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한국행1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간 태호를 애타게 기다린 건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이제는 KBC에서 일하는 예랑은 일 년 전 BBC와의 다큐멘터리를 성공적으로 제작하고 방영한 공로를 인정받아 한동안 꿀을 빨며 지냈다.
하지만 4월과 5월 자신이 주도해서 만들고 방송이 나간 다큐멘터리 성적이 신통치 않아 꽤나 실적 압박이 들어오고 있었다.
예랑은 스카우터가 어린 유망주에게 구애하듯 이메일과 문자를 보내 언제 한국에 들어오느냐고 물어봤고, 태호로부터 기말고사 치르는 학생에게 웬 민폐냐고 욕을 한껏 듣고 나서야 조용히 그리고 초초히 태호의 귀국을 기다렸다.
나중에는 공항에 태호의 부모 대신 자기가 나가도 되냐고 이메일을 보내 태호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어찌 되었던 예랑이 난리를 친 덕분에 태호는 귀국 후 예랑을 곧바로 만났다. 만난 장소는 지난번의 곱창집이었다.
“'잘 지냈어'라고 물어보기엔 얼굴이 엉망이네.”
예랑 얼굴은 나이 탓만은 아닌 듯 작년보다 좀 상해있었다.
“넌 잘 지낸 것처럼 보인다. 살도 좀 쪘네? 보통 기말고사 보면 살이 빠지지 않냐?”
“친구 집 갔다가 너무 잘 먹어서 살이 많이 쪘거든. 빠진 게 이 정도야. 왜 이렇게 살이 안 빠지는지 모르겠어.”
“사육 당했냐?”
“비슷해."
태호는 잠시 데이비드 집안에 대해 설명하다, 전화를 자주 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누나답지 않게 난리를 친 거야?”
"네 덕분이자 너 때문이지."
예랑의 설명에 따르면 Faceless로 재미를 본 KBC가 예랑에게 다른 미술 관련 다큐멘터리를 맡겼다. 이에 예랑은 국내의 새로운 화가들의 움직임을 강조해서 조명했는데 내용이 좀 산으로 갔고, 꽤 안 좋은 성적표를 받았다.
“도대체 어떤 화가들을 방송에 담았기에 그리 성적이 안 좋았어?"
"처음에는 내가 잘못 기획해서 그런 줄 알았어. 그런데 네가 안 나오니까 누가 나와도 그냥 밋밋하더라. 역시 방송이나 음식이나 재료가 좋아야 되나 봐. 요리사가 아무리 재주를 잘 발휘해도 한계가 있어.”
“누나, 말은 바로 해야지. 요리사도 안 좋았잖아.”
순간 예랑은 속에서 욱하고 올라왔지만 사회 짬으로 늘어난 인내심을 발휘하여 삼켰다.
“그래. 인정. 좀 도와줘.”
더 갈구면 울던지 때리든지 할 것 같기에 태호도 점잖게 나가기로 했다.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빛의 마리아를 그려줘.”
태호는 오른쪽 검지로 자신의 귀 주위를 빙글빙글 돌리며 예랑을 쳐다봤다. 눈빛은 ‘너 지금 정상이니?’라는 표정이었다.
“내가 그래도 너랑 개인적으로 친하다는 이유로 정말 지난 일 년간 한국 미술계를 비롯해 사회 각계각층으로부터 얼마나 시달림을 많이 받았는지 알아?”
“그건 모르겠는데. 누나가 그걸로 꿀 빨았다는 건 알아.”
“그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런데 정말 날 너무나도 괴롭히는 거야. 볼 때마다 웃으면서 태호 작품이 한국의 미술관에도 전시가 되면 좋겠다는 거야.”
“내 그림 죄다 다움이 들고 있잖아.”
“그쪽이야 잔뜩 들고 있으니 잠잠하지. 문제는 없는 쪽. 국립이나 공립 미술관에서 볼멘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특히나 현대 미술관에서 난리지.
그래서 이번에 그쪽에서 큰맘을 먹고 네 작품 구매를 위해 10억 예산을 편성했다고 해. 빛의 마리아를 그리면 바로 사겠다고 말이야.
한국의 생존 작가 거래 금액으로는 최고 금액을 갱신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네가 한국에서 생존 작가 중 최고의 화가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줄 이벤트가 되는 거야. 이건 정말 현대 미술관에서 큰맘 먹고 진행하는 거야!”
“난 윌슨에게서 따로 들은 얘기가 없는데?”
태호는 시차를 생각해 보니 전화 걸기가 조금은 일러 나중에 전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건 그렇고. 다른 건 뭐가 있어?”
“KBC에서 원하는 건 빛의 마리아를 제작할 때 옆에서 그걸 촬영하고 싶어해.”
“KBC의 조건은?”
“무슨 조건이 필요해? 네 한국 내에서의 인지도를 높이는 일인데?”
“누나. 내 한국 내에서 인지도는 시간문제일 뿐 내가 미국에서 잘나가면 올라갈 수밖에 없어. 또 안 올라가도 크게 상관도 없고. 내가 그림 여기서 더 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지금 KBC는 내 영상을 찍고 수익을 얻을 거면서 나한테 오는 것도 없이 입 닦는다는 거 아니야. 누가 좋아하겠어? 윌슨이 나한테 연락 안한 이유도 알겠다.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였네."
“10억이 작은 금액은 아니잖아.”
“누나, 내가 최근에 그린 작품이 얼마에 거래된 줄 알아? 참고로 4연작이다.”
“4연작이면... 뭐지? 그런 작품도 있었어?”
태호는 핸드폰에 있는 호박 시리즈 사진을 보여주며 빨리 가격을 맞춰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백만 불? 아니야? 이백만 불? 아니야? 삼백만 불? 아니야? 오마이갓. 사백만 불?”
그제서야 끄덕이는 태호.
“미쳤구나. 널 뭘 보고 사백만 불을?”
“누나? 설마 빌바오가 미쳤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그걸 빌바오에서 샀니? 이해불가다.”
“빛의 마리아는 그 사백만 불에 예약된 호박 연작보다 나에게는 훨씬 더 가치 있는 그림이야. 정부측에서야 10억이란 돈을 지출하기 위해 큰맘을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윌슨의 판단으로는 내 여름 방학 동안 내가 충분히 리프레시 하는 게 그 10억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했을 거 같네.”
“태호야.”
“어.”
“나랑 결혼할래? 나 네 둘째 마누라, 아니 셋째 마누라로도 만족하고 살게. 너 그냥 나 데리고 살면 안 되니?”
“농담이라도 정말 최악이야.”
태호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예랑을 쳐다봤다.
“아니, 내가 이런 헛소리가 나오지 않고 배겨? 어떻게 일 년 사이에 그림값이 몇 배가 뛰어?”
“내가 잘나서?”
순간 열이 확 오르려고 하는 걸 꾹꾹 눌러 담고 예랑은 말을 이었다.
“알겠는데, 이것도 정도것이여야지. 보통은 상을 수상하거나, 돈 많은 후원자를 만나야 그런 상승을 하는 거 아니었어?”
“돈 많은 후원자 있잖아. 빌바오라고.”
“그렇군. 방송을 못하면... 아... 이럼 망하는데...”
“뭐가?”
“내 올해 평가.”
“그 정도로 안 좋아?”
“이거 성공 못 시키면 그럴 거야.”
“평가 못 받으면 문제가 생겨?”
“연말에 보너스를 못 받아.”
“KBC가 잘도 그러겠다.”
“사실은 진급하고 연관이 있어. 그리고 진급은 수입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
“듣다 보니까 KBC 정말 짜증 난다. 그냥 누나 EBC 가서 이거 진행하면 안 돼? 내가 이거 선물 삼아 해줄 테니까 EBC 보고 진행하라 그래. 안 그래도 지금까지 KBC 숟가락 얻으려는 거 정말 짜증 나는데.”
“그 방법은 생각도 못 해봤는데?”
태호는 빛의 마리아에 대한 갈증을 풀어주고 나서야 끝이 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에게는 크게 덕 되는 게 없지만 알량한 애국심을 발휘해 보기로 했다.
대구 할아버지도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 국가에서 언젠가 작품 제작을 요구할 일이 생기면 한 번은 들어주라고 하셨다. 휘둘리면 호구지만 명분용으로 한 번은 필요할 수 있다고. 태호는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을 말해볼게. 빛의 마리아를 10억에 제작해 주는 건 내가 못 받아들여. 20억이라면 현대 미술관을 위해 난 그림을 그려줄 의향이 있어.
그럼에도 이건 일종의 조국에 대한 팬 서비스라고 생각하면 되니까. 단 그걸로 숟가락을 얻으려고 하는 KBC는 만약 이 방송으로 얻는 해외 수입의 반을 나에게 보내야 돼. 가능해?”
“그러니까 국내 수입은 인정하겠으나 이걸 해외에 판매할 경우 얻는 수입의 반을 달라 이거지?”
“맞아.”
"너 손해 아니야? 우리가 BBC도 아니고. 해외 수출로 얻을 수 있는 수익이 얼마나 된다고.”
“지금이야 얼마 안 되어도 나중에는 모르는 일이잖아. 그리고 사실, 그냥 걸 조건이 없어서 그래. ”
“오케이 이걸로 얘기해 볼게. 다른 건?”
“없는데?”
“그럼 딴 거 물어본다? 좋아. 너 여자친구랑 어떻게 된 거냐?”
“···”
*
국립 현대 미술관과의 계약도 20억을 기준으로 진행되었다. 나중에 좀 깎을 수 없냐는 흔한 레퍼토리가 들려왔지만 태호는 비공개를 조건으로 최근에 거래된 작품의 가격을 언급하며 오히려 싸게 구매하는 것이라며 미술관 측의 주장을 일축했다.
작업실은 태호의 요청에 따라 덕수궁 안에 마련이 되었는데, 태호는 전과는 다르게 어떤 참조 자료 없이 그림을 단숨에 그려나갔다.
불과 일년 전에 밤잠까지 줄여가며 4개의 작품을 작업한 덕분에 머리에 박히듯이 그림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
작업을 시작한 태호는 얼마 뒤 새로 뽑은 차로 출퇴근을 시작했는데 계약금으로 받은 돈으로 차 매장에 가서 차를 한대 주문했다. 그 왜 있지 않은가? 말 그림 그려진 노란 로고를 가진 차 말이다.
이주 뒤, 페라리 동호회에서는 덕수궁 주차장에 뜬 엔초 페라리에 대한 소식으로 들떠 있었다. 모터쇼에서도 보기 힘든, 더군다나 차 가격만 십억 가까이하는 이 몬스터를 누가 구입했는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한정 생산한 차량이기에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차도 아니었다.
태호가 이 차를 몰고 다니는 사유는 좀 복잡했다. 태호는 오픈 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강남의 페라리 매장에 찾아가 특별한 페라리를 찾았다.
"차 좀 보러 왔습니다. 혹시 엔초 페라리를 살 수 있나요?"
말쑥한 차림의 키도 태호만큼 큰 딜러가 나타나 명함을 건네며 아쉬움을 한껏 담아 대답했다.
"손님, 아쉽게도 그 차량은 한국 인도는 아직 결정된 것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등록된 최상위 등급의 고객에게도 아쉽게 할당이 안되어 저희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형편입니다."
사실 뜨내기손님에게 이런 얘기를 할 필요까지는 없지만 태호가 내뿜는 포스가 대단해 딜러는 최대한 공손히 설명했다.
"저기 윗급 매니저 좀 불러 주시겠어요?"
더 윗급의 매니저도 당연히 주문이 가능할 리는 없었고, 그럼에도 태호는 계속 차 상위 매니저를 호출했다. 결국은 임원급까지 연결이 되었지만 그도 한국에 들어오지도 않은 엔초 페라리를 팔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혹시 무슨 일인가요?"
정말 우연히 페라리 프로모션 차 한국을 방문한 페라리 고위 임원이 전시 매장에 들어왔다. 태호가 여러 사람을 붙잡고 차를 왜 받을 수 없는지 계속해서 물어보자 호기심에 다가온 것이다.
태호는 한눈에 이 사람이 이탈리안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이탈리아어로 말을 걸었다.
"엔초 페라리를 사고 싶어 왔는데 구매가 불가능하더군요. 정말 처음으로 강렬히 원하는 차를 발견했는데 구매가 불가능하다는 말만 들어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 임원은 한국에서 유창한 이탈리아어를 듣는 게 반가웠던지 진상 고객처럼 보이는 태호에게 호의를 보였다.
"엔초 페라리는 지금까지 페라리를 오랫동안 사랑해 주시던 고객들에게 판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본사에서도 차를 못 구한 고객들의 항의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으로 압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페라리의 로렌조 루소라고 합니다. 아시아 영업 담당 이사입니다."
로젠조와 악수를 한 태호도 자기소개를 했다.
"뉴욕의 태호입니다. 빌바오 미술관에 소장된 빛의 마리아를 그렸죠. 모르시는 분들이 있어서 자료도 들고 다니는 편입니다."
태호는 가방에 있던 빌바오에서 발간한 안내 자료를 꺼내 로렌조에게 건냈다. 그 뒷장에는 빛의 마리아에 대한 기사가 담긴 뉴욕 타임스도 있었다.
예술에 대한 조예가 있었던 로렌조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 유명한 빛의 마리아의 제작자가 맞았다. 그리고 본사에 연락해 추가 생산된 차량 중 계약이 붕 떠서 남아있던 차량을 확보했다.
일주일 뒤 위대한 예술가가 페라리를 선택해 줘 영광이라는 멘트와 함께 항공편으로 차를 보내줬는데 항공비용까지 페라리가 감당했다.
한국 페라리 측은 말 그대로 깜짝 놀랐는데 진상 고객으로 생각한 태호가 이렇게 잘나가는 예술가라는 건 몰랐기 때문이다.
페라리 본사와 한국 페라리는 차라리 이걸 마케팅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태호에게 찻값 디스카운트와 함께 광고 등에 나서줄 것을 요청했지만, 태호는 간단히 무시하고 찻값을 다 내고 차만 인수해 가버렸다.
페라리 측 임원 로렌조에게는 엔초 페라리 옆에 자신이 서있는 모습에 사인까지 들어간 작지 않은 유화를 하나 그려 보냈다. 항공비용에 대한 보답이었다.
그 뒤로 페라리 측으로부터 연락을 하나 더 받았는데 당사의 VVIP 고객으로 등록하였으며 언제든 구매하고픈 차량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는 안내였다.
*
페라리를 인수받고 또 몰고 다니며 태호는 어마어마한 하차감을 즐겼다. 태호는 얼마 뒤 서현의 연락을 받았다.
"너 지금까지 못 보던 페라리 몰고 다닌다고 하던데 무슨 차야?"
"너 어떻게 알았어?"
"사촌들이 난리던데? 울 아빠도 알아."
"서울은 정말 동네가 좁구나... 나 얼마 전에 엔초 페라리 샀어. 스페셜 에디션이긴 하더라. 400대 한정 생산이었다고 하던데?"
"정말? 그거 나도 태워줘."
"승차감은 정말 안좋던데... 카 오디오도 없어. 타고 싶어?"
"누가 그런차에서 오디오 듣나? 엔진소리 듣지. 괜찮으니까 태워줘. 운전은 못해도 타는 건 잘해."
집과 미술관만 왔다 갔다 하다 첫 주말을 맞이해 서현을 태우고 강남 사거리를 가로지르는, 모양도 특이한, 이 엔초 페라리는 거의 대부분의 차들을 패닉에 빠트리며 강남 대로 위의 차들이 홍해 갈라지듯 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정말 차를 몰고 다닐만했다. 방지턱만 없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