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사업구상 (feat 터너상 후보)
Parsons의 벨라에게 전화가 온 건, 지난번에 만난 지 두 달 정도가 지난 시점에 즉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무렵이었다.
태호는 지난 번 만났을 때 그려준 그림으로 옷을 제작해 볼 것을 제안했었다. 술집에서 처음 제안한 이후, 학교로 다시 돌아간 이후 전화로 다시 한번 제안했다. 거의 구두로 된 사업 제안과 비슷했기에 벨라도 진지하게 받아들여 옷 제작에 나섰다.
벨라는 옷을 완성한 후 언제 보러 올 것인지 물었다. 태호는 혼자 갈 것인지 데이비드랑 같이 가야 되는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냥 직접 벨라에게 물어봤다.
"데이비드랑 같이 갈까?"
"알아서 판단해."
태호 귀에는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겠어’라는 말로 들렸다.
"이번 주 주말에 벨라를 만나러 가는데 너도 같이 갈래?"
데이비드에게 이를 전하자 그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태호를 쫓아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가지 않자니 벨라와의 관계는 이제 끝날 것으로 보였다. 데이비드는 전에 벨라가 연락을 받지 않은 것을 여전히 맘에 걸려했다.
"벨라가 매력적인 사람은 맞는데, 어차피 학기 중에는 바빠서 힘들 거야. 나도 바쁘고, 벨라는 더 바쁘겠지. 파슨스 과제량이 어마어마하다는 얘기도 들은 것 같아.
전화만 하다가 말 것 같은데 그럴 바에는 시작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라. 태호 네 말대로 이어질 인연이면 나중에라도 이어지겠지."
결국 태호는 홀로 차를 몰고 뉴욕으로 향했다. 벨라와는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도착을 해보니 벨라가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얼굴을 가득 덮은 선글라스를 한 채였다.
“몇 달 만이네. 잘 지냈어?”
“어, 덕분에. 네가 준 숙제한다고 바빴지.”
“결과는 좋았고?”
“보고 판단해. 데이비드는?"
“선약이 있었더라고."
“음. 그렇구나. 올 줄 알았는데.”
벨라의 얼굴에 선글라스 사이로 살짝 스쳐간 표정에는 분명히 아쉬움이 있었다.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
“그래. 바쁠 테니 숙제 검사부터 해.”
벨라는 종이 백에서 옷을 꺼내 태호에게 건넸고, 태호는 커피 테이블 위에 펼쳐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구경했지만, 전체적인 판단을 하기는 힘들었다.
“이렇게만 봐서는 도저히 모르겠어. 전체 그림이 안 그려져서. 내가 옷걸이에 걸어놓고 제대로 보면서 판단해 볼게."
“지금 보고 판단하면 안 될까? 못 기다리겠어.”
태호는 '이걸 어디서 보자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벨라가 일어서서 “가자”라고 말하며 커피숍 밖으로 나갔다.
“이 옷은 어차피 내 몸에 맞춘 거니까 내가 입어봐야 맞아.”
벨라는 집으로 향했다. 태호는 벨라와 단 둘이서 아파트에 들어가는 게 적절한가를 고민하는 사이 벌써 집 앞에 도착했고, 벨라는 태호가 무슨 생각을 하던 신경 쓰지 않고 옷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
태호가 소파에 앉아있길 10분, 벨라는 옷을 다 갈아입은 채로 손에는 흰색 핸드백까지 든 채로 나타나, 거실을 런웨이 삼아 모델 워킹을 선보였다.
키는 모델을 하기에는 살짝 부족했지만 비율이 워낙 좋아 옷이 너무 잘 어울렸다. 태호는 들고 온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촬영을 시작했다.
카메라를 든 태호와, 그 앞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벨라는 마치 전문 사진작가와 모델처럼 보일 정도였다. 태호도 벨라의 포즈에 호응하며 원하는 포즈가 있거나 표정이 있으면 요구했고 벨라도 그에 맞춰서 표정과 포즈를 바꿨다.
사진을 100장을 넘게 찍고 나자 태호도 만족한 듯 촬영을 멈추었다.
“수고했어. 전문 모델 못지않은데?”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워뒀어."
벨라도 태호의 사진 찍는 솜씨가 잘은 모르지만 아마추어는 벗어났다고 생각했다.
"사진은 언제 배운 거야? 거의 프로처럼 일하던데? 필요로 배운 수준은 넘은 걸로 보여. 체계적으로 배운 느낌이 들었거든.”
“나에게 카메라를 가르쳐준 분이 한국에서 사진으로 제일 유명한 분이거든. 그분 옆에서 보고 배운 게 있는데. 그 정도는 알지.”
“사진도 잘 할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
“배울 시간이 되더라고...”
“자, 숙제를 했으니 성적을 알려줘. 어떻게 나왔어?”
“내가 카메라를 들었다는 얘기는 찍을 가치가 있어서 찍은 거야. 일단 합격점. 다만, 어떻게 한 건지 알려줘. 그래야 이걸 사업으로 연결시키지.”
“네가 전에 작업해 준 그림으로 옷감의 패턴을 그린 다음에 그걸 아빠 회사에 보냈어. 거기서 옷감을 제작하게 한 후, 그 옷감으로 옷을 제작한 거야. 제작은 다 맨해튼에서 했어. 괜찮은 재봉사야 진작에 몇 명 알고 있으니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거고.”
“중간에 많은 것이 생략이 된 거 같은데, 너와 재봉사만 있으면 이게 제작 가능하다는 거야?”
“일단은.”
“옷감을 뉴욕에서 고른다면 제작 시간은 얼마나 걸리는 거야?”
“옷감에 대한 레이아웃이 끝난 후, 숙련된 재봉사라면 웬만한 옷은 다 12시간 안에 만들어 낼 수 있어. 이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는 얘기는, 손이 많이 가는 스타일로 디자인된 옷이라는 얘기고 그런 건 얼마나 더 걸릴지는 디자인에 따라 달라.”
“옷감 제작 비용은 어느 정도야?”
“프린트하는 것 자체야 비용이 얼마 안 돼. 1제곱 미터에 5불부터 시작하니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더 낮은 가격에서도 제작이 가능할 거야.
하지만 네가 만들어준 패턴은 실크에 프린트된 거라 가격이 비싸고, 또 고급 소재 중 일부는 이탈리아에서만 제작이 가능한 것들이 있어. 이탈리아 명품이 그냥 탄생한 명품이 아니니까.”
“신발이나 핸드백은? 보석도 가능한 거야?”
“신발은 런던 패션 칼리지에서 찾아야 되는데, 신발은 제작 경험이 없는 대학생을 뽑는 건 추천하지 않아. 아무래도 이쪽 업계에서 경력이 있는 사람 중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이쪽은 확실히 경력이 오래될수록 훨씬 나은 작품을 만들어. 핸드백은 학교에서도 찾을 수 있어. 다양한 소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는 게 특이점이긴 하지만 디자인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니까.
학생들 중에서는 자기가 직접 디자인한 가방을 들고 다니는 애들도 흔한 편이야. 다만 여기도 가방을 전문적으로 제작해 줄 전문 재봉사가 필요해.
보석은 아마 여기서 제일 까다로울 거야. 이탈리아에 몇 개 전문학교가 있는데 거기 졸업생 중에서 경력자를 뽑으면 되긴 해.
그렇지만 미국에서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보석은 티파니나 까르띠에 해리 윈스턴에서 필요 시마다 사던지 대여하는 게 더 나을 수 있어. 너랑 협업 관계를 맺긴 해야 되겠지만 말이야.”
“가방이나 신발도 외주 주는 게 어때?”
“그건 절대 외주를 주면 안 돼. 보석은 진입장벽이 높으니까 포기하는 거지만 가방이나 신발은 아니야. 내가 말하는 보석 외주도 간단한 귀걸이나 반지 목걸이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수십만 불 하는 명품 시장에 진입하지 말자는 얘기니까.
이유는 노력 대비 남는 게 너무 적어. 태호, 이쪽 업계에서 사람을 뽑을 때는 학교를 보는 게 아니라 포트폴리오를 보고 뽑는다는 건 기본 중에 기본이야. 이건 알고 있지?”
“그 정도는 기본이니까. 하지만 다른 부분은, 솔직히 얘기하면, 난 디자인을 할 뿐이었지 그게 어떻게 제작되는지는 관심 밖이었기 때문에 잘 몰랐어. 그래서 알려줄 사람을 찾은 거고.”
“네가 필요로 하는 건 초상화를 그릴 때 필요한 의상을 제공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옷과 액세서리 등을 명품 브랜드화하는 거잖아?
그렇다면 디자인에만 집중하고 생산과 유통 등 나머지는 다른 명품 브랜드와 협업으로 해결할 수 있어. 또 이게 업계 트렌드이기도 하고. 난 그걸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하고 도와줄 수 있어.”
벨라의 말을 듣고 난 뒤, 태호는 잠시 동안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내가 생각하는 이 비즈니스의 개요는 이래. 난 다음학기 혹은 그 이후부터 초상화 작업을 시작할 거야. 작품당 예상되는 수익은 최소 10만 불 이상으로 예상이 돼.
학생이다 보니 지금은 분기에 한 작품 정도 제작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러니까 그 정도 의상이 준비가 되어야 된다는 얘기지.
이걸 기준으로 사업 계획서를 짜올 수 있겠어? 기한은 이번 가을학기 시작하기 전까지. 내 쪽에서도 준비를 할 거야. 그렇게 해야지만 너와 계약을 진행할 때도 서로 만족할 만한 계약을 진행할 수 있지 않겠어?”
벨라는 현재 이 펜트하우스에 매달 만 불 가까이를 지불했다. 이 비용은 전부 자신의 본가에서 지원받는데, 이 지원은 대학의 졸업과 동시에 끊긴다.
처음부터 벨라가 집으로 돌아가 가족의 회사에 전념하겠다는 약속을 기반으로 지원받는 돈이기 때문이었다. 10만 불 중 적어도 반은 자기가 가져가야 현재 자신의 품위 유지가 된다.
그런데 그걸 태호가 용납하냐는 또 다른 문제다. 아무것도 없는 학부 졸업생에게 연간 20만 불을 투자한다? 그 돈이면 자신보다 훨씬 경험 많은 경력자를 데리고 올 수 있는 금액이었다. 실제로 올지는 차치하고 말이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벨라였다.
“오늘 찍은 사진 중 하나로 전신 초상화를 제작할 거야. 완성되면 연락할게."
*
벨라와의 미팅이 끝나고 윌슨네 식구들과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윌슨이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것이데, 한 번도 집으로 초대를 못한 것이 맘에 걸렸는지 계속 오라고 했는데, 이런저런 스케줄로 늦어지다가 이번에 벨라와의 미팅을 계기로 가는 것이었다.
윌슨의 집은 브루클린 자신의 갤러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기에 부담도 없었다. 제인도 일 년 전에 태호가 사준 지갑을 받아놓고 감사도 제대로 표현 못 했다고 제인도 같이 참석하기로 했다.
태호는 벨라의 집을 빠져나와 윌슨의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보이던 꽃집에서 꽃 한 다발을 산 태호는 옆에 보이는 와인숍에도 들려 추천받은 와인 두병까지 샀다. 30분이 더 걸려 도착한 윌슨의 집은 브루클린 헤이츠에 위치한 3층짜리 주택이었는데 근처에 산책로와 맨해튼과의 접근성을 생각해 보면 한눈에 고급 주택단지 안에 위치한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서 오게! 뭘 이런 걸 다 사 왔어?” 윌슨은 태호가 가져온 꽃과 와인을 받고 만족한 듯 웃으며 태호를 집 안으로 안내했다.
"어서 와 태호. 지난번 선물은 너무 맘에 들었어." 제인도 반갑게 태호를 맞이했다.
윌슨의 집은 전체가 회화 위주의 미술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태호가 알만큼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없지만 갤러리를 오래 운영하면서 선물 받았거나 마음에 들어 구매한 작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한눈에 봐도 윌슨의 취향에 맞는 상당히 정성 들여 수집한 작품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것도 여기 있어요?”
“자네건 못 걸어. 너무 고액이야. 하하. 집에 건 그림들은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작품들이어서 거는 거지, 자네 그림같이 나중에 거래를 해야 되는 작품들은 집에 놓지 않아.
간혹 자기 집에 거래해야 할 작품을 전시해 놓는 딜러들도 있는데, 절대로 그런 자들과 거래하지 말게나. 결국에는 문제를 일으킬 거야.”
“팁 고마워요. 윌슨이 오래 살아서 계속 내 딜러 하면 되죠.”
“말만이라도 고맙네.”
윌슨은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고 집안에 그림들에 대해 소개했다. 그리고 이어진 저녁 식사는 스테이크에 옥수수와 치즈가 곁들여진 매우 전통적인 저녁 메뉴였는데, 윌슨이 꺼낸 나파 밸리의 최고급 와인 뒤로 태호가 사간 와인을 즐기며 태호와 예술 관련 주제로 끊임없이 대화가 이어졌다.
6시부터 시작된 저녁은 장장 3시간에 걸쳐 이어졌으며, 윌슨의 갤러리 초창기부터 지금까지의 사업 과정부터 태호의 한국에서의 일, 마지막으로는 태호가 오늘 뉴욕에서 벨라를 만난 이유까지 얘기를 나눴다.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전신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태호 자네가 코디를 하는 조건으로? 나쁘지 않아. 혹시 콘셉트로 그린 그림 있는가?”
“아직이요. 오늘 벨라라고 파슨스 학생 하나와 동업을 하려고 준비 중인데, 제작한 옷 한 벌로 샘플용으로 하나 그려보려고 해요.”
“알겠네. 자네에게 그림을 예약하고 싶어 하는 고객들은 많아. 자네가 학생이어서 내가 죄다 거절하고 있어서 그렇지. 졸업하고 시작할 생각인가?”
"네. 졸업하고 하고 싶은데, 그전에 끝마쳐야 되는 세팅들이 있어요. 옷 제작을 해줄 벨라가 어떻게 해주느냐에 따라 좀 달라질 것 같아요."
"최소 1,2년 후 얘기지만 준비할 것 생각하면 많이 남은 것도 아니군그래."
"그런 셈이죠."
"필요하면 전단지를 만들어서 뉴욕에 있는 갤러리에 쫙 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아. 소소한 수수료를 주면 아마 적극적으로 마케팅도 해줄걸? 물론 썬 갤러리에서 시작해서 반응이 좋으면 수수료를 주면서 할 필요는 없어지겠지만."
윌슨은 그 뒤로 태호의 계획에 자신이 일부가 되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계속해서 설득 아닌 설득을 했다. 그는 태호와의 인연을 이어가려고 이런저런 장치들을 마련하려는 게 보였다.
태호는 그의 제안이 태호의 이익을 헤치지 않으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는 모습을 보이기에 가급적이면 받아들일 생각을 했다.
태호는 윌슨네 가족들과 식사를 마친 후 하루 자고 다음날 학교로 돌아갔다.
*
200x.5월
터너상 200x년 후보가 발표되었다.
제이코 & 디노스 채프먼 (형제)
윌리 도허티
아나 갈라치오
그레이슨 페리
권태호
터너상 후보가 발표되고 태호는 여기저기서 축하 전화를 받았다.
태호는 수상 확율이 너무 낮다며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얘기하고 다녔다.
윌리 도허티는 비디오 아티스트였고 아나 갈라치오 조각가였는데 두 사람 다 훌륭한 작품을 오랫동안 제작한 능력있는 아티스트였지만, 태호보다 네임 밸류가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채프먼 형제와 페리는 달랐다. 두 사람의 작품은 태호의 작품과 비교하면 그 수준이 높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화제성은 단연 돋보였기 때문이다.
채프먼 형제는 싸구려 비닐 튜브 (실제 소재는 청동)의 남녀가 오럴성교를 하는 것을 묘사한 작품을 출품했고, 그레이슨 페리는 여장 남자로, 아무데서나 여자 원피스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별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