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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오프라 쇼1 (103/181)

104. 오프라 쇼1

10월 중간고사가 끝나고 얼마 후, 태호는 오프라 쇼를 촬영하기 위해 시카고로 날아갔다. 그전에 밀려드는 인터뷰와 방송 촬영으로 도저히 초상화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던 태호는 벨라에게 연락해 양해를 구하고 초상화 관련 사업 시작을 잠시 뒤로 미뤘다.

태호가 시카고에 갈 때 윌슨과 동행을 했는데 윌슨은 빛의 마리아, 벨라의 전신 초상화, 그리고 호박 시리즈를 먼저 시카고로 배송했다.

오프라 쇼는 태호의 그림 세 개를 나란히 전시해 놓고 그림에 대해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게 그 빛의 마리아군요. 제작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습니까?”

오프라는 거의 가로세로 1.6미터에 육박하는 그림을 경이롭다는 듯 쳐다보며 질문 했다.

“다섯 점의 작품을 동시에 작업을 했습니다. 아무래도 건조 시간이 있다 보니까. 완성하는 데는 넉 달 넘게 걸렸죠.”

“그래도 크기에 비하면 짧은 시간에 그린 듯 합니다.”

“9월부터 주말도 거의 없이 이 작업에 매달렸습니다. 나중에는 하루에 5-6시간만 자고 작업을 했을 정도였고요. 절대 짧은 시간은 아니었습니다.”

“태호는 Faceless의 원작자가 원래 의도한 그림이 빛의 마리아라는 설명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는지 다시 한번 설명해 주시죠.”

“그림을 보면 작가가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지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손을 떨렸는지, 빨리 그렸는지, 천천히 그렸는지, 망설임이 있었는지, 붓에 힘이 있었는지 아닌지.

이런 정보들은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그림을 본 순간부터 느껴지는 게 있었지만, 그림을 오래 보고 있으니 더 확실해지는 게 있더군요. 이 그림을 그린 작가, Theo, 가 어떤 상태로 그림을 그렸는지를요.”

“Theo는 누군가요?”

“Theo는 그림 뒤편에 적힌 그림의 원작자입니다. 애칭이라고 생각되며 비교적 흔한 애칭이기에 실제 이 그림의 원작자를 찾는데 큰 도움은 안 되고 있죠.”

“그전 답변에서 그림을 통해 느껴지는 게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것까지 느낄 수 있을까요?”

“그림에 애정을 가지고 찬찬히 오랫동안 보다 보니 가능해졌습니다. 참고로 빛의 마리아를 작업하기 전에 저는 Faceless 복원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3개월간 하루 종일 Faceless를 봐왔죠.

이렇게 그림을 오래 보다 보면 작가의 몸 상태까지 느껴집니다. 제가 느낀 Theo의 몸은 늙고 병들고 약했습니다. 물론 정신은 열정으로 가득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도저히 그런 몸 상태로 이 그림을 완성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태호가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지금 마치 우리는 Faceless 전문가의 설명을 듣는 듯 합니다. 아주 흥미진진합네요.”

태호는 화면에 Faceless의 왼쪽 하단부 옷자락을 크게 확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화면이 바뀌자 태호는 방청객을 등지고 오른손으로 붓을 든 것처럼 모습을 취한 뒤 팔을 가늘게 떨며 선을 그렸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면 선에 곧고 힘 있게 뻗는 게 아니라 물감에서 알 수 있듯이 잔 물결치듯 그려져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그림의 거의 모든 부분에서 발견이 됩니다. 이건 일부러 하지 않는 이상 하기 힘든 표현 방법이고, 사실 일부러 할 필요도 없죠.

쭉쭉 뻗은 선들이 힘 있고 더 아름답다는 건 그 시대에도 상식과도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할 수 없었다는 얘기이고 제가 보여드린 듯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닌 사람이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죠. 그래서 전 이걸 더 힘 있게 표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태호는 빛의 마리아로 다가가 설명을 계속했다.

“Faceless를 보통 최초의 인상주의 적 그림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전 다른 상상을 했습니다.

Theo라는 사람이 매우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리는 작가인데 죽기 직전에서야 빛의 오묘함을 강제로 깨닫고 그린 그림이 Faceless였다는 가정을 한 거죠.

만약 정상적인 모습이었다면 더 아카데믹한 그림을 그렸을 것이고 지금 보시고 계신 빛의 마리아 같은 그림을 그렸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프라는 태호의 설명에서 이해가 안되는 부분을 콕 찍어 설명을 요구했다.

“빛의 오묘함을 강제로 깨닫게 되었다는 얘기는 무슨 의미인가요?”

“지금이야 백내장이 간단한 수술로 제거 가능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방법이 없었죠. 그림을 제대로 못 그릴 정도로 허약했을 Theo가 백내장도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태호 씨, 다음 그림도 설명해 주시죠."

오프라는 벨라의 전신화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벨라 마리노 양의 전신 초상화 그림인데, 그녀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 파슨스 4학년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친구 사촌이며, 친한 사이 입니다.

그녀를 통해 받은 옷에 대한 영감이 있어 스케치를 해서 줬는데, 벨라가 그걸로 저런 옷을 제작했습니다. 전 그걸 바탕으로 이 그림을 그린 거죠.”

오프라는 그림 속의 벨라에게서 무언가 특별함이 있다는 걸 알아채고 질문을 이어갔다.

“그림의 벨라는 매우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더 특별한 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왜일까요?”

“오프라도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나는 벨라가 지금 현재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담기 위해 모든 걸 치밀하게 계획하고 계산했습니다.

저 표정, 귀걸이, 팔찌, 가방, 신발 그 모든 게 다 별도로 제작된 것을 착용하고 그림을 그린 것입니다.

내가 제시한 콘셉트에 맞춰 나머지 모든 걸 벨라가 제작했죠. 대단한 디자이너입니다.”

오프라는 호박 시리즈를 가리키며 설명을 요구했다.

“그럼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 그림은 뭘까요? 사연도 있을 것 같고 매우 특별해 보입니다만.”

“이 그림은 내가 겪은 슬픈 이벤트가 모티브가 되어 제작된 그림입니다. 몇 달 전에 뉴욕에 있는 친구 집에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같이 기분 좋게 저녁을 먹고 와 한창 얘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창밖으로 보이는 센트럴파크와 그 주위 뉴욕의 야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그래서 찬바람도 쐴겸 구경을 하러 발코니로 나가 야경을 보려는 찰나에 뭔가가 내 앞으로 떨어졌는데 그 떨어지는 무언가의 눈과 제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사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확살하지 않지만 콘도 옥상에서 떨어졌고, 죽기 전에 본 마지막 얼굴이 저였던 거지요. 큰 충격을 받았고, 주위 도움으로 점점 나아졌습니다만, 그 눈동자에 대한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내가 겪은 기억을 객관화해서 볼 수 있다고 들었거든요. 오늘 들고 나온 그림도 그때 그렸던 그림 중 하나입니다.”

“왜 호박으로 그렸는지도 설명해 주시겠어요?”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그림이에요. 한국에서는 지금은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복잡한 장례문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로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의식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죽는 순간 내가 들은 소리는 무엇인가 호박처럼 깨지는 소리였고 난 그걸 죽음의 순간이 아닌 삶의 재탄생의 순간으로 바꾸고 싶었습니다.”

태호의 말이 끝나자 오프라가 방청객 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그때 죽었던 사람의 여동생이 나와 있습니다.”

이제 막 대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눈시울을 붉힌 채 일어선 후 말했다.

“그날 죽은 사람은 제 오빠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오빠는 꿈꾸던 뮤지컬 배우 오디션에 계속 떨어져서 의기소침해 있었고 우울해했어요.

그날도 오디션을 보러 간다는 문자 남기고 연락이 끊겼는데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방청객은 이후 말을 잊지 못했다.

태호는 그녀에게 다가가 안아주고는 말했다.

“정말 미안합니다. 오빠분의 장례식이라도 참석했어야 했는데 그럴 경황이 없었네요.”

그러면서 태호는 가지고 온 그림을 들고 가 그 여대생에게 건냈다.

“오빠 분의 마지막을 담은 작품입니다. 대수롭지도 않은 졸작이지만 이 그림을 당신이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방청객들 사이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곧 오프라도 그림에 대해 설명 했다.

“태호는 4연작으로 호박이라는 시리즈를 제작하였으며, 얼마 전 빌바오 미술관이 4백만 달러에 그 시리즈 작품을 사들였습니다. 태호가 전달한 그림은 그 시리즈의 모티브가 된 첫 그림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입니다.”

방청객들은 더 큰 박수로 태호를 환호했고, 여동생이라는 사람을 위로했다.

"이런 그림으로 오빠를 잃은 상실감을 채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본 오빠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잘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잠시 분위기가 환기될 때까지 기다린 오프라는 분위기가 전환된 걸 확인하고 계속 진행을 이어갔다.

“여기 태호가 어렸을 때 그렸던 그림을 다움 미술관의 허락을 받아 오늘 스튜디오에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오프라가 멘트를 남기자 한쪽에서 스태프들이 그림 두 개를 더 가지고 와 이젤에 올려놓았다. 하나는 성철 스님의 그림이었고, 하나는 한복 시리즈 중 처음 콘셉트로 잡았던 연정아가 입은 한복이었다. 태호는 이 그림들을 여기서 볼 줄 몰라 놀라면서도 오랜만에 그림을 보자 반가웠다.

태호는 자신의 그림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 그림들을 여기서 볼 줄은 정말 몰랐네요.”

“듣기로는 이 그림들이 아주 어렸을 때 그린 그림이라고 하는데 언제 그린 것인지 소개해 주겠어요?”

“여기 이 분은 몇 년 전 입적하신 성철 스님이라는 분입니다. 한국의 위대한 종교 지도자 중 하나로 추앙 받고 계신 분이며, 그분을 12살 때 뵙고 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걸 12살 때 그렸다고요? 혹시 태호는 태어날 때부터 그림을 그렸답니까?”

오프라는 농담을 건넸고 태호도 웃으며 받았다. 방청객에서도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린건 맞아요.”

“이 그림은 언제 그렸어요?”

오프라는 한복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건 한국의 전통의상인데 14살 때 그렸습니다.”

“이런 옷들로 패션쇼도 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정말 다 알고 계시네요. 맞아요. 한복을 15점 정도 그렸고, 그 그림들을 콘셉트로 제작한 옷을 가지고 패션쇼를 했습니다. 아마 그 쇼가 그해 한국에서 했던 가장 큰 무대였을 거예요."

오프라는 한복 얘기는 짧게 넘기고 학교 얘기로 넘어갔다.

“정규 학교를 안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예일대는 어떻게 입학했나요?”

“정규 교육은 안 받았지만 다른 교육들은 한국에서 거의 최고 수준으로 받았습니다. 철학과 동양미술은 대한대의 김 창기 교수님에게 배웠고, 서양미술과 현대 미술은 발해대의 강 재범 교수님에게 배웠습니다.

사진은 양준만이라고 파리 엘르의 프리랜서 작가에게 배웠고요. 그 외에도 베이징과 도쿄에도 나의 친구이자 예술 선생님들이 있습니다. 예일대에 입학한 건··· 이렇게 말하지 말라고 하던데··· 공부하니까 되던데요.”

방청객들이 야유를 보냈고, 오프라도 웃으며 그런 멘트는 삼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대학 입학 얘기가 끝나자 오프라는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그림이 너무 커서 가지고 스튜디오에 가지고 오지는 못했습니다만, 태호가 13살에 그린 그림을 화면으로 보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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