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데이비드 집1 (94/181)

94. 데이비드 집1

병원에 붙잡혀 있는 로이를 제외한 네 식구와 태호는, 저택에 고용된 사용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련된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프랑스 코스 요리에 가까운 식사였는데 앨리스가 지인의 요리사까지 초빙해서 마련한 식사였다. 식탁과 거실의 소파로 자리를 옮기며 나눈 이야기로 태호는 데이비드 식구들의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데이비드네 집안은 뉴욕 토박이로 한마디로 전통적인 부자 (old rich)였다. 조상 대대로 뉴욕에서 터전을 일구었으며, 특히 증조할아버지 때 부동산과 건설업으로 본격적인 부를 이룬 집안이었다.

그 많은 사람을 자살로 몰아넣었던 대공황 때조차 보유 중인 현금으로 맨해튼의 알짜배기 부동산을 구매해 지금도 맨해튼의 많은 빌딩들을 마틴의 회사가 소유하고 있었다.

사진을 통해서 본 대학시절의 앨리스는 그야말로 초 울트라 미녀였는데 첫눈에 반한 마틴의 눈물겨운 구애 끝에 경쟁자를 이겨내고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앨리스가 하는 이야기의 행간을 읽어보면 앨리스를 좋다고 쫓아다닌 사람 중에 제일 단순 무식해서 싫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중에 데이비드의 얘기로는 마틴은 운동 특기생으로 학교에 거액의 돈을 쏟아붓고 나서야 겨우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데이비드는 알게 모르게 자기 아빠인 마틴에 대한 디스를 자주 했는데, 어렸을 때 아빠한테 많이 맞고 자랐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마는 집에서 약간은 못난이 취급이었는데, 막내딸이라 집안의 이쁨을 독차지하며 자랐을 것이라는 생각과는 달리, 왠지 모르게 살짝 주눅이 들어있는 듯했고, 말투에는 반항끼와 삐딱함이 묻어 나왔다.

태호는 제마의 특색 있는 외모와 훌륭한 신체 비율이 모델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제마에게 모델 쪽 일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키가 173cm 정도밖에 안되는데?”

“그 정도면 작은 키가 아닌데? 왜 그 업계는 멀대같이 키 큰 여자들만 찾는지 모르겠어. 업계 기준으로 네 키가 작다고 판단하지는 몰라도 네 분위기가 그걸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으니까 자신감을 가져도 돼.”

태호는 가방에 챙겨온 카메라와 삼각대를 꺼내와 거실에서 조립하고 거실의 밝기에 맞춰 필요한 조율을 했다. 이미 태호의 요청으로 거실 불은 다 켜져 있었는데, 태호는 제마를 제일 밝은 곳에 이동시킨 다음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제마는 부모님과 오빠 앞에서 부끄럽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촬영에 당황해서 온몸이 딱딱하게 굳은 듯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제마, 전에 이런 촬영해 본 적 있어? 없다고? 있어도 무시해. 내가 새로 판단해 줄 테니까.”

태호는 셔터를 누르면서 제마에서 더 자신감 있는 표정을 주문했다. 거실을 배경으로 한 10분 가까이를 사진을 찍자 제마도 이제는 익숙해진 듯 좀 더 편한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태호는 계속해서 제마를 칭찬하여 나중에는 제마의 거만한 표정까지 자연스럽게 이끌어냈다. 한 30분 동안 지속된 촬영이 끝나자, 태호는 마틴과 앨리스도 모델로 세우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태호는 일부러 두 사람이 다정한 포즈를 취하게 했는데 두 사람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는 게 표정에서 묻어 나왔다.

"사진이 너무 멋지게 나올 거에요."

태호는 앨리스와 마틴의 포즈가 너무 좋다며 한껏 칭찬했다. 예술 쪽으로는 뉴욕 최고의 화가가 언제 되느냐만 남았다고 일컬어지는 태호의 칭찬에 두 사람의 기분은 날아갈 듯했다.

“내일 낮에 더 찍어보죠. 오늘 사진을 찍어보니까 제마는 모델로 충분히 성공할 수 있어요. 사진이 너무 잘 받는 거 같고요."

제마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태호에게 물어봤다.

"정말 그럴까?"

"만약 널 못 알아보는 사진작가가 있다면 작가로서 실격이야. 넌 정말 성공할 수 있어." 태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태호와 데이비드 식구의 첫 만남은 서로에게 한껏 호감을 느끼게 만들며 마무리 됐다.

*

나중에 맥주를 들고 게스트 룸으로 찾아온 데이비드는 태호에게 아까 제마에게 한 말이 정말인지 아님 립 서비스인지를 물어봤다.

“제마가 저렇게 자신감 있어 보이는 표정을 지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에도 없어.”

“하나뿐인 예쁜 여동생을 도대체 어떻게 취급한 거야?”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인데 아빠가 좀 구속을 심하게 했지. 독재자 스타일인데다가.”

“앨리스에게는 꼼짝도 못 하는 거 아니었어?”

"사안 따라 다른데, 아빠가 정말 눈 돌아가면 집안 누구도 못 말리니까. 제마가 또 공부도 좀 못했고 다른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거든.”

“오늘 보니까 타고난 모델처럼 보이던데. 자신감만 좀 더 붙으면.”

“오늘 너처럼 제대로 얘기해 준 사람이 없었어. 제마도 모델 일을 안 알아본 건 아닌데 키가 작다고 에이전트에서 안 받아 준 것도 있었고, 아빠의 반대도 상상을 초월하게 심했고 말이야.”

“아까는 좋아하시던데?"

“나도 좀 의외였는데, 네가 얘기해 주니까 좋아한 것일 수도 있고, 아빠도 지금 다른 진로는 거의 포기 단계에 있었던 까닭도 있고. 게가 지금 12학년이잖아. 이미 대학 원서를 썼는데 붙은 대학들이 기대에 너무 못 미치니까 다른 쪽으로 알아보고 있는 거지.”

“제마는 충분히 모델로 성공할 수 있어. 그러니까 식구들 보고 옆에서 응원해 주라고 해.”

*

다음날 아침.

마틴은 데이비드네 식구들과 집에 있는 18홀을 돌고 난 후 점심을 먹었다. 목동들의 공놀이인 골프에 별 관심이 없는 태호지만, 고등학교 때 레슨을 받은 보람이 있어서 그래도 100타 정도 쳤다.

나중에는 골프는 대충 치고, 사진을 찍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사진을 찍으면서 왜 이 집 골프 코스가 작품이 될 수 있는지 알 수 있었는데 처음으로 골프를 치는 사람들에게는 마치 신비한 모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적절히 벙커가 배치되어 있었고, 코스를 보고 빨리 전략을 세워서 치지 않으면 타수를 늘리기 쉽게 코스가 설계가 되어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 그린이 예뻤다. 잔디 색깔부터 주위 배경으로 보이는 집과 정원 그리고 멀리 보이는 바닷가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점심 후 태호는 데이비드의 차를 얻어타고 가까운 시내에 나가 사진을 현상하고 화방에 가서 미술용품을 사서 돌아왔다. 주눅 들어 있는 제마가 안쓰러웠는지 태호는 제마의 사진 중에 제일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담은 사진을 놓고 스케치를 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엘리와 같은 색의 눈동자였다. 쓴웃음을 삼키며 그림을 빠르게 채색해 갔다.

점심때 시작된 그림은 저녁때쯤이 되자 슬슬 완성이 되어 갔는데, 빠르게 완성한 탓에 자신이 보기엔 정말 많은 것이 모자란 그림이었지만 하루 종일 그림만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기에 그림을 들고 거실로 내려갔다. 데이비드 네 가족은 태호가 그림을 들고 내려오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걸 오후에 다 그린 거야?” 데이비드가 물었다.

“다 그린건 아니야. 손볼 데가 아직 많아.”

태호의 그림은 마치 아카데미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고도로 완성되었고 기술적으로도 완벽한 사실주의적 접근과 감각적인 해석이 들어갔다.

“우리 집에 이것과 비슷한 그림이 걸려 있을 텐데···” 앨리스가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이층 서재에 있는 그림일 거예요."

“맞아. 태호는 어떻게 알았어?”

“그 그림이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의 그림이더라고요. 이 그림도 부그로의 그림을 보고 따라 해 본 거예요."

“맘먹는다고따라 할 수 있는 그림이 아니라는 건 잘 알아. 정말 실력이 대단해. 어디 보자.”

네 식구가 찬찬히 그림을 살펴보고 있었는데, 제마는 그림에 나타난 자신의 모습에 놀라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태호는 마치 제마가 런웨이에서 워킹을 하듯 걷는 동작을 표현했는데, 표정이 매우 당당하다 못해 도도했다.

머리카락은 찬바람에 날리듯 펄럭였는데 그다지 길지 않은 제마의 머리가 뒤로 날리는 모습은 강인한 성격마저 드러나는 듯했다.

이 그림으로 제일 충격을 받은 건 앨리스와 마틴이었다. 평생 봐 온 자기 딸이 이런 매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앨리스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제마를 꼭 껴안았다.

"내 딸이 이렇게 멋진 걸 지금에야 깨닫게 되다니. 미안하다."

앨리스의 눈물에 제마도 따라 울었다.

*

다음날 일요일.

데이비드네 가족은 근처 교회에 예배를 보러 갔고, 태호는 집에 남아 어제 마무리 못한 제마의 그림을 다듬고 있었다. 보통 때와 다르게 빠르게 마르는 미디엄을 썼기에 작업은 빨랐다. 점심이 되기 전 완성된 그림은 거실에서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놓고 말렸다.

점심때쯤이 되자 데이비드의 이모할머니인 테일러 씨가 보였다. 데이비드 네 식구와 같은 교회를 다니는 듯했다.

태호를 본 테일러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태호가 근처에 다가가자 볼 키스를 하며 포옹했다.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믿을 수 없었는데... 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테일러는 환하게 웃으며 태호의 손을 두 손으로 잡았다.

"데이비드의 친구라니 더 기쁘군요. 잘 왔어요."

테일러는 태호의 호구 조사를 열심히 한 뒤, 데이비드 네 식구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태호도 테일러의 환대가 반가웠다. 친할머니가 생각이 나기도 했다.

이것도 인연인 듯싶어 선물을 하기로 결심했다.

"혹시, 오늘 오후에 바쁘세요?"

"다 늙은 노인이 바쁠 일이 뭐에 있누. 바쁘면 자네가 바쁘겠지."

"그럼 식사 후에 잠깐 모델이 되어 주시겠어요?"

"날 그리겠다고?"

"네."

"왜?"

"데이비드 할머니 시잖아요. 제 친 할머니 생각도 나서 그려 보려고요. 정말 얼굴선이 고우세요. 젊으실 적 한 미모 하셨을 것 같으신데. 맞죠? 앨리스와 제마가 미인이신 것도 그 집 DNA 영향인 거 같아요."

태호는 한껏 세 여자를 치켜세웠다. 거짓말도 아니었기에 거리낌도 없었다.

데이비드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고, 앨리스의 눈은 하트로 변해 있었다.

마틴 만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뿐이다.

가로세로 80cm 정도되는 초상화 캔버스를 꺼냈다.

앉은 자리에서 스케치도 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서 4시간 정도 만에 완성했다.

네 시간 동안 가만히 앉아 있는 테일러 씨가 심심하지 않도록 데이비드네 전 가족이 근처에서 말 벗을 해주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자 테일러 씨는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표했다.

"나이를 먹으면 조그만 일에도 눈물을 흘리게 된다오. 더군다나 이게 작은 일도 아니고."

점심 후 계속해서 작업을 했던 태호는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고, 다른 식구들도 방으로 돌아가 앨리스와 테일러만 거실에 남았다.

태호와 데이비드가 방으로 돌아간 것을 확인한 후 테일러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앨리스, 제마의 표정이 오늘 무척 달라졌던데,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그 아이가 이렇게 밝았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어."

테일러의 목소리는 한 겨울 냉기를 풀풀 뿜어내고 있었다. 제마의 표정이 밝아졌기에 평소보다 냉기가 덜 한 편이 이 정도였다.

앨리스는 자신의 이모를 아끼면서도 이렇게 냉기를 풀풀 풍길 때는 꼼짝을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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