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사랑 6연작
지난여름 태호는 한국에서 정신없이 바쁘기는 했지만 미국으로 넘어온 다음에도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쉰 적은 없었다. 물론 진도가 늘 잘 나간 건 아니었다.
최근까지 스케줄이 빡빡하기에 작품을 제작하기가 힘들었다. 다만 소수의 작품이라도 작품을 공급해야 된다는 생각은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작가도 공장과 같아서 늘 무언가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쉬는 순간도 중요하지만 너무 쉬어 버리면 감각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패션 업계처럼 작품 제작에 미친 듯 몰두하는 것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패션 업계에 관심이 있었기에 태호는 그 업계 현황에 대해 벨라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패션쇼를 자주 하던데 얼마나 자주 하는 거야?
"6번 정도? 샤넬도 6번, 루이비통도 6번."
"두 달 만에 한 번씩 한다고? 내가 듣기로 한번 쇼를 할 때마다 옷을 백 벌 넘게 제작하는 걸로 아는데?"
"그 한번의 패션쇼를 위해 제작하는 신발도 500켤레가 넘어. 옷에 들어가는 액세서리까지 생각하면 재봉사 십수명이 늘 옷만 만들어야 돼."
벨라는 그중의 끝판왕 격인 마크 제이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마크는 루이비통도 하지만 자기 브랜드인 마크 제이 패션쇼도 해야 되기 때문에 일 년에 패션쇼만 12개를 해. 가끔 TV에서 보면 눈 밑에 다크서클이 사라질 틈이 없더라."
"그런데 난 마크 제이 옷은 거의 본적이 없어."
"다작을 하는데 그 중 소수의 작품만 시장에 제대로 생산되어 나와. 그것도 대부분 사람들의 옷장으로 사라지고, 이렇게 옷장으로 사라지지 않은 옷들은 소각장으로 사라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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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규칙은 미술계에도 적용된다. 계속해서 작품을 제작하고 그중에서 많지 않은 작품만이 마스터피스 혹은 명작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가격이 매겨지고 미술관에 보관되어 사람들에게 소개되는 것이다.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이 얼마나 독창적이냐는 것이고, 이 독창성을 유지하는 방법은 아마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을 열심히 훔치는 것이다.
'좋은 작가는 베끼고, 위대한 작가는 훔친다 (A good artist copies, but a great artist steals, 피카소).
세상에 새로운 것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고, 있다고 하더라도 발견하기 극히 어렵다. 그럼에도 수많은 작가가 새로운 작품을 만든다. 오늘 본 작품이 어제와도 달라야 하며 내일 만든 작품은 오늘 작품과 다를 것이다.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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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이유로 태호는 늘 작업실에 들려 무언가를 그렸다. 즉 손으로 무언가를 그리며 머릿속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때로는 연필로, 때로는 목탄으로, 때로는 물감으로 그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머리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극이 필요하던 태호에게 원하지 않던 큰 입력 값을 제공한 것은 뉴욕에서 있었던 자살 사건이었다. 단지 너무 큰 입력 값이고 원하지 않았던 입력값이기에 지우고자 했었다.
태호가 그 자살과 관련된 수십 점을 그리게 된 이유도 그를 괴롭히는 그때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빼내어 캔버스로 옮기겠다는 일종의 샤머니즘적인 생각에서 출발했다. 미지의 공포를 객관화해서 극복하겠다는 심리치료와도 의미를 같이 했다.
태호는 이 작업으로 생각보다 큰 효과를 봤다. 즉 머릿속에서 '자살'이라는 생각의 물감을 이용해 캔버스를 칠한 작품이 호박 시리즈이다.
이 작품을 제작할 때는 머릿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데에만 집중을 했기에 몰랐는데 빌바오에 그림이 걸리고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면서 나온 피드백은, 그림이 무섭고 두려우며 가끔은 소름이 끼친다는 것이었다.
몇몇 단골 관람객들로부터 그림을 전시에서 제외해 줬으면 좋겠다는 강도 높은 요청도 나오고 있었다.
태호는 이 사실을 에이미와의 통화를 통해 알았다. 둘은 나이 차이도 크게 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또 편하게 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친한 누나 정도 되는 사이였다. 예랑도 편하긴 한데 어릴 적부터 봐오고 너무 편한 사이라서 그런지 크게 의지는 되지 않는 누나라면, 에이미는 자신의 프라이버시를 철저히 지킬 수 있고 한편으로는 의지도 되는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조금씩 친해지는 단계라 예랑처럼 집에 있는 칫솔 개수를 아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서 미술관은 어떻게 할 생각이래? 그림을 치울 거래?"
"그 정도 요구는 드물지만 없지는 않은 유형의 요구라서 치우지는 않을 거야. 그런 경우 관람객에게 그림을 보지 말고 빨리 지나쳐가라는 조언하는 매뉴얼까지 있을 정도이고. 그림이 사람의 정신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클 수 있거든."
"그 정도로 충분한가?"
"정확히는 몰라. 그림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있다는 건 확실하지만 얼마나 있냐는 분명한 게 없으니까. 민감한 사람도 있을 테고 아닌 사람도 있겠지."
에이미는 잠시 더 그림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신이 아는 바를 설명했다.
"요즘 작업하는 게 있어?"
에이미는 골치 아픈 문제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듯 주제를 바꿨다.
"여름부터 지금까지 작품 제작하고 오프라 쇼 방송하고 이래저래 바쁘다 보니 없었어. 이제 시작해 보려고."
에이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신의 생각을 태호에게 털어놨다. 하루 이틀 생각한 주제는 아닌 듯 했다.
"그럼 빛의 마리아 같은 작품보다는 좀 작은 그림들을 그려보는 게 어때? 주제도 좀 가벼운 감정들 위주로. 팬심에 얘기해 보자면 사랑을 주제로 작품을 만들면 어떨까 싶어."
"사랑?"
"사랑. 첫사랑이 될 수 있고, 실연의 아픔도 될 수 있고, 떠나가 애인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이 될 수도 있고, 뜨거운 애인을 향한 성적 구애 혹은 만족감일 수도 있고. 다양하지.
그런 사랑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을 그려보는 게 어떨까 해서. 네가 그리는 그런 주제에 어떤 작품이 나올지 매우 궁금하거든."
"그 주제로 작품을 만들어 본 적이 있어."
"꺄악. 정말? 뭐였는데? 어땠어? 누굴 그린 거야?"
에이미는 갑자기 사생팬 모드로 변하더니 총알처럼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첫 키스의 주인공?"
"누군데, 누군데, 누군데?"
"어... 다성 집 딸? 공식적으로는 엘리지만... 비공식은 걔가 처음이라..."
"아, 그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그림은 어땠는데?"
"서현이 16살 때 초상화. 보여줄 수는 없지만 내가 제일 잘 그린 그림 중 하나야. 거의 3년 넘게 그렸으니까. 서현이도 그 그림에 대해서는 거의 찬양하는 수준으로 좋아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내가 그린 최고의 초상화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우와. 나도 보고 싶다. 혹시... 사진은 없겠지?"
"너무 개인적인 주제라서. 사진이 없기도 하지만 있다고 해도 공유할 만한 건 아니니까."
"그렇겠네.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지? 그런 주제의 그림이면, 혹시 알아? 본 사람들이 사랑에 빠질지? 보기만 하면 사랑에 빠지는 그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말 로맨틱할 것 같아."
태호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 게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 같았던 첫사랑과, 일 년에 걸친 강렬한 사랑을 경험했더니 나름 사랑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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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사랑이라는 주제로 6장의 그림을 구상했다.
첫 만남.
배경은 우주를 연상케 한다. 지구와 달이 모습이 근처에서 혹은 멀리서 보인다.
흰 셔츠 위에 스포츠 재킷, 짙은 푸른색 청바지, 흰색 스니커즈 신발의 태호.
단추가 없는 라이트 블루 시폰 블라우스, 흰색 플레어스커트, 발목 부츠를 신은 엘리.
두 남녀가 손에는 화이트 초콜릿 모카와 핫 초콜릿을 들고 서로에게 다가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만날 수 있게 은하수로 이어져 있다.
연애 감정
캔버스의 중앙 상단에는 하트 모양의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있다. 불길은 너무나도 거세서 그 아래에서 수줍게 키스를 하는 태호와 엘리를 같이 태워 버릴 듯한 기세였다. 하늘에서는 다양한 색과 모양의 금속성의 하트가 뭉게뭉게구름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그중 노란색 리본이 달린 가장 큰 하트는 붉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며 공중에 떠 있었다.
호감에서 애정으로
멀리 알프스산맥이 보이는 호수 앞에서 남녀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고 있어도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태호의 손을 잡은 여인은 샌디였다. 엘리가 머리를 풀었다면 샌디는 묶은 머리를 했기에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다른 여인이라는 것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관과 가치관의 공유
예일대 도서관의 스터디 룸에서 태호와 엘리가 테이블 의자에 앉아 서로 머리를 맞대고 눈을 감고 있다. 보통의 스터디 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태호가 엘리가 있는 스터디 룸에는 작은 책장이 있었고, 책은 표지가 보이게 놓여 있었는데, 고딕체의 멋들어진 글씨로 '내 집 마련', '수입', '노후', '자동차', '아이', '직장', '신혼여행', '결혼식', 등등의 인생관과 가치관보다는 실질적인 커플들의 고민거리를 읽을 수 있게 했다.
그림의 가장 큰 특색은 얼굴이 옆면만 보이는 이 그림은 매우 평면적이어서 마치 르네상스 이전 시대 그림처럼 보인다는 점이었다.
커플
코티지가 멀리서 보이는 노을이 지는 몰디브 해변에서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엘리와 정장을 입은 태호가 두 손을 마주 잡고 키스를 하려고 한다. 그 둘 사이에는 하얀 날개 달린 천사가 그 둘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노을 사이에 보이는 그름은 다양한 하트 모양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동반자
의자에 앉아 있는 노 부인 앞에서 한 노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고 있다. 뒤에는 초록 잔디가 넓게 펼쳐진 마당 넓은 목조 주택이 보이고 주위에는 늙은 골든 레트리버가 꼬리를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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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6가지 주제를 정해 스케치를 하고 채색을 시작했다. 작품을 제작하다가 구도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급하게 완성을 시키고 캔버스를 새로 마련해 다시 그렸다. 작품은 시간이 될 때마다 제작했는데, 추수감사절에 아무 곳에도 가지 않고 작업실에서 작업에 몰두했기에 한 주제에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총 20점의 작품을 제작했는데 6연작 작품 두 세트 제작을 완성하고 기타 그림들이 8점이 남았다. 이유는 태호가 동반자라는 주제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 총 6점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작품을 제작하면서도 엘리 그리고 그녀와 꿈꾸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태호는 상당히 괴로워했었다. 그러다 동반자라는 주제를 그리자 그러한 마음이 씻겨 내려가게 되고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 주제에 더 몰두하게 되니 6점이나 그리게 되었다.
태호는 그림이 완성되자 윌슨을 불러 그림을 가져가게 했다. 엘리가 그려진 얼굴을 봐도 이제는 무덤덤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