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찰스 사치, 영국3
예일로 돌아온 태호는 영국에서 찍은 사진들을 모니터로 보며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렸다.
첫 번째 주제.
크레이돈을 배경으로 얼굴에 수염을 잔뜩 기른 누가 봐도 아랍 남자인 사람이 손에 꽃다발을 든 채 구형 BMW 미니 (미스터빈의 차)를 모는 원숭이에게 다가가고 있다.
옆에는 바나를 권총처럼 든 사뮤엘 잭슨과 존 트라볼타가 옆에서 남자를 겨누고 있었다. 아래에서는 쥐가 위 장면을 구경하고 있었다.
차, 원숭이, 사뮤엘 잭슨과 존 트라볼타는 검은색으로 채색되어 있었고 아랍 남자는 살색으로 환하게 채색되어 있었다. 더없이 선하게 묘사되었다.
두 번째 주제.
런던 민스터를 배경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 있다. 한 백인 남성이 손에 다이애나비 얼굴이 그려진 현찰을 관광객들 호주머니나 지갑에 넣어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다.
캔버스 하단에는 쥐들이 찰스와 카밀라 얼굴이 새겨진 지폐를 물고 달리고 있었고, 한편에서는 갉아먹고 있었다. 다이애나비, 찰스와 카밀라가 그려진 지폐만 컬러로 묘사되어 있었다.
세 번째 주제.
훌리건의 난동을 배경으로 웨스트햄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밀월 유니폼을 입은 남자와 키스를 나누고 있다.
사방에는 스톤 아일랜드, CP 컴패니, 라일 앤 스콧, 프레드 페리 브랜드가 구름처럼 떠돌았다. 의류 브랜드만 컬러로 묘사되었다.
네 번째 주제.
한반도를 스프레이를 이용해 영국 국기로 채색하는 군인이 있고 그 옆에 다른 영국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다.
재스퍼 존스의 성조기보다 더 찬란한 영국 국기가 빛나고 있었다. 밑에는 1950년을 기억하며라는 글자가 쓰여 있었다.
다섯 번째 주제.
욕조에 상반신 만을 드러난 쥐가 손에는 메모를 쥔 채 죽어가고 있었다. 메모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Drug Kills' (마약 하면 죽어요).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의 패러디였다.
여섯 번째 주제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을 패러디한 쥐의 탄생. 쥐를 최대한 관능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에 이어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비너스의 탄생도 패러디 되어 제작되었다.
일곱 번째 주제
큰 쥐를 태운 증기 기관선이 작은 쥐를 태운 목조선을 끌고 가고 있다. 쥐가 주인공이라는 점을 빼면 조세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컴퓨터 카피했다고 해도 믿을 만큼 정교했다. 태호가 얼마나 터너 상을 강렬히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덟 번째 주제
여왕의 얼굴 대신 미스터 빈의 얼굴을 넣었다. 퀸 오브 코미디언. 아니 킹인가.
여덟 주제를 바탕으로 시리즈를 제작했다. 태호가 크레이돈이라고 부르는 첫 번째 그림을 예로 들면 사뮤엘 잭슨과 존 트레볼타 대신 맥 도널드나 KFC 할아버지가 등장한다. 노란 바나나 대신 손에 흰색 비둘기를 들고 있는 식이었다.
터너의 그림을 패러디 한 것을 빼면 하루에 두 점도 그렸다. 완성된 그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윌슨에게 옮겨진 후 보관되었다가 1월 말 비행기 편으로 한꺼번에 런던의 사치 갤러리로 옮겨졌다. 뉴욕 썬 갤러리에 있는 태호의 모든 작품도 역시 마찬가지로 옮겨졌다.
뉴욕에서만 새 작품 30점이 뉴욕에서 런던으로 옮겨졌다. 여기엔 최근에 그린 4점의 빛의 마리아 시리즈가 포함되어 있었다. 찰스 사치는 태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인 순간부터 올해 심사위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유력한 인사들의 리스트를 뽑았다.
사치를 정말 만족시킨 건 이 빛의 마리아였다. 이 그림을 끔찍이 아끼는 빌바오 미술관이 허락할 리가 없기에, 한 점만 왔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4점의 새 버전이 온 것은 정말로 좋았다. 사치는 더 밝고 화려한 새 버전을 옛 버전의 빛의 마리아보다 더 좋아했다.
신규 작품 수가 30점이 넘는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이나 놀랐지만 20점이 넘는 작품의 주제가 그라피티란 걸 안 순간 김이 팍 빠졌다. 실제로 본 그림은 재밌고 재치가 넘쳤지만 태호 특유의 그 웅장함을 기대한 그를 만족시키기에는 좀 부족했다. 터너를 패러디한 작품이 쓸데없이 고퀄이라 짜증마저 났다. 이런 작품을 그릴 시간에 제대로 된 그림 하나를 보내줄 것이지.
뉴욕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태호의 초창기 그림이 상당수 넘어왔다. 다움에서 넘어온 그림들이며 당연히 김 관장의 협조로 이루어진 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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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는 테이트 모던 미술관에서 열리기로 결정이 되었다. 영국에서 활동한 적이 없는 태호의 전시회를 처음부터 이곳에 열게 된 것은 오롯이 사치의 힘이다.
이 미술관은 2000년에 오픈한 새 미술관으로 20세기 영국의 컨템퍼러리 예술의 정수를 보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미술계의 세계 진출을 촉진하기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하는 중요한 미술관이다. 입장료가 무료이기에 주말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을 찾는다.
전시회 첫 오프닝은 3월 첫째 주 토요일이다. 2월 첫 주말부터 태호는 수시로 런던을 찾아 테이트 전시의 담당 큐레이터인 '앤'(Ann)과 협의하여 전시 방향에 대해 협의했다.
전시가 1주가 채 안 남은 때는 '앤'은 태호가 런던에 머무는 기간 동안 밤샘을 하다시피 하며 전시를 위한 마무리 작업을 했다. 작품의 배치는 아래와 같았다.
Room 1 & 2 : 탱화 연작, 초상화
Room 3 : 한복 시리즈
Room 4 : 빛의 마리아
Room 5 : 호박 시리즈
Room 6 & 7 : 영국 시리즈
전시회의 이름은 '권태호의 첫 발걸음' 이었다. 영국 진출의 첫걸음이라는 점을 노골적으로 밝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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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BC에서는 전시회 오픈 이틀 전, 전시물이 어느 정도 세팅이 완료된 이후, 태호와 인터뷰를 가졌다. 태호의 테이트 전시회에서 제일 중요한 기록물이 될 예정이기에 태호도 '앤'도 최선을 다했다.
카메라는 Room 1에 들어갔다. '앤'의 내레이션이 시작되었다.
"저는 앤 갤러입니다. 이번 태호 전시회의 큐레이터를 맡았죠. 태호라는 이름을 들은 게 불과 2년도 안된 거 같은데, 벌써 테이트에서 전시회를 열 정도로 빠르게 인지도를 넓혀 왔군요. 그와 같이 일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예술가를 나이로 판단하는 게 어리석다는 걸 태호가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Room 을 7개까지 써서 전시를 할 거라는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모든 작품들이 다 손으로 직접 그린 거예요. 이게 얼마나 부지런해야 가능한지 상상이 되시나요? 그의 나이가 이제 겨우 22살이에요.
Room 1 & 2에 걸린 이 아름다운 그림들은 태호가 12살과 13살 때 그린 그림입니다. 태호.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가 뭔가요?"
"여기서는 어렸을 때 누구나 엄마 혹은 할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가죠. 전 할머니 손에 이끌려 절에 갔습니다. 할머니가 불교도에요.
저 그림에서 묘사된 분이 돌아가신지는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있는 큰 스님이십니다. 그분은 제게 어떤 영적 영감을 주셨죠.
한국에서 그분에게 영적 영감을 받은 사람은 무척이나 많지만, 실제로 그림으로 옮길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은 제가 거의 유일할 겁니다. 그분이 어린아이를 많이 사랑하셨거든요."
카메라는 Room2를 비췄다. 탱화를 바라보는 앤의 눈에서 경이로움이 비쳤다.
"그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어요. 저 그림은 영상으로만 접했기에 잘 몰랐는데, 실제로 접하고는 그저 눈물만 나더군요."
"저 그림은 제가 12살 때 ... "
앤은 이렇게 칭찬만 해도 괜찮을 건가 싶을 정도로 태호의 작품에 대해 극찬만을 이어갔다. Room 6 & 7에 들어서자 앤의 눈동자가 좀 더 침착해졌다. 앞에서와는 반대로 태호에게 좀 더 설명을 요구하는 어조였다. 친절했지만 그 말속에 담긴 뼈를 태호는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아마 이번 전시회에서 가장 많은 논란을 불러올 수 있는 작품들은 바로 이 방에 걸려있죠. 태호가 그라피티에 관심을 가질지 정말 몰랐어요. 이 작품들을 제작하게 된 의도를 설명해 주실래요?"
"몇 달 전에 영감을 얻기 위해 영국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뭔가 영국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싶었고, 빠르게 작업을 완성하고 싶었죠. 그러다가 생각난 게 이런 그라피티 형식의 작품이에요."
"태호, 무엇이 당신의 작품이 다른 그라피티와 차별화한다고 생각해요? 난 태호의 최대 장점이 제작한 그림의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는데."
"난 그림이 기본적으로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무엇이 되던지요. 또한 그림에 텍스트를 남기는 걸 매우 싫어하는 작가 중 하나 일 거예요. 하지만 영국에 와서 생각이 바뀌었어요. 적어도 이런 그림을 그릴 때는 관람객의 눈을 사로잡을 간결한 그림과 제작 의도를 전달할 텍스트를 사용할 생각입니다."
"영국의 사회 문제를 제치 있게 표현한 것이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평소에 이런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나요?"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호박 시리즈도 내가 겪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한 작품이지만 결국은 사회 문제와 연결이 되지요. 예술은 현재 사회를 반영해야 합니다.
작품에는 작가의 목소리나 문제의식이 드러나야 하죠. 지금까지 나이가 어려 이런 작품을 피해왔는데, 이제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술 먹을 나이가 되었거든요."
앤이 웃는다.
"이번 작품 중에 뱅크시 작품을 패러디 한 게 보입니다. 뱅크시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알고 싶으며 그의 작품의 어떤 점이 당신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나요?"
"뱅크시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런던에 왔습니다. 간결한 표현과 쉽고 강렬한 메시지에 매료되었습니다. 언어가 필요 없는 엄청난 작품이죠."
"뱅크시나 장 미셀 바스키아의 작품과 여기 있는 당신의 다른 작품이 가진 공통점이 있어요. 당신도 언급했다시피 세 사람 작품 모두에서 느낄 수 있는 매우 강력한 메시지 전달 능력이 바로 그것이죠.
이 방에 있는 작품뿐만 아니라, 태호의 모든 작품이 다 그래요. 이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죠? 특별한 방법이 있는 건가요?"
"일단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아야 하고요." 태호는 웃었다.
"하하. 나도 그걸 듣고 처음에는 믿지 못했죠." 앤도 황당한 표정으로 웃었다.
"전 지금까지 많은 것을 시도해 왔습니다. 탱화에서는 저의 영적인 면을 드러냈고, 빛의 마리아는 저의 내면에 있는 순수한 예술적 호기심이 폭발해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들은 내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정제되지 않고 순수하게 분출되어 제작한 작품들입니다.
외부의 반응에 대응하여 제 목소리를 낸 건 호박 시리즈가 처음입니다. 자살자의 죽기 직전의 눈을 바라보는 경험은 제가 지금까지 가졌던 어떤 경험보다 강력했으며, 저는 그걸 어떤 형태로도 남겨야 했습니다.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 했거든요. 마치 컴퓨터에 기록된 문서를 출력한 다음에 컴퓨터 하드 디스크에서는 지워버리는 것과 비슷한 제 나름의 의식 행위입니다.
이 방에 있는 영국 시리즈는 제가 짧게나마 런던 등지에서 겪은 일들에 대한 제 나름의 표현입니다. 전 이를 표현하는데 그라피티의 형식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이용한 것입니다. 목적에 맞는 도구를 쓴다는 거죠."
"뱅크시를 만난 적이 있나요?"
"나는 그를 몇 달 전에 처음 알았습니다."
"만약 그를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나요?"
"음... 실제로 만나면 협업하자고 할 거 같아요."
"그라피티를 협업할 수 있는 데가 있을까요?"
"전 세계에 인구의 이동을 막기 위해 세워 놓은 장벽이 참으로 많답니다. 다 벽이죠. 그라피티 화가들이 좋아하는. 거기에 같이 낙서를 하고 싶어요."
태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작가에게 협업 요청 혹은 구애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