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찰스 사치, 영국1
다음 학기 개학 초.
영국은 여러 가지로 태호에게 애증의 나라였다. 태호를 물 먹인 초상화 갤러리가 영국에 있고, 지금 기준 태호의 이름값을 아득히 넘어서는 젊은 작가 데미안 허스트도 영국에 있다.
BP 초상화 상만 생각하면 지금도 열이 올라오지만, 그럼에도 런던을 잊지 못하고 도전 정신에 불을 지피는 건, BP 초상화 상과는 비교할 수없이 중요한 상, 바로 터너상 때문이다.
터너상은 영국 최고 권위의 현대 미술상으로, 테이트 브리튼 현대 미술관이 84년에 제정한 상이다. 터너 상의 영국에서의 위상은 유명 영화상 이상이다.
방송에도 수상자에 대한 소식이 나오고 셀럽이 수상자를 발표한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저녁 식사 자리나 술자리에서 누가 수상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되고, 배팅도 이루어진다.
터너상은 영국 예술가에서 활동하는 예술인에게 수여된다. 영국에서 주로 작업하는 예술가나 영국에서 태어나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예술가라면 대상이 될 수 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한국인인 태호에게도 이 상을 노려볼 수 있는데, 이 상은 최근 어디서 활동을 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일정 시간 영국에서 활동을 할 경우 태호도 상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게다가 태호는 아직 어리기에 지금 영국에서 잠깐 활동한다고 해서 뉴욕 사람들이 색안경을 쓰고 볼 이유도 없기에 태호는 더 늦기 전에 이 상을 받아볼 욕심을 내는 것이다.
상금은 우승자에게 이만 오천 파운드를 수여하고 수상 후보로 오른 다른 3명도 오천 파운드의 상금이 수여된다. 상금은 큰 의미가 없지만 수상 후보로 오르면 몸값이 바로 뛴다. 우승하면 두 배로 오르기도 한다.
태호는 이 상을 시도해 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런던에 어떤 기반도 없어서 시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말이다.
"찰스 사치에서 전화가 왔어. 자네에게 제안할 게 있다더군."
찰스 사치. 영국의 광고 재벌이자 데미안 허스트 등의 젊은 영국 아티스트를 발굴해낸 장본인이다. 런던 미술계를 주도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무슨 제안이오? 영국으로 넘어 오래요?"
태호는 농담 삼아 얘기했지만 윌슨은 심각했다.
"런던에서 전시회를 하나 개최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보던데. 웬만하면 내 선에서 자르려고 했지만, 중요한 제안이라... 자네도 들어는 봐야 될 거 같아서. 테이트 미술관에서 열자고 해. 자네만 오케이 하면 그쪽에서 모든 세팅은 알아서 한다더군."
"윌슨 씨 생각은요?"
"저쪽은 잃을 게 없어. 자네가 와서 상을 받으면 그것도 좋고, 못 받으면 논란거리가 생기니 더 좋지."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서 필요할까요?"
"자네가 런던에 나타나기만 하면 전에 초상화 수상까지 얽혀서 전 런던이 떠들썩 해지겠지. 별별 소리가 다 나올 거야. 자네가 그걸 인내할 수만 있다면 나쁘지 않은 딜이라고 생각해."
"무슨 작품을 내죠? 만들어 놓은 게 없는데. 어디 플로리다 악어라도 잡아서 포름알데히드에 담가야 할까요?"
태호는 허스트의 작품을 대놓고 비꼬았다. 허스트는 상어를 잡아다 포름알데히드에 담궜다.
"큭큭.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 낼 생각은 있는 거지?"
"네."
"5월에 심사위원을 선정하고 후보자를 발표하니까 5월 전에 활동하는 게 좋을 거야. 사치가 알아서 잘 세팅해 놨겠지.
아마 2월까지 작품을 만들어서 전달하면 3월부터 5월까지 영국에서 순회 전시회를 할 거 같아. 봄 방학 때 얼굴 한번 비춰주고 오면 되겠군.
작업하는데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알려주게. 지금 1월이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는 않아. 자네가 워낙에 빠르게 작업하니 가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얘기지."
"터너상 과거 후보자와 수상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세요. 분석을 좀 해봐야겠어요."
"당연히 보내주지. 2-3일 안에 자네 기숙사로 우편물이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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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이 건네준 자료에 따르면 과거 후보들은 보통 영국에서 최소 10년 이상 활동한 중견 작가들이다. 태호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한두 작품을 전시해 봤자 터너상 수상은커녕 후보에도 들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주일을 고민한 결과, 압도적 물량으로 런던에 있는 모든 미술관들을 다 채워버릴 결심을 했다. 심사위원들 머리에 각인을 시켜버리기로 한 것이다.
유화는 2월까지 제대로 마르지도 않을 것이다. 빠르게 제작할 수 있고, 쉽게 고객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작품. 그라피티를 (낙서) 선택했다.
그라피티에 대한 정의부터 논란이지만 가장 보편적인 정의는 벽 등에 허락을 받지 않고 쓰이거나 그려진 예술작품을 의미한다.
이 '허락'이라는 단어가 중요한데 '허락'을 받고 제작한 작품은 그라피티로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태호는 그라피티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한 하나. 너무 컬러풀하고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래 보며 음미하는 맛도 적었고 텍스트가 너무 많아 예술품에 텍스트가 들어간 것을 좋아하지 않는 그의 취향에도 맞지 않았다.
그라피티처럼 현란하지만 관객을 단숨에 사로잡을 포인트가 있는 작품. 스케치 위주의 그림이지만 단 한 포인트만 채색이 되어 있는 작품. 그라피티에 기원을 두지만, 찬찬히 보면 뭔가 색다른 작품. 그런 작품을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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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윌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런던으로 건너가겠다고? 뭐 하러?"
"터너상을 받으려면 영국 특히 런던이 담긴 작품을 제작해야 될 거 같아서요."
"무슨 작품을 구상하고 있는 건가?"
"그라피티 같은 작품을 그리려고 하는데, 스케치 위주의 작품이지만 일정 부분 채색을 해서 포인트를 주려고 해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한줄기 희망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해요."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영국 가는 비행기 표하고 렌터카, 보디가드 2명을 고용해 줘요. 내일 아침 호텔에서 만나 2박 3일 정도 런던을 담아 볼 생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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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
"나는 에디고 여기는 아일라. 지금부터 당신이 출국할 때까지 당신을 경호할 것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뉴욕에서 온 태호에요."
태호는 밤 비행기로 런던에 도착, 아침을 먹고 나오자 로비에 남녀 한 쌍의 경호원이 태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뢰인은 우리 업체 최고의 요원 두 명을 요청했고 그래서 우리 둘이 여기에 왔소. 우리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오.
당신에게 처할 위험 요소를 알아야 우리도 미리 대비를 할 수가 있고, 혹시 부족하면 추가 지원을 요청할 수 있소.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알려줄 수 있겠소?"
에디는 190cm가 넘는 키에 터질듯한 근육을 가진 전직 군인으로 보였고, 아일라도 180cm에 육박하는 큰 키에 강인한 눈매가 인상적인 경호원이었다. 경찰 출신으로 보였다.
"난 뉴욕에서는 막 알려지기 시작한 작가로, 작품 활동을 위해 3일 동안 런던을 찍을 거예요. 주로 우범 지역을 다닐 예정이라 이곳 지리도 익숙하지 않고 사진을 찍는 동안 날 보호해 줄 사람이 필요해요."
"그래서 아일라가 선택된 모양이군. 런던에 대해서는 우리 중엔 제일 빠삭한 사람이니."
*
에디가 내 옆에 있는 동안 아일라가 메르세데스 MPV인 V 클래스를 몰고 왔다. 태호가 뒷자리에 타자 에디도 태호 옆에 탔다.
"절대로 스스로 문을 열지 마시오. 우리가 열어주고 닫을 테니. 당신 말에 따르면 특별히 위험한 일이 발생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을 대비하는 것도 우리 일이오."
문이 모두 잠긴 차는 런던의 남부 지역인 크로이든으로 향했다. 차로는 한 시간 거리로 런던의 할렘으로 불리는 최악의 우범지역이다.
*
"당신은 주로 어떤 작품 활동을 하시오? 그림, 조각, 사진, 영상 중? 사진을 찍는다는 걸 들었지만 왠지 얼굴이 익숙해서 말이오."
차가 국도에 들어서고 특별한 위험 요소가 없다고 판단한 에디가 심심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호기심도 많고 말도 많은 듯 보였다.
"Faceless 본 원작인 빛의 마리아를 아시나요?"
"Faceless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영국인 화가가 프랑스에서 그린 그림 아니오? 세계 3대 미녀이자 걸작이기도 하고."
'이게 무슨 쌈박한 멍멍이 소리야'라는 생각이 들 때, 에디는 갑자기 정색을 하고 태호를 다시 봤다.
"혹시 당신이 정말, 그, 그러니까, Faceless를 복원했다고 하는, 그 뭐더라... 아. 그렇지. 태호, 당신이로군."
에디는 잠시 횡설수설을 하더니 멍한 얼굴에서 놀란 얼굴로 그리고 기뻐하는 얼굴로 표정이 바뀌었다. 영화배우를 해도 될만했다.
"큼. 혹시, 영국을 떠나기 전에 싸인 하나 해줄 수 있겠소? 스케치가 있다면 더 좋고."
"에디!"
앞에서 운전하던 아일라가 빽 소리를 질렀다. 에디는 움찔했고 아일라는 백미러로 이 덩치만 큰 푼수 떼기 에디를 노려봤다.
"아일라, 괜찮아요. 내가 안전하게 뉴욕으로 돌아갈 때까지 잘 경호해 주면 그 정도는 해드리죠."
"하지만..." 아일라는 찜찜한 표정으로 말을 하려 했지만 태호가 먼저였다.
"회사에는 비밀로 해줄게요. 대신 이제 내 얘기는 하지 말고, 런던 얘기를 해줘요. 난 다음 작품을 위해서 런던에 온 거니까, 여기를 알아야죠."
아일라와 에디를 만나건 우연이겠지만 최선이었다.
말 많은 에디는 영국이 맞닥뜨린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정말 다양한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정부를 비판하는 쪽이었다.
더 선을 애독하는 열혈 독자가 틀림없었다. 아일라는 말은 적었지만 에디와는 약간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경찰의 입장을 옹호하는 입장이었고, 제어할 수 없는 이민에 반대하고, 경찰의 총기 사용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그렇게 셋은 영국의 사회문제에 대해 얘기하며 차는 코로이돈 시내로 들어섰다.
뉴욕 외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도심에 막 들어섰다.
앞을 달리던 경차 앞으로 한 괴한이 정글도를 들고 달려들었다. 차가 급정거를 하자 달려들어 차 문을 발로 차고 유리창을 칼로 찌르고 있었다.
"뭐야 저 미친놈은?"
에디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긴장감이 서렸다.
"아일라 문 열어요. 저걸 찍어야겠어요."
"너무 위험해."
아일라가 말렸다.
"칼 든 강도 정도는 제압할 수 있잖아요?"
태호의 자존심 건드리는 말에 순간적으로 고민하던 아일라는 삼단봉을 챙겨 차 밖으로 나와 에디 쪽 차 문을 열었다. 아일라가 심단봉을 들고 경계를 취하자 에디도 차 밖으로 나와 태호를 내리게 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앞 차 쪽으로 이동했다.
가까이서 다가가 보니 앳딘 얼굴의 남자 흑인으로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정도로 밖에 안 보였다. 약에 취해있는지 행동이 많이 부자연스러웠다. 강도 짓을 하려고 하는데 초짜인지 등딱지에 숨은 거북을 처음 보는 어린 사자처럼 당황했고 어설펐다.
"칼을 버려."
아일라가 강도 앞에서 크게 소리쳤다. 손에는 삼단봉을 쥐고 언제든지 방어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런 미친, 크크크크."
강도는 끝없이 이어지는 욕을 하면 칼로 아일라를 위협했다.
"퍽."
어느새 뒤에 다가간 에디는 칼을 든 강도의 오른손을 가격하여 칼을 떨어뜨린 후 등을 눌러 바닥에 강도를 엎드리게 만든 다음, 두 손을 가지고 있던 플라스틱 케이블 타이로 묶어버렸다.
그러고는 강도의 소지품을 뒤져 혹시나 있을 다른 칼이나 총 등의 무기를 뒤졌다. 태호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미친 듯 셔터를 눌러대고 있었다.
경찰이 와 뒷정리를 다 하고 난 2시간 후에야 태호와 일행은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나중에 경찰에서 추가 진술을 하기로 했고, 태호는 찍은 사진을 넘기기로 했다.
태호는 얽히지 않아도 될 사건에 휘말리게 해 시간을 낭비하게 한 대가로 두 사람에게 하루치 경호비용을 추가로 지불하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면 거절했지만 받지 않으면 경호원을 바꾸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할렘을 생각하고 온 태호에게 크로이던은 뉴욕의 할렘이나 시카고 밑의 게리, 볼티모어의 슬럼가와는 좀 달랐다.
신호등 앞에 서있는 차에 다가와 먼지 범벅인 걸레로 차 유리창을 닦고 돈을 요구하는 할렘이나, 집에 멀쩡한 유리창이 없고 대낮에도 총소리가 들리는 개리, 노숙인들이 길거리에서 마약에 절어있는 채로 죽어가는 볼티모어와는 달랐다.
미국이 가난이 주요 사회문제라면 영국은 조금 더 복잡했다. 코로이돈은 다녀보니 집들도 비교적 깨끗했고 길가에 쌓인 쓰레기도 없어 보였다.
이런 이 동네의 문제의 핵심은 유색인종 많이 가담한 갱들이 마약 이권을 놓고 피비린내 나는 구역 전쟁을 펼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