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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사치, 영국2 (97/181)

97. 찰스 사치, 영국2

경찰은 자신들의 눈에는 쓰레기인 갱들이 상잔하는 게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경찰력을 동원해도 막는 데 한계가 있었기도 했다.

이 갱들은 서로 아무리 죽여 없어져도 금세 조직원을 찾을 수가 있기에 없어지지 않았다. 교육 환경 악화, 가족 붕괴, 가난한 이민자, 직업이 없거나 낮은 질의 일자리, 마약 등등, 이러한 환경적 요인으로 인해, 죽어나간 갱들을 대체할 인적 자원은 흘러넘쳤다.

쉽게 설명하면 못 배운 이민자나 유색인종이 멋지게 독일차를 굴리며 플렉스 한 삶을 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은 마약을 파는 일이다. 살인이 빈번한 건 경쟁자가 넘치기에 서로 죽여 개체 수를 조절하는 과정일 뿐이다.

태호는 미국에 있는 가난한 유색인종과 영국에 있는 가난한 유색인종을 비교해 어디가 더 안 좋은지 고민해 봤다.

어릴 적부터 밥 먹고 농구공만 던지거나, 아니면 힙합만을 죽어라 연습하는 미국의 유색인종이 조금 더 나아 보였다. 적어도 희망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아, 여기는 축구를 하려나?

태호와 일행은 크로이던을 벗어나 관광객이 많아 소매치기 역시 많은, 런던 중심가로 향했다. 관광객에게 돈을 훔치는 모습보다는 소매치기가 관광객에게 돈을 꽂아주는 상상을 하며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었다.

*

태호에게 영국에 다시 오고 싶지 않게 만드는 문제는, 사회문제가 아닌 그냥 문제였다.

"쥐가 많다고요? 런던에요? 왜요?"

"뉴욕도 많을걸? 런던에 좀 오래된 단독 주택들은 쥐랑 동거한다고 생각하면 돼."

그렇다. 바로 이 쥐다. 낡은 집들을 재건축이란 이름하에 가만히 내버려 두지를 않는 한국과 달리 영국에는 백 년 가까이 된 오래된 집들이 널렸다.

오래된 집들은 쥐가 편하게 지낼만한 공간이 넉넉했다. 따듯하고 먹을게 넘치는 인간의 집에 쥐가 많은 건 당연했다.

이는 뉴욕도 마찬가지다. 쥐라, 런던을 표현할 또 다른 아이콘이다.

*

태호는 축알못이지만 영국 하면 훌리건이 유명하다는 것은 잘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영국의 한 문화를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훌리건을 보려면 어디를 가야 되나요?"

훌리건이란 말에 움찔하던 에디는 곧 편안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대답했다.

"웨스트햄이나 밀월 팀 서포터들이 많은 펍에 가면 돼. 둘이 심각한 라이벌이거든. 훌리건 하면 보통 이들 팀을 응원하는 놈들로 유명하지. 다행히 둘의 더비는 당분간 없을 거라 안전할 거야. 가고 싶나?"

"가보죠. 여기까지 와서 영국 축구를 안 보고 가는 것도 이상하잖아요."

아일라가 결정해서 온 펍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오늘 경기가 있는지 사람들로 가득했다. 다행히 자리가 나 세 사람은 테이블로 이동했다.

"저기 저 두 명 보이나?" 에디가 흰색 옷을 입을 두 남자를 가리켰다.

페리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점퍼를 입고 있었다.

"쟤들이 웨스트햄 훌리건 중간 간부 정도는 될 거야."

"아는 사람이에요? 어떻게 알아요?"

"옷을 보면 알 수 있지. 저 로고가 박힌 옷을 입은 사람이 훌리건인 건 잘 알려진 사실이야."

"사실이야." 아일라도 동의했다.

"태호는 EPL에 대해 잘 아나?" 에디가 물어봤다.

"아니요."

"그럼 내가 좀 설명을 해주지."

태호는 에디에게 EPL과 웨스트햄에 대한 특강을 들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큰 줄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

태호는 웨이터를 불러 저 두 사람이 마시고 있는 동일한 맥주를 한 잔씩 더 보내라고 주문했다.

웨이터가 맥주를 가득 담아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가자 두 사람은 웨이터의 말을 듣고 태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둘의 얼굴이 조금은 심각해지더니 곧 태호 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를 아나?" 왼쪽에 입은 조금은 키가 더 큰 백인이 물어봤다.

"옷을 보고 알아봤어." 태호가 대답했다. 에디와 아일라는 언제든 둘을 제압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여기 와서 웨스트햄 팬이 되었거든. 한국에서 온 태호라고 해."

웨스트햄 팬이라는 소리에 얼굴이 펴진 두 사람이다.

"한국이라면 작년에 월드컵을 개최한 곳이군. 그곳에도 웨스트햄 팬들이 많은가?"

"아니. 한국 사람들은 아직 EPL도 잘 몰라. 하지만 곧 알 수 있겠지. 올해 한국이 월드컵 4강까지 갔잖아. 몇몇 선수들이 EPL에서 뛸 날이 머지않아 올 거라 생각해. 난 뉴욕에서 살다 보니 EPL 소식을 좀 더 자주 접해서 알게 된 것뿐이야."

"그럴 수도 있겠군. 맥주는 잘 마시도록 하지."

"잠깐만."

태호는 돌아가려는 둘을 불러 세웠다.

"내가 사진을 전공하는 학생인데 같이 사진 좀 찍을 수 있을까? 졸업 작품 전에 내야 하거든. 주제가 축구라서 말이야."

태호는 지갑에서 백 파운드 지폐 두 장을 꺼내 들었다.

"그거 두 장만 더 꺼내면 생각해 보지."

"좋아." 태호는 돈을 건넨 후 펍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사진을 빠르게 찍었다.

"웨스트햄의 승격을 위하여!"

태호의 건배 제의에 두 사람도 환한 표정으로 웃으며 잔을 들었다. '이게 웬 호구냐'라는 표정이었다.

얼마 후, 태호 일행은 밀월 서포터들이 많은 펍으로 이동했다.

"밀월의 승격을 위하여!" 태호는 여기서도 건배 제의를 했다.

*

다음날.

태호는 디지털카메라에서 사진을 복사해 경찰서에 보내고 에디와 아일라 두 사람이 강도를 제압하는 장면을 스케치한 그림에 사인을 한 뒤 호텔 로비에 도착한 두 사람에게 전달했다. 너무나도 멋들어진 그림에 두 사람은 감동했다.

*

브리스틀로 향하는 차 안.

"갑자기 브리스틀은 왜 가는 건가?"

에디가 물었다.

"거기에 뱅크시라고 유명한 그라피티 화가의 작품이 있다고 해서요. 혹시 아시나요?"

"들어본 적이 있어." 아일라가 대답했다.

"그의 다른 작품이 바로 근처에 있는데 먼저 보고 가겠나?"

런던 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올드 스트리트의 지하철 역사의 외벽.

1994년 영화 펄프 픽션의 두 주인공 사무엘 잭슨과 존 트라볼타가 총 대신 바나나를 들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다. 스텐실로 그려진 이 작품의 오른쪽 상단에는 뱅크시라는 글자가 보였다.

"좋은데요? 언제부터 있었나요?"

"얼마 되지 않았어. 브리스틀에서 활동하던 뱅크시가 런던으로 왔다고 한동안 떠들썩 했었지."

태호는 머릿속에 느낌표가 떠오른 느낌이었다. 깨달음을 얻었다.

*

다시 브리스틀을 향하는 차 안.

"영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혹은 받은 사람은 누굴까요?"

"다이애나."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대답했다.

"반대는요?"

"카밀라!" 아일라가 대답했고.

"찰스!" 에디가 대답했다.

"의견이 갈리네요?"

"굳이 따지면 찰스가 제일 문제인 건 맞아. 내가 카밀라를 더 싫어해서 그렇지." 아일라가 대답했다.

"두 사람을 비난하는 작품을 만들면 잘 팔릴까요?"

"당연하지." 두 사람은 동의한다는 영어 표현을 10가지 이상을 써가며 대답했다.

"티켓만 있다면 아는 사람을 다 데리고 가겠어!" 에디가 대답했다.

태호는 씩 웃었다.

*

"영국에서 제일 재밌는 시트콤 혹은 코미디는 뭘까요?"

"블랙애더."

"네? 미스터 빈 아니에요?"

"블랙애더를 몰라? 같은 로완 아킨슨이 주연인데?"

"한국에서는 미스터 빈 만 틀어주던데. 블랙애더는 첨 듣는 제목이에요."

"미스터 빈도 재밌긴 했어. 하지만 역시 블랙애더가 더 나았지. 블랙애더에는 그 특유의 영국식 위트가 담겨있거든."

태호는 블랙애더가 외국에서 인기가 없던 이유가 이 영국식 위트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

차는 브리스틀의 해밀턴 하우스라고 하는 한 커뮤니티 센터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화염병을 던지는 테디베어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위에는 'The Mild Mild West'라는 타이틀과 뱅크시라는 이름이 밑에 적혀 있었다.

스텐실 능력이 레벨 업 된 것 같았다.

*

차는 태호를 실은 채 런던의 외곽 지역을 돌기 시작했다. 태호의 주제가 그라피티인 만큼 런던에서 낙서를 할 만한 장소를 물색하고자 했던 것이다.

얼마 뒤 인적이 드문 다리 밑에 빨간색 벽돌로 된 벽이 있는 곳. 금방이라도 쥐와 노숙자가 나올 만한 곳이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화방에 들러 검은색, 흰색, 빨간색 스프레이를 사고 스텐실 용 두꺼운 필름 지도 구매했다.

근처 잡화점에서 필름지를 고정할 테이프에 사다리까지 주문해 차에 실었다. 작업복에 작업용 마스크에 깊게 눌러 쓸 모자까지 사니 어디 가서라도 그라피티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사람에게 시간 외 수당을 지불하고 입막음을 위해 하루치 일당을 현찰로 지불했다. 세금도 떼지 않은 순 수입이라 두 사람은 거절하기 힘들었다.

태호는 저녁 식사 비용까지 손에 쥐여 준 뒤 두 사람에게 밤 11시에 올 것을 요구했다.

그 사이, 태호는 호텔 방에서 가져온 도구들을 이용해서 스텐실 작업을 준비하느라 매우 바빴다.

밤 11시쯤 태호의 호텔을 방문한 두 사람은 흔들리는 눈빛을 감추기 힘들어했다. 아무리 추가 수당을 받았어도 불법 행위를 하러 가는 사람을 도우러 가는 사실상 범죄 방조 행위였기 때문이다. 물론 경범죄이긴 하지만.

아까 물색해둔 장소에 도착한 세 사람은 인적이 완전히 끊길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기다린 후 벽 앞에 섰다.

에디는 위쪽, 아일라는 아래쪽에서 망을 봤다. 머리에 플래시를 달고 사다리에 오른 태호는 하얀색 스프레이로 배경을 칠 한 뒤, 필름지를 테이프로 빠르게 고정한 후 검은색과 빨간색 스프레이로 덧칠을 했다.

20분 만에 작업을 끝낸 태호는 필름지와 스프레이를 정리해 차량으로 돌아갔다.

*

다음날 아침.

아침 식사 후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어제 작품을 제작했던 곳으로 향했다. 점심때가 채 되지 않았기에 지나가는 사람도 몇 없었고 차만 간간이 지나갔다.

태호는 차 창문을 열고 사진을 찍은 후 출발했다. 그곳에는 두발로 선 커다란 쥐가 목에 앙증맞은 빨간색 리본을 한 작은 쥐 그림을 스텐실 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밑에는 다음과 같은 텍스트가 적혀 있었다.

"Copy Left Bank Ssi (복사 및 재배포 가능 뱅크 씨)

*

공항으로 가는 차 안.

태호는 낄낄거리며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화면으로 나타난 자신이 한 짓을 감상했다. 차 안의 두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 태호를 바라봤다.

"자네가 불법인 그라피티를 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네. 자네는 뭔가 클래식한 제도권 내의 작가 아니었나?"

"깨진 유리창 이론 아시죠?"

"깨진 유리창을 방치해 두면, 그곳을 기준으로 범죄가 퍼진다는 이론이지." 아일라가 대답했다.

"뱅크시의 그라피티를 너무 많이 봐서 그래요. 뱅크시 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그라피티를 너무 많이 봤더니 살짝 정신이 나갔나 봐요.

뱅크시가 너무나도 좋아지기 시작했고, 왠지 기념으로 하나 남기고 가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실실 웃으면서 말하는 태호.

"런던은 그라피티 할 곳 천지에요."

*

차가 공항 근처에 다다르자 에디가 개인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자네가 어제 준 사인을 아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더군."

"그래요? 다행이네요."

"참, 덕분에 아내와 오랜만에 외식을 했네. 고마워. 밥 먹으며 자네 얘기를 하다, 나와 아내는 자네를 도울 방법을 생각해 봤지."

"좋은 생각이 있어요?"

"우리 집은 대대로 군인 집안이야. 내 할아버지는 한국전에도 참전했었지. 해군이었기에 특별히 위험하지는 않았지만. 꽤 많은 영국군이 한국전에서 죽거나 다쳤어."

"그랬어요? 워낙 미군 얘기만 들어서 영국군 얘기는 잘 몰랐어요."

"아직도 한국전을 기억하는 퇴역 군인들이 적지 않게 있어. 그들을 기억하는 작품도 있으면 좋겠어.

한국인이 만든다면 뭔가 특별하지 않겠나? 그런 작품이 전시된다면 보수적인 영국인들을 설득하기 쉬울 거야."

"좋은 생각이에요. 고마워요. 영감을 줄 것 같은데요." 태호는 활짝 웃으며 고마움을 표했다.

"도움이 되면 좋겠군. 자네와 한 3일 정말 재밌었네. 다시 경호가 필요한 일이 생기면 우리를 부르면 좋겠군."

"나도 마찬가지야." 아일라도 동의했다.

태호의 2박 3일에 걸친 런던 여행이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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