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한국행2 (101/181)

101. 한국행2

서현과 커피를 마시기 위해 커피숍 앞에 차를 세우자 길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쳐다봤다.

빨간색 엔초 페라리가 문을 하늘로 치켜세우듯 올린 후 모델 같은 외모의 태호가 내리자 옆에서는 비명 같은 환호소리마저 들렸다.

그날 저녁 바로 자동차 동호회 카페나 사이트에서는 태호의 선글라스 낀 사진이 쫙 퍼졌고 신상 정보까지 같이 퍼졌다. 덤으로 서현까지 태호의 여자친구로 알려졌는데 찌라시에는 '다성의 막내딸 열애 중'이라는 소식이 돌 정도였다.

*

엔초 페라리를 몰고 다니는 건 좋았는데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정해진 코스만 다닐 수 있었다. 방지 턱이 없는 구역만 주행 가능했다. 턱이 조금만 높아도 차 밑에서 가슴 아픈 소리가 들렸다.

다음으로 엄마의 갈굼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동네에 하도 신기한 차가 들어섰는데, 글쎄 그 차가 10억이나 한 대. 더 신기한 건 뭔지 알아? 거기서 내 아들이 내리네? 넌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어떻게 겁도 없이 10억짜리 차를 사?"

다음 문제는 주차였다.

"글쎄 누가 이런 비싼 차를 이런 아파트 단지 주차장에 세우면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어요. 다른 차들이 문콕 할까 봐 무서워서 옆에 주차를 못해요."

그 주차로 항상 난리인 이촌동 아파트 단지인데 엔초 페라리 옆에는 항상 자리가 비워져 있었다.

이 차를 무진장 좋아한 건 오로지 영준이었다. 태호는 차를 집에 몰고 오자마자 아빠인 영준에게만 슬쩍 얘기했고 둘은 벌써 몇 번이나 같이 드라이브를 나갔다 왔다.

문제는 관리 및 유지.

"아빠, 나 없을 때 이차 몰고 다닐 수 있어?"

아들의 질문에 영준은 몇 번을 고민해 봐도 이차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번호판을 떼고 어디 보관소에 맡기지 않는 한 말이다.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차 값도 오를 거 같긴 한데 관리하는 게 더 일이었다.

"안될 것 같은데? 이거 어디 팔까?"

태호도 차는 아깝지만 자신이 없다면 타고 다닐 사람도 관리할 사람도 없는 이차가 애물단지처럼 느껴졌다.

그때 서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목소리에는 짜증과 어처구니없음이 한껏 배어있었다.

"하... 정말 너에게 이런 거 얘기하기 그런데... 아빠가 정말 부탁해서 물어보는 거야... 너 그 차 안 팔래?"

"... 갑자기 왜?"

"아빠가 그 차를 정말 가지고 싶어 했는데 못 사셨거든. 그런데 네가 가지고 있다고 하니까 몸이 달았어. 그 차 아빠에게 주면 차 값을 두 배로 쳐주신다는데... 괜찮을까?"

"그 차 없으면 난 타고 다닐 차도 없는데?"

"그래? 잠시만... 아빠!!!"

전화기 넘머로 '태호가 차 팔고 나면 타고 다닐 차 없대!!!'라는 소리가 들렸다. 서현이 잘한다!

잠시 후.

"내가 아빠한테 같은 페라리로 한대 주라고 했어. 잘했지?"

"어. 잘했어. 차 언제 가져갈까?"

"잠시만."

잠시 후.

"오늘 저녁에 가져올 수 있어? 약속도 취소하고 오신다는데?"

"알았어."

태호가 저녁에 차를 끌고 가자 서현 아버지가 경호원을 대동하고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차량 양도 계약서를 작성한 후 키를 넘겼다. 엔초 페라리를 산 가격의 배를 받았고, 덤으로 페라리 360 모데나까지 새 차로 받았지만 찝찝한 기분까지 가시는 건 아니었다.

모데나로 바꾸자 태호 아빠도 안도하며 그래도 감당 가능한 차량이라며 좋아했다. 페라리는 페라리라 여전히 차들이 피해 갔지만 홍해는 아니었고 그냥 서해 간조 정도는 되었다.

하차감도 예전만 못했다. 엔초만큼의 샤프함이 모데나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태호는 툴툴거리면서도 출퇴근용으로 끌고 다녔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꼭 한대 사겠다고 다짐하긴 했지만 말이다.

허나 그것도 잠시, 차를 판 금액도 엄마에게 고스란히 빼앗겼다. 엄마는 그 돈을 가지고 그냥 도곡동에 새로 들어선 타워팰리스라는 미분양 아파트를 무슨 재주를 부렸는지 몇 채를 구입했다. 그리고 태호 이름으로 되어 있는 등기 서류만 아들에게 보여줬을 뿐이다.

*

6월 초부터 시작한 작업은 7월 말 정도가 되어서 끝이 났다. 대구의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포함한 식구들과 일주일 몰디브 여행까지 갔다 왔음에도 8월 초로 예정된 일정을 맞추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태호가 이번에 그린 그림은 다른 빛의 마리아와 차이가 있었는데, 전체적인 모습은 거의 같았고 채색도 Faceless 원작과 비슷하게 했다.

차이점은 붓질이 좀 더 거칠고 자유로웠다. 작년에 빛의 마리아를 그리면서 보여줬던 절제 미가 이번 그림에는 없었다. 호불호가 갈릴 수 있지만 태호는 무시하기로 했다.

똑같은 그림을 하나 더 그린다는 게 얼마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인지 이번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붓뿐만 아니라 손가락과 손톱까지 이용해서 그렸는데 이런 방법으로 작업한 건 어릴 때 이후 처음이었다.

이건 조선시대에 유행하던 화풍으로 지두화라고 하고 현재는 핑거 페인팅이라고 불리며 많은 화가들이 즐기는 표현 방법 중 하나다.

태호는 이 원시적인 느낌이 가득한 방법에 완전히 매료되어 나중에는 붓으로 그린 부분까지 손으로 고치기 시작했는데 얼굴 부위를 제외하면 정말 많은 부위를 손가락으로 그린 선들로 완성되었다.

붓으로 그린 그림보다는 부드러움이 덜 하고 선도 거칠고 투박해도 훨씬 강한 느낌이 났다. 기존의 빛의 마리아가 화폭에 얌전히 모셔져 있는 느낌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화폭을 뚫고 나올 것 같은 박력이 느껴졌다. 그 정도로 캔버스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달랐다.

완성된 작품을 확인한 미술관 측에서는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보았던 빛의 마리아와 다른 그림에 환호했다.

태호의 그림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한창 휴가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술관 관장부터 시작해서 정부 부처 관계자까지 덕수궁으로 총출동을 했다.

윌슨이 거부한 딜을 태호가 받아들인 이유를 나중에 알아낸 미술관 측은 감사를 표하며 정부에 화관문화훈장을 추서하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현실적으로도 화관 문화 훈장은 15년이라는 경력을 요구해 태호가 받을 수도 없었지만, 태호는 이게 군대 문제에 도움이 될 수 있겠다 걸 예랑에게 들은 이후, 은근슬쩍 미술관 측 등을 떠밀었다.

이번 거래를 추진한 문화관광부는 희색이 만연했는데 얼마 뒤 이찬도 당시 장관까지 열혈한 고마움을 표현하고 갔다. 태호는 완성한 작품을 사진으로 찍어 빌바오와 윌슨에게 보냈다. 그리고 미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이번 거래를 처음부터 잘 알고 있던 윌슨은 태호가 그린 그림이 자기가 알고 있는 그림과 한눈에도 다른 그림이라는 걸 알아채고 그림을 확인하겠다며 비행기에 올랐다. 빌바오는 에이미를 한국으로 보내는 한편, 제이슨은 같은 형식의 그림이 빌바오에도 필요하다고 윌슨을 갈구기 시작했다.

다움의 김유미 관장은 잠시 유럽 출장을 갔다 온 사이 남편이 벌인 일에 경악을 하며 태호와의 관계가 틀어질까 봐 전전 긍긍했다. 그러다가 완성된 그림을 보고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서 페라리 차 키를 집어 들고 태호를 만나려 했다. 진작에 태호는 피로 누적으로 잠시 쉬어야겠다는 말만 서현을 통해 남기고 핸드폰을 꺼뒀다.

며칠 후 태호는 명동의 롯데 호텔에 나타난 윌슨과 에이미를 만나 덕수궁의 새로운 빛의 마리아를 확인하러 갔다. 그림을 본 두 사람은 말을 잊지 못한 채 그림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 뒤, 에이미는 ‘이거 얼마면 돼?’를 시전했고, 윌슨은 ‘이거 또 그릴 수 있나?’를 물어봤다.

에이미는 꼭 핑거프린팅 기법을 이용한 다른 작품을 제작해 달라는 부탁을 남긴 채 일정을 이유로 바로 미국으로 돌아갔지만, 태호는 윌슨이 먼 길을 날아온 김에 같이 북경으로 날아가 예술품 쇼핑을 즐겼다.

몇 년 전 북경에서 확인했던 가격에서 이미 상당히 올랐지만 중국 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그림값은 더 오를 것이 확실했기에 태호는 윌슨이 가용하다고 하는 범위 내에서 구매했다.

쩡판즈와 위에밍중, 장샤오강 등 한창 인기 있는 작가들 그림을 그야말로 싹쓸이했다. 태호가 정말 괜찮다고 생각한 그림은 쩡판즈가 팔기를 거부해 결국은 태호가 쩡판즈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나서야 받아온 그림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작품은 한국에 보냈고 나머지는 윌슨이 구매한 그림과 더불어 미국으로 보냈다.

김유미 관장은 태호가 덕수궁에 모습을 비췄다는 얘기가 들리자 서현을 통해 연락을 했지만 태호는 이미 북경으로 윌슨과 떠난 뒤였다. 약이 바짝 오른 김관장은 태호를 감금시키고 만두라도 먹이며 그림을 그리게 만들 어떤 방법이 없나 고민을 하던 찰나, 이제 대학교 4학년인 딸이 보이기 시작했다.

“너 태호와 무슨 관계야?”

“친구.”

“교제 중인 거야 아니면 뭐야?”

“정말 손도 안 잡고 다니는 사이인데?”

“자랑이다!”

“아니 왜! 그 녀석이 전혀 반응을 안 하는데!”

“그럼 열애설은 왜 뜬 거야?”

“걔가 차 샀다고 하길래 같이 타다가 그렇게 된 거지.”

“태호가 먼저 제안한 게 아니고?”

"여사친이라며 선을 딱 긋고 행동해.”

“훌륭한 젊은이네··· 가 아니지. 넌 뭐하고 남자 하나 못 휘어잡는 거야!”

“엄마도 알잖아. 게 여자친구가 미스 프랑스인 거. 그런 애가 태호 옆에 붙어서 지내는데 내가 뭘 어떻게 해?”

김관장도 KBC에서 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후 엘리가 얼마나 미녀인지는 잘 알았다. 하지만 남녀 관계라는 게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둘이 아직도 사귀어?”

“모르겠는데. 사귀지 않을까?”

“둘이 전화하는 거 봤어?”

“아니.”

“엄마가 한번 비서실 통해 알아볼 테니까 너도 한번 살펴봐.”

그룹 비서실을 통해 알아본 결과 의외로 쉽게 엘라의 상황에 대해 파악이 가능했는데, 워낙에 엘라의 소송이 프랑스를 한동안 시끄럽게 했기 때문이었다.

“태호 여자친구는 지금 파리에서 공부 중이란다. 태호가 연락하는 거 봤어?”

“아니.”

“그럼 둘은 지금 깨졌거나 그에 준하는 상태겠네. 엄마는 여기까지다.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해라.”

“아빠는? 옛날부터 나만 보면 대학 졸업하면 시집보내겠다고 했는데?”

“요즘이 조선 시대니? 20대 초반에 결혼하게? 그런 거 걱정하지 마. 그래, 얘기 나온 김에 물어보자. 넌 졸업하고 뭐 할 거야?

“대학원 가던지, 아니면 직장 생활을 시작하려고.”

“대학원? 유학은 네 아빠가 별로 안 좋아할 듯싶은데. 회사 생활은 무슨 생각으로 하겠다는 거야? 경영 수업이라도 받겠다는 거니?”

“내건 내가 챙겨야 되지 않겠어?”

“그건 나중에 네 아빠랑 같이 논의해 보자. 태호는 언제 들어가니?”

“일주일 뒤.”

“쯧. 작년에는 안 들어오더니 올해는 남 좋은 일만 해놓고 가는군. 태호가 이제 몇 학년이지?

“3학년.”

“게가 너랑 동갑 아니니? 왜 3학년이야? 군대를 갔다가 온 것도 아니잖아.

“군대 안 가려고 대학을 늦게 진학했어.

“그런 방법이 있는 줄은 몰랐네. 앞으로 태호가 뭐 할 건지 잘 알아봐. 그래야 우리도 그림 주문을 넣지.”

“알았어.”

KBC과 예랑은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거의 리얼 버라이어티 수준의 밀착 촬영을 했다. 엔초 페라리까지 찍었다가 나중에 차가 몬데나로 바뀌는 것을 보고 앞 촬영 부분은 눈물을 머금고 지웠다. 차가 정말 환상이었는데. 다성과 태호의 이상한 거래가 눈에 띄어봤자 본인에게도 태호에게도 좋을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예랑은 방학 때는 쉬어야 한다며 평소 눈에서조차 힘을 풀고 시시껄렁하게 다니는 태호가 영 어설퍼 보였지만, 작품을 제작하는 태호는 그 뒷모습 그림자조차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태호야, 태호야."

"왜? 뭔데?"

한창 그림을 그리고 있던 태호는 예랑의 목소리에서 불길함을 느끼며 뒤를 쳐다봤다.

사람 잡아먹은 듯한 빨간 립스틱을 하고 있던 예랑은 정신 나간 말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혹시, 너... 옷 좀 벗고 그리면 안 될까? 정말 멋져 보일 거 같은데. 상의만 탈의하라고... 바지는 참아야지..."

경악한 태호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는지 계속해서 횡설수설을 했다.

"그림 그릴 때 꿈틀거리는 네 등 근육을 찍으면 시청률 대박날 거 같은데... 안될까?"

태호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당장 나가!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무슨 시청률의 노예도 아니고. 나가!!"

그렇게 두 달을 다니며 찍고 난 뒤, 그림의 완성 장면을 본 순간, 끓어오르는 벅찬 감동에 예랑은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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