태호에게 물었다.
“쟤들 전에 거의 사귈 뻔했었는데... 지금은 잘 되나 보네요.”
"네 친구 이름이 데이비드이라고 했나? 쟤도 잘 생겼는데? 부잣집 아들 느낌이 팍팍 난다.”
“데이비드는 정말 부잣집 아들이에요.”
“그래? 어쩐지 부자집 포스가 느껴진다 했다. 뭐 전공하는데? 경제? 경영?”
“법대요.”
“우와. 공부도 잘했나 보네.” 마크는 영혼 없이 대답했다.
"너는 공부 잘했냐?"
"공부 잘했다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정상적으로 공부했으면 예일 못 갔을걸요?"
"흐흐."
*
태호와 마크는 같이 아모리 쇼에서 그림을 보며 품평을 이어갔다.
“특별히 새로운 건 없어 보이는데? 너는 어때?”
마크는 약간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태호에게 물어봤다.
“전시회 올 때마다 좋은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마세요. 아시면서.”
태호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했다.
“너랑 같이 오니 뭔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그럴만한 작품이 전시회마다 있다면 우리가 그림 그리고 옷 만들고 있었겠어요? 전 세계 돌아다니면서 그림 사고 있지.”
태호는 피식 웃었다.
“넌 그림을 고를 때 무슨 기준으로 선택해?”
마크는 마치 꼭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었던 듯 했다.
“몇 가지가 있는데, 제 기준에서만 얘기를 해볼게요. 일단 미술품을 만드는 솜씨가 좋아야 돼요. 모든 훌륭한 작가들이 다 솜씨가 좋은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훌륭한 작가들은 손재주도 좋았어요.
두 번째로, '얼마나 새롭냐'를 봐요. 기존에 본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들은 철저히 배제해요. 적어도 웬만큼 중요한 근대와 현대 미술작품들은 거의 다 알고 있으니까요.”
태호는 자신의 오른쪽 머리를 톡톡 치며 얘기했다.
“세 번째로, 그림에서 감정이나 메시지가 묻어 나와야 돼요. 많은 작품들이 그 감정을 말이나 텍스트로 전달하려고 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철저히 컬렉션에서 배제하죠. 제가 텍스트 들어간 작품을 거의 안 사는 이유에요.
네 번째로는 크기가 큰 건 더 많은 시간을 들여서 고민해야 돼요. 그림을 놓고 상상을 하죠. 이 작품을 작게 했을 때 같은 느낌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의외로 작품 크기로 관객을 현혹시키는 작품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어서, 그런 작품들은 배제하는 편이에요. 상상으로 그림을 작게 줄여도 그 느낌을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사요."
"다섯 번째로 작가를 봐요. 철학적이고 고민이 많고 책도 많이 읽고 배운 작가들이나, 깊이는 조금 부족해도 대화를 능수능란하게 끌고 가는 작가면 안심하고 사요.
그런 작가들은 작품의 미추를 떠나 작품에 고민이 담겨 있고 아니면 담겨 있는 것처럼 잘 꾸미죠. 여기에다 추가적으로 들은 얘기는 몸이 반응하는 그림을 산다는 사람도 있더라고요."
“몸이? 이해를 못 했어.”
“작품이 야할 경우에요.”
“아. 이해했다. 그럼 네가 말한 조건들을 다 만족하는 작품을 사는 거야?”
태호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저걸 다 만족하는 게 어디에 있겠어요. 2-3 가지가 맞거나 5가지 중 하나라도 특출난 게 있으면 사는 거죠. 또 다른 고려 사항은 작품이 놓일 위치도 생각해야 되고요. 집안 거실에 놓을 건데 핏물 뚝뚝 떨어지는 그림을 걸진 않잖아요.”
“되게 고려하는 게 많은데? 난 5가지나 생각해보진 않았어.”
“비싼 돈 주고 사는 작품들인데 잘 골라야죠. 난 거의 집안에 애완동물을 들이는 기분으로 골라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금방 질려 버릴 거 같거든요. 그러고 보니까 안 질리는 것도 중요하네요. 그렇잖아요. 한 번 산 작품 다시 팔기도 애매한 거.”
“그렇긴 하지.”
“마크는 어떤 기준으로 작품 구매해요?”
“난 가끔 내 의상 디자인에 영감을 줄 수 있는 걸 기준으로 삼아.”
“패턴을 중시해요?”
“패턴만 고집하지는 않아. 색깔이 될 수도 있는 거고, 담고 있는 철학이 나랑 맞을 때도 구매하곤 하지. 아직 배우는 중이라 경매에서 구매를 하기도 하고.”
“경매에선 누구 작품을 구매해요?”
“피카소, 모네, 세잔.”
“경매에 나오는 흔한 대작이네요.”
“흔한 대작이란 게 무슨 말이야?”
“이름값뿐인 작품 얘기하는 거예요. 괜찮은 작품들은 다 미술관에 들어가 있어서 경매에 나오는 작품들은 썩 괜찮은 게 없어요. 그거 살 돈이면 내 걸 사는 게 나을 거 같은데. 흐흐.”
“나도 네 것을 살 수 있으면 좋지만, 시장에 나온 게 없잖아. 또 나온다고 하는 것들은 다 가격이 어마어마하던데? 연작도 많고. 그나마 최근에 나온 건 그 호박 시리즈던데 그것도 싸지만은 않더구만. 게다가 사긴 했지만 호박 시리즈는 내 취향과도 살짝 거리가 있어.”
“뭘 좋아하는데요?”
마크는 얼씨구나 하고 원하는 그림을 말했다. 기대감이 뚝뚝 묻어났다.
“빛의 마리아.”
“그건 제작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데. 아, 이제 빛의 마리아라라는 이름의 그림은 제작 안해요.”
"그럼?"
"다른 이름 붙여야죠. 같은 이름으로 작품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요."
“이름이야 어떻듯 상관없어. 그냥 좀 작게 그려줘. 원래 크기의 1/4 정도?”
“그럼 그 그림의 원래 맛이 안 날 텐데요?”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작아도 그 느낌 그대로 날거야. 또 작으면 집에 걸어 놓고 보기 좋잖아. 이동성도 좋고.”
“그 정도로 사고 싶은 이유가 있어요?”
“아름답잖아. 그 그림이 방에 있다고 하면 내 품격이 올라갈 거 같은 기분이 들더라.”
“하하, 참··· 그럼 마크를 위한 스페셜 에디션으로 하나 그려줄게요."
“정말? 정말이지? 약속했다. 무르기 없다. 이 기회에 쇄기를 박자. 언제까지 그려줄 거야?”
“6월 전까지는 그려서 가져올게요."
“좋아. 그림값은 어떻게 할까?”
“윌슨 씨랑 거래하시면 될 거 같아요.”
“직접 거래 안 하고?”
“내가 직접 따온 거래는 윌슨 씨가 세금을 대납해 주는 조건으로 되는 거래라 윌슨 씨에게 수수료를 주더라도 이게 나아요. 윌슨씨는 제 수수료 정말 많이 낮춰 주기도 했고.”
마크는 태호에게서 그림을 하나 구매하기로 한 후 작품에 대한 관심이 확 떨어져서 다른 그림들은 보는 둥 마는 둥 했고, 태호는 눈에 띄는 작품이 없어서 슬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뒤에는 쫓아오는 커플은 손만 잡고 다니는 게 아니라 서로 거의 끌어 안듯 바짝 붙어 다녔는데 아무리 봐도 오늘 밤 지난번 못했던 일을 처리할 것 같아 보였다.
네 사람은 곧 전시장을 빠져나와 근처 멕시칸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고 각각 흩어졌다. 태호는 저녁을 먹고 서둘러 떠나는 벨라와 데이비드를 보고 중얼거렸다.
“괜히 멕시칸 식당에 왔나? 키스할 때 입에서 팥 냄새 심하게 날 텐데.”
*
아모리 쇼에 대한 태호의 혹평과는 별개로 윌슨이 마련한 썬 갤러리 부스는 그야말로 아모리 쇼에서 제일 중요한 전시 부스가 되어버렸다.
걸려있는 그림은 학교 수업 시간에 그려둔 몇몇 작은 작품들, 사랑 6연작 하나, 호박 시리즈 중 남은 작품들, 그리고 윌슨과 거래하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랑 6연작은 부스의 2개면에 걸쳐 걸려 있었다. 관람객들은 영화의 한 장면인 듯, 인생의 장면들인 것처럼 관람했다. 작품은 긴 호흡을 요구하였기에 부스 옆으로는 관람을 위해 대기 중인 사람들의 줄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붐비지만 나름 질서 있고 정돈된 관람 환경이었지만 단 한 명은 그러지 않았다. 높은 가격은 부르지 않으면서 정작 그림은 자신이 가져가야겠다고 떼를 쓰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 그 가격에 넘기기는 힘듭니다.”
“윌슨, 이건 자네나 태호에겐 기회야. 언제까지 빌바오에만 묶여 있을 건가? 설마 우리를 신경 쓰지 않겠다는 것은 아니겠지?”
“뉴욕의 이 업계에서 누가 짐을 무시하겠습니까? 우리도 가격만 맞으면 모마에게 이 작품을 넘기고 싶습니다. 하지만 거래 호가가 짐의 생각과는 차이가 큰 것 역시 사실입니다.”
“도대체 누가 붙었다는 건가?”
“뉴욕의 모든 미술관이 거래를 요청했고, 개인 컬렉터들은 이미 미술관이 부르는 가격을 넘어선 가격을 제시하고 있어요.”
“우리가 삼백만을 제시했는데?”
“금방 전에 오백만까지 접수했습니다.”
“22살짜리 이제 막 대학생 작품인데? 시장이 미쳐 돌아가는군.”
“작년에 찍은 오프라 쇼하고 지난달 선보인 루이비통과의 협업 때문에 시장이 과열인 건 사실입니다만, 다들 몇 년 뒤에 현재가가 최고가가 아니라 이게 시작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확신을 하고 계시더군요. 또 현재 태호만 한 인지도를 가진 작가들도 몇 안될뿐더러 그중에서 태호가 제일 클래식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어서 선호도가 높습니다.”
“예상하는 최종 가는 얼마인가?”
“미쳤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긴 한데, 칠백만은 넘기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멋지게 미친 가격이군.”
“닷컴 버블 이후 회복기라 그림 가격이 더 가파르게 오르는 감도 있고, 시장 참여자가 늘어난 것도 일정 부분 원인이 있습니다.”
“일단 팔지 말고 기다리게. 내 이사회에 얘기해서 더 준비를 할 테니.”
“알겠습니다. 기간은 기다릴 수 있지만 가격은 맞춰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그럼 다시 연락하지.”
거의 전화기를 집어던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전화가 끊어졌지만 윌슨은 씩 웃었다.
한동안 모마는 윌슨의 구매 권유를 한사코 거부하며 태호를 빌바오가 만들어낸 거품이 잔뜩 낀 작가 취급을 해왔다.
금방 전에 전화를 끊은 짐은, 윌슨이 듣기로는, 모마에서도 대표적인 태호 거품론자였는데 시장에서 태호의 가치를 최근에 더 높게 평가를 하니 아무래도 책임론이 내부에서 대두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부 사정을 대충 짐작한 윌슨의 입가에는 웃음기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