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데이비드 집2
테일러는 제마에게 유독 가혹한 마틴과 앨리스에게 불만이 많았는데 사위에게 화를 낼 순 없으니 앨리스가 냉기의 대상이 됐다.
앨리스는 어제 태호가 그린 그림을 가져왔다. 테일러도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제마에게 이런 면이 있었다니..." 테일러는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이건 기뻐서 우는 거야. 오늘처럼 기쁜 날이 다시 올 줄은 몰랐는데... 조지가 죽은 이후에는 뭘 해도 뭘 봐도 기쁘지 않았는데. 저 태호라는 청년 덕분에 내가 이리도 행복하다니, 놀랍고 기뻐."
한참을 앨리스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테일러는 앨리스에게 은근히 물어봤다.
"저 청년, 사윗감으로 어때?"
깜짝 놀란 앨리스는 테일러를 쳐다봤다.
"왜 이리 놀래?"
"아니에요, 이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혹시 피부색 때문에 그러는 게냐?"
"아니요. 피부색이 뭐가 대수겠어요. 피부 자체는 저보다 더 뽀얀 청년인데."
"그런데 뭘 그리 놀래?"
"제마가 이제 18살인데 사위 얘기를 하시니까 그렇죠."
"좀 이른가?"
"그렇죠."
"그럼 지금 잡아야지. 조지도 내가 18살 일 때 나에게 대시했어."
"이모, 그건 50년 전 얘기에요."
"지금도 유명한 운동선수들은 빨리 결혼한다며?"
"그렇긴 하죠. 경제력이 되니까."
"그러면 잡아야지. 저런 친구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가만히 있어도 빛이 나는 청년은 난 정말 오랜만에 봐. 내 눈에 빛이 나던 남자는 조지 말고는 JFK (존 에프 케네디) 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딴 생각 말고 잡아. 알았어?"
"태호 여자친구 있대요. 미스 프랑스 출신의 미녀로 뉴욕에서도 떠들썩 하다고 하네요."
앨리스는 태호의 연예사는 몰랐지만 데이비드에게 미녀 프랑스인 여자친구가 있다는 얘기는 기억이 났기에 대충 둘러댔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두고두고 만날 때마다 혹은 전화로 잔소리를 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 에잉. 쓸만한 남자들은 다 누가 채가서 없지."
테일러는 앨리스를 보자 또 생각나는 게 있었다.
"그러게 너는 왜 마틴하고 결혼해서 이러고 사니."
"이모! 그만해요. 그 얘기도 벌써 오십 년 째에요!"
*
월요일.
제마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태호를 찾았다.
태호는 거실에서 이젤 위에 캔버스를 걸쳐 놓고 앨리스와 마틴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제마는 태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뒤에 있는 소파에 앉아 가만히 태호가 쳐다봤다.
뉴욕에만 가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동양인이지만 자신이 다니는 집 근처 학교에서는 쉽게 볼 수 없다. 유색인종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무척이나 배타적인 지역이었다.
자신이 알기로 집의 골프 코스가 워낙에 인기가 좋아 무수히 많은 손님들이 방문했고 골프를 치고 갔지만 그럼에도 유색인종을 본 기억이 없었다.
아, 큰 오빠의 피앙세 엄마가 한국인이라고 한다. 희한하게 한국인과 인연이 있으니 신기했다.
부모님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호를 환영하는 것은 빛의 마리아의 작가이고 데이비드의 친구이고 기타 등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렇듯 누군가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따뜻하게 받아주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신경이 쓰이지 않던 사실이지만 지금은 태호를 부모님이 좋아한다 게 반가웠다.
토요일에 태호가 자신에게 모델로서의 재능이 출중하다고 했을 때는 농담을 한다고 생각했다. 립 서비스 정도로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보여줬다.
그 까탈스럽던 부모님을 간단히 설득 시켰다. 앞으로 자신이 모델 일을 해도 일 자체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모델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건전하지 못한 환경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신경을 쓰겠지만 말이다.
태호를 쳐다보자 심장이 뛰었다. 예술가와의 사랑은 꼬이고 꼬인 연애소설 같아 함부로 시작하지 말라는 말도 들어봤지만, 지금이라도 저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체취를 맡아보고 싶었다.
18살에 다가온 첫사랑이었다.
그날 저녁.
앨리스는 어제 들은 테일러의 얘기가 하루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사윗감으로 태호가 적절할까를 생각해 봤다.
이 집안도 미국 어디에 내놔도 어디 빠지지 않는다. 로엘. 롱아일랜드 기준 10위이자, 미국 부자 랭킹 500위 안에 들어가는 집안의 이름이다.
아들을 불러 태호의 여자관계에 대해서도 슬쩍 물어봤다. 그 미스 프랑스라는 학생과는 깨진 듯했다. 다만 한국 제일 부잣집 딸과도 썸싱이 있다고 했다.
자신이 봐도 훤하게 잘 생긴 청년에 그림 실력까지 출중하니 주변에서 이런 남자를 놓아둘 리가 없다. 당연히 여자가 주위에 꼬이고 생활은 문란할 지도 모른다.
차마 아들에게 친구 연애관까지는 못 물어봤다. 저녁에 대화를 나누며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틴은 일로 바빠 저녁을 먹고 온다고 했다. 네 명이서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서 태호의 가족에 대해 물어봤다. 주위 환경을 파악해 태호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호의 답변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매우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태가 났다.
저런 사람이 어떻게 예술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 아주 유명한 예술가는 보통 반 고흐나 몽크처럼 정신병 하나씩은 달고 사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왔기 때문이다.
태호가 정상이라는 기대는 바로 학교 얘기가 나오자 깨졌다.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정상적으로 다닌 학교가 없었다.
본인의 의지로 다니지 않았다고 하니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해석했다.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한국 최고의 대학교수들에게 개인적으로 수업을 받았다고 했다. 어떤 식의 수업을 받았는지 물어봤다.
들어보니 대학에서나 하는 토론식 수업을 10살 무렵부터 해왔다고 했다. 머릿속에 불이 탁 켜지는 느낌이었다. 이 청년은 천재다.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구사하는 언어가 무려 6개였다. 예술 전공으로 석사나 박사 과정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같이 골프를 치면서 파악했지만 운동 신경은 별로였다.
태호의 모든 배경을 다 떠나서 앨리스는 태호를 집안 식구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환하게 웃는 표정이 너무나도 멋있었다. 제마는 이미 넋이 나간 지 오래다. 로이의 피앙세도 엄마가 한국인이라는데 이것도 우연인가 싶었다.
*
제마는 식사가 끝난 후에도 자기 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태호 옆에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앨리스는 좀 떨어져 있었지만 둘의 대화에 집중했다.
"태호는 어떻게 모델 일을 잘 알아?"
"사진을 좀 배웠거든. 그때 모델들 사진 찍는 걸 옆에서 많이 지켜봤어."
"사진을 잘 찍는데 무슨 비결 같은 게 있어?"
"어떻게 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고민해 보니까, 모델들이 표정이 좋아야 된다는 걸 깨달았어. 그러면 어떻게 해야 표정을 좋게 하느냐?
결론은 칭찬이더라고. 자신감이 있어야 좋은 표정이 나오고 좋은 사진이 나와. 카메라 앞에서는 최고가 되어야지. 작가는 자신감을 불어 넣어줘야 하고."
"혹시 나에게 한 말도 자신감을 불어 넣으려고 했던 말이야?"
"좀 주눅 들어 있더라. 너 생각보다 표정이 너무 좋아. 타고난 거 같던데. 왜 사람들이 몰라봤는지 모르겠어."
"키가 작다고 하던데?"
"모델들 키가 꼭 175를 넘어야 하는 건 아니야. 개성 있는 마스크의 모델은 키를 보지 않아."
"그 캣 워킹이라는 거. 연습 많이 해봤는데, 어렵더라고."
"아, 그 웃기지도 않는 워킹? 왜 그 말도 안 되는 걸음걸이를 아직까지 유지하는지 모르겠어. 여성 단체는 왜 가만히 있는지."
"푸흣.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태호가 처음이야."
"내가 그쪽 업계에서 일할 기회가 생기면 정말 다 없애 버릴 거야. 차분히 걸어가면 옷을 좀 주의 깊게 관찰을 할 수가 있을 텐데, 몸동작이 너무 크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어."
제마는 불필요한 워킹이라고 생각만 했지 감히 없애버리겠다고 상상도 못했던 일을, 장담할 듯 없애버리겠다고 말하는 태호가 너무 멋져 보였다.
지금 제마는 태호의 방귀소리도 멋지다고 생각할 시기였기도 했다.
*
화요일.
데이비드와 화방에서 2m x 1.3m의 커다란 캔버스와 빨리 마르는 미디엄을 사 가지고 온 태호는 물감을 짜서 기름을 빼고 붓을 손질하는 등 그림 그릴 준비를 했다.
원하는 그림은 엘리 II의 느낌이 나는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다. 크기는 실제와 1:1 비중으로 하기로 하고 어젯밤 제마를 모델로 열 장이 넘는 스케치를 했다.
그중에 최종으로 선택한 스케치는 제마가 정면을 보고 걸어오는데 장면이었다. 발끝까지 내려오는 어깨 끈이 없는 롱 블랙 실크 드레스에 치마는 옆트임이 골반 밑에까지 이어져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 때 드레스가 왼쪽 허벅지의 반을 대각선으로 가르고 지나가며 끝에서 찰랑거렸다. 왼쪽 허벅지부터 오른쪽 무릎 밑까지 미끄러질 듯한 각선미의 제마 다리가 시원하게 드러났다.
가슴에서 시작한 깃털 장식은 골반까지 덮고 있었는데 깃털을 가슴에 꽂은 듯 풍성했다. 허리에는 두꺼운 검은색 가죽 벨트가 있어 깃털로 덮여 가려져 있었던 허리 라인이 강조되었다.
표정이 압권이었는데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굳은 입은 묘하게 엇나가는 듯하면서도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을 자극했다.
살짝 들어 올린 왼발은 선정적인 캣워크의 율동감과 생동감을 극대화했다. 그림 속의 제마는 단숨에 캔버스를 뚫고 나와 관객 앞에서 턴을 해 보일 것 같은 입체감이 있었다.
엘리 II 와 비슷하게 그려졌지만 엘리 II가 정적이라면 제마 I은 매우 동적이었고, 엘리가 들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겠지만 한 수준 위의 그림이었다.
*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제마네 모든 식구가 숨죽이며 작품을 관찰했다. 수준 높은 화가의 제작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한껏 누렸다.
태호는 토요일까지 건조와 채색의 과정을 반복했고, 마지막 채색한, 물론 상당히 많은 부분이 칠해졌지만, 흰색 물감만 아직 덜 말랐지 다른 부분은 거의 다 건조까지 완료된 상태의 제마 I을 제마의 방에 걸었다.
제마에게는 이미지 트레이닝 용도로 사용하라며 제공한 그림이었다. 당장 시장에 팔아도 수백만 불 이상을 받을 수 있는 그림이지만 태호는 흔쾌히 제마에게 무료로 넘겼다.
"나중에 모델로 성공하면 이 그림 덕이라고 생각해줘."
태호는 웃으며 농담 삼아 얘기했다.
그리고는 캔버스 뒤에 제마의 성공을 기원하는 글을 남겼다.
"이걸 받아도 괜찮을까? 너무 훌륭한 그림이라."
제마는 그림이 너무 좋았지만 태호의 그림 값을 알기에 부담스러웠다.
"괜찮아. 데이비드 그리는거 보다 널 그리는게 훨씬 재밌어. 하하."
데이비드는 표정을 구겼지만, 제마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앨리스와 마틴도 감동했다.
*
토요일 다시 학교로 돌아오기까지 태호는 정말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아침에 조깅을 계속했건만 살이 몇 킬로는 찐 게 느껴질 정도로 잘 먹고 잘 잤다.
태호는 앨리스와 마틴 부부의 그림과 데이비드의 그림까지 완성시켜 놓고 나왔다. 앨리스는 떠나는 태호에게 언제든지 환영하니 집처럼 생각하고 다음에도 놀러와 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