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천국으로2
두 사람이 그림을 감상하는 사이, 태호는 다른 스케치북에 한참을 다른 그림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데이비드가 슬쩍 보니 지금 베란다로 보이는 뉴욕의 야경을 배경으로 웬 시커먼 물체가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다시 보니 사람의 형상이었다.
특징은 유독 눈이 강조되었는데 태호가 빨간색으로 핏줄까지 묘사하자 거의 공포영화 포스터 같았다.
첫 장을 그린 태호는 바로 뒷장으로 넘기더니 간소화한 배경에 앞장과 같이 사람이 떨어지는 모습이었지만, 차이점은 머리를 호박처럼 묘사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곧 다음장에도 비슷한 그림을 그렸지만 형상이 조금씩 달리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동안 데이비드는 태호가 잔을 비울 때마다 술을 따라줬고, 태호는 당연한 듯 그 위스키를 마시면서 그림을 한 장씩 더 그려갔다. 로이는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게 쳐다보는 눈치였지만, 태호를 천재로 알고 있는 레이나는 마치 역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태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마치 나치의 스페인 게르니카 폭격이 피카소의 명작 게르니카를 탄생시킨 것처럼 말이다.
*
뉴욕에서 돌아온 태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호박이라고 이름 짓고 다양한 버전의 그림을 그렸다. 몇몇 작품은 가볍게 그렸고, 몇몇 작품은 괴기스럽게 그렸다.
데이비드는 태호가 한 모티브를 주제로 많은 그림을 그리는 스타일은 아니라는 걸 알기에 물어봤다.
“정말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거야?”
“그 자살한 사람 눈빛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생각이 날 때마다 그리고 있어. 이렇게 그리고 나면 좀 덜 생각이 나고, 좀 덜 괴롭다고 해야 되나?"
"레이나가 객관적으로 보라고 한 게 생각이 나서 최대한 객관화해서 보려고. 그림을 그리니까 조금은 더 잊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치고는 몇몇 그림이 굉장히 어두운데? 특히 지금 그림에도 보이지만 이 호박에 뚫린 눈은 거의 공포영화 포스터 같아. 원망하는 듯하기도 하고, 공포에 질린 듯하기도 하고.”
“그 찰나의 순간 동안 내가 그 사람의 눈에서 읽은 감정이야. 한국에는 한이라고 정서가 있는데, 정말 커다란 분노인데 일종의 체념이라는 정서도 같이 녹아들어가 있어."
"사회 모든 여건이 굉장히 부조리하고 답답하게 만들고 나를 화나게 하는데, 이게 사회적인 문제라 개인이 해결을 할 수가 없는 거지. 그래서 체념하게 되고 그건 결국 우울증으로 나타나게 되거든. 내가 본 게 바로 그거였어.”
“무슨 공포 영화 모티브 같네. 그런데 왜 호박을 쓴 걸로 묘사한 거야?”
“너는 못 들었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이 죽는 순간 호박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어. 그 소리가 마치 나에게는 죽음의 순간이지만, 또 그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던 많은 것들이 같이 깨져 나간 순간이라는 생각도 들더라고. 내 나름대로의 그 사람을 위한 명복인 셈이지.”
같은 모티브로 여러 작품을 그렸지만 최종적으로 호박이라는 이름으로 4개 작품이 한 주제의 연작이 되었다. 순수하게 사람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눈에는 핏발이 섰고 얼굴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하다. 태호가 목격한 가장 진실에 가까운 그림이다.
두 번째는 얼굴 부분이 호박으로 바뀌었고 표정도 사라졌으나 눈빛은 여전했다. 세 번째 그림은 배경인 뉴욕 야경이 더 화려했고 복장도 마치 엘비스 프레슬리의 로큰롤 무대의상을 입고 있었다. 눈빛은 도전적이었으며 손은 허리춤을 집고 있는 것 같았다.
네 번째 그림은 뉴욕 배경은 사라지고 사람의 눈과 눈썹 부위만 보였는데 눈썹의 위치가 아래를 향한 것이 아닌 위로 있는 것으로 보아 마치 집안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태호는 나머지 그림들도 버리지 않고 나중에 윌슨에게 보냈다.
윌슨은 태호가 그림을 가지러 오라는 얘기를 듣고 한두 점이겠거니 했는데 20점 가까운 그림이 똑같은 콘셉트로 그려진 그림이었다.
평소의 태호답지 않고 붓질이 거칠었고 구도도 단순했기에 그림을 그리는데 오랜 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림을 나른 윌슨은 매튜와 빌바오의 제이슨도 불러 그림을 감상했다. 특히나 제이슨이 태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변화를 예의 주시했다.
“꽤 쾌활한 녀석인데 말이지. 그런 일을 겪고 난 후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다는 거잖아. 지금까지 그 녀석 그림들은 매우 정제되고 세련되고 그리고 아름다웠는데."
"마치 그렇지 않으면 예술이 아니라는 주관이 너무나 뚜렷했는데. 이 작품은 그 주관을 마치 깨거나 바꾼 거처럼 보여서 더 맘에 드네. 개인적으로 그의 아픈 경험은 위로는 해야겠지만.”
제이슨은 태호의 아픈 경험에는 위로를 표현했지만 그림의 변화에는 긍정적인 의견을 냈다.
“어쩌면 이 그림이 진정한 의미에서 태호의 첫 컨템퍼러리 작품이야. 그전까지는 과거를 답습하는 듯한 모습을 주로 보였거든. 빛의 마리아도 마찬가지고. 그 외 작품들도 고전을 되살려 놓은 느낌이었는데."
"이번 호박 연작은 정말 훌륭해. 거칠지만 그 녀석의 사회 현상에 대한 고민이나 문제의식이 그대로 담겼어. 이 연작은 다른 사람에게 팔지 마. 빌바오에서 구매하는 것으로 하지.”
“가격은?” 윌슨은 바로 얼굴색을 바꾸며 네고 모드에 돌입했다.
"선수끼리 왜 이러나? 이건 지금까지의 작품과는 비교할 수없이 짧은 시간에 그려진 작품이야."
"기념비 적인 작품이기도 하지. 싼 가격에 가져갈 생각하지 마."
"이사회에서 결정할 문제야. 하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
"난 기대를 하고 싶은데?"
"하아... 내가 이래서 여기 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고 혈압이 오른다니까. 나머지 그림은 어쩔 거야?"
"나모드 형제처럼 가지고 있다가 팔아야지."
작가가 살아있을 경우는 구매자 우위 시장이 형성된다. 왜냐하면 언제든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명성이 떨어질 수도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보통 작가는 젊은 시기에 인생의 황금기를 맞이하고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는 게 일반적이었다.
작가가 고인이 되고 나서는, 명성을 어떻게 잘 관리했냐에 따라, 판매자 우위 시장이 형성된다. 이때 생전 작가가 제작한 작품들이 많고 시장에 한꺼번에 나오면 가격이 폭락할 수 있기에 이를 막기 위해 컬렉터나 딜러는 천천히 곶감 빼먹듯 하나둘씩 경매시장에 내놓고 그림을 판다.
피카소의 후기 그림 수백 점을 가지고 있는 나모드 형제가 그랬는데, 딱 가격이 유지될 정도의 그림만 판매에 나섰다. 그래서 경매 시장에서 해마다 일정한 수의 피카소 그림이 늘 거래되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형편없는 그림들이 시장에 나오지만 아주 가끔 걸작들이 거래된다.
이런 그림들은 세금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의 비관세 지역의 보관창고에 수십 년씩 썩고 있었다.
"차라리 방송을 타보는 게 어때."
"무슨 방송?"
"맨날 우리 미술관에서 다큐멘터리나 찍지 말고 제일 괜찮은 그림 몇 점을 가지고 오프라 쇼에 나가보는 거지. 스토리도 있고 좋아 보이는데. 토마스가 그쪽에 연줄이 있으니 연락해 봐. 나도 말은 꺼내 볼테니까."
"괜찮은 생각이야. 한번 추진해 봐야겠어. 고마워."
"말만 그러지 말고 그림 값을 깎으라고!"
*
11월 중순.
중간고사가 끝난 후 2주 정도 흐린 시점, 추수감사절 방학이 다가왔다. 학기 초부터 데이비드가 초대했기에 태호도 이 때의 스케줄은 다 비워둔 상태였다.
엘리도 없고 따로 작품을 제작 중인 상태도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금요일 오후 수업이 끝나자 태호는 가방을 챙겨 놓고 데이비드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둘이 차를 타고 이동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오늘 차로 이동하지 않는데? 헬기로 갈 거야. 아빠가 데리러 온대. 7시쯤 도착한다니까 여기서 한 6시쯤 나가면 될 거야. 너 멀미하냐?”
“차멀미는 안 해봤는데?”
“혹시 모르니까 비닐봉지 챙겨가. 나 처음 탈 때 토했는데, 혈관 속 노폐물까지 다 토하는 기분이었어.”
“안 위험해?”
“위험한 거 모르고 타고 다녔어. 바람 많이 불면 아예 뜨지를 않으니까. 날씨 좋을 때만 타. 그럼 탈만 해.”
*
학교에서 6-7킬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헬리패드에 벨 407 헬기가 살포시 내려앉았고, 거기엔 마틴이 앉아 있었다. 헬기 문이 열리고 마틴이 손짓으로 타라는 신호를 보냈다.
둘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헬기로 접근해 탔는데, 마틴이 뭐라고 하는데 전혀 들리지 않아 그냥 악수만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 뒤로 헬기는 다시 살포시 뜨더니 기수를 남서쪽으로 향했다.
한 20분쯤 바닷가를 따라 날아가더니 다시 기수를 남쪽으로 완전히 바꾸고 약 10분을 더 날아가자 육지가 보이는가 싶더니 바로 헬기가 고도를 낮췄다. 옆에 마틴과 데이비드는 아무렇지 않아 했지만 태호는 준비해둔 비닐봉지는 쓸까 말까 망설이는 중이었다.
헬기에서 내린 다음에 차로 이동한 맨션은 밤이어서 아주 잘은 보이지는 않았지만 노란색 대리석으로 빛나는 아름다운 건물 외관과 그 앞에 수영장 그리고 그 앞으로 이어지는 정원을 가진 매우 아름다운 건물이었고, 그에 걸맞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비키니를 입은 미녀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해야 될 것 같고, 미로에서는 젊은 연인들이 데이트를 하고 있을 듯한 그냥 입이 떡 벌어지는 맨션이었다.
다음날 보니 맨션 주위에는 18홀 골프 코스가 있었다. 골프 코스 설계자로 유명한 A.W. 틸링해스트가 디자인한 것인데 그의 가장 말년에 디자인한 코스 중 하나로 이미 작품이라 불리는 골프 코스였다.
마틴은 골프 광이고 잭 니클라우스 팬이었는데 잭 니클라우스를 초빙해 골프 코스를 변경하려다 앨리스의 강력한 반대로 좌절된 적도 있었다. 그만큼 골프장은 아름다웠고 집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약간은 올드 한 겉모습과는 달리 내부는 화이트 톤으로 정말 깔끔하고 모던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한 예로, 거실 한쪽 벽면은 거대한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가까이엔 골프장이 그 뒤로는 헴프스테드 만이 멀리서 보였고, 부엌과 식탁 또한 흰색대리석으로 깔끔하게 디자인되어 있었다.
여기가 롱 아이랜드의 전통 부촌의 저택이 아니라, 실리콘 밸리의 30대 IT 사장의 저택이나 비버리 힐즈의 저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벽의 곳곳에는 다양한 회화 작품들이 전시가 되어있었는데 태호가 놀란 것은 ‘밤샘하는 사람들’로 유명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도 거실에 크게 걸려있었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 태호도 한국에서는 몰랐지만 미국 와서 미국 미술사 관련 서적을 보면서 배웠던, 미국 근대에서 현대 미술사를 얘기할 때 빼놓으면 안되는 미술가들의 작품이 집안 곳곳에 전시되어 있었다. 태호에겐 마치 ‘부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주는 듯한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앨리스와 인사한 태호는 데이비드의 동생 제마와도 인사를 했다. 제마는 눈가의 주근깨가 인상적인 이제 고3인 학생이었다. 화장도 꾸밈도 없었고 옷도 남자 옷에 가깝게 입어 약간은 보이시한 느낌이 났다. 그래도 반짝이는 눈동자와 반달형의 눈썹, 그리고 뚜렷한 이목구비는 엄마인 앨리스를 닮아서 꾸미기에 따라 얼마든지 돋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