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천국으로1
이주 후.
이제 공식적으로 싱글이 된 태호를 위로할 겸, 전에 데이비드 형인 로이의 초대도 있고 해서 로이의 여자친구 레이나가 있는 뉴욕으로 향했다.
레이나의 집이 작은 관계로 잠은 근처 호텔에서 자기로 했다. 주차를 위해 호텔로 먼저 향했다. 약속 시간이 얼마 안 남았기에 식당에서 바로 만나기로 했다.
할렘을 지날 때 그날 벨라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슬쩍 물어봤다.
"그러니까 키스까지는 했거든. 그런데 그 뒤에 기억이 없어."
"푸하!"
태호는 운전하다 그야말로 빵 터졌다.
"야! 앞차! 앞차!"
너무 웃다가 앞차를 들이 받을뻔했다. 그래도 웃음을 참지 못해 한참을 낄낄거렸다.
“전화 연락은 해?”
“한번. 그 뒤로 전화도 안 받아.”
“큭큭”
“넌 어때?”
“나 뭐?”
“그 헤나라는 한국 애.”
“아, 걔 내 고등학교 후배야. 가끔 문자 정도 주고받지.”
“일어로 쎈빠이(선배)라고 하는 뭐 그런 관계인 거냐?”
“네가 생각하는 쎈빠이가 야동에 나오는 그런 건지 아니면 어떤 관계인 건지 모르겠다.”
“불결해. 변태 같아.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지?”
“네가 쎈빠이를 꺼내서 그런 거 아니야! 그래도 난 벨라같이 예쁜 애 앞에서 잠은 안 들 거야.”
“젠장, 너 이 얘기 다른 애들한테 꺼내지 말라. 절교다.”
“알았어. 큭큭. 네 형 여자친구는 뭐 하는 사람이야?"
"레이나는 뉴욕대 의대 출신에 지금은 대학병원 신경외과 레지던트."
"수재네."
"그렇지."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 집까지 가는 거야?
“가보면 알겠지. 형이 간만에 보자고 해서 가는 거고 너도 꼭 불러달라고 해서 가는 거니.”
*
호텔에 차를 주차한 후, 택시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저녁을 먹으면서 반주를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도착을 하고 보니 아직 로이와 레이나는 도착을 하기 전이었다.
"데이비드!" 레이나로 생각되는 여자가 나와 데이비드를 보며 반갑게 인사하고 가볍게 볼 키스를 나눴다.
레이나는 165안팎의 키에 갈색 눈동자를 가졌는데 피부 톤은 백인의 것이었지만 얼핏 봐도 이목구비가 동양인 혹은 한국인과 닮았다.
“이쪽은 태호?”
레이나는 태호도 알아보며 인사했다.
“와! 만나서 정말 반가워요.”
“안녕하세요. 태호라고 합니다.”
“이름 많이 들었어요. 뉴욕 최고의 아티스트를 이렇게 만날 줄이야. 정말 반가워요.”
"로이는?" 데이비드가 물어봤다.
“로이도 거의 다 도착했어. 오늘 뉴욕에 일이 있어 나왔는데 아직 안 끝난 모양이야. 먼저 주문하고 있으라고 했으니 먼저 시키자.”
도착한 식당은 일식 퓨전 식당이었는데, 전에 데이비드가 일식은 괜찮은지 물어보기에 오케이 했더니 여기로 잡은 모양이었다.
"여기가 인기가 좋은 식당이다 보니 적어도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했어요."
태호에게 설명하듯 말하는 레이나.
회를 좋아하는 태호였기에 한국에서 잘한다는 일식집들을 많이 다녀봤다. 괜히 맨해튼에 있다고 가격만 두세배 올린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게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정식 코스 중에 하나를 시켰다.
데이비드도 얼마 되지 않아 메뉴를 골랐고, 레이나는 자기 메뉴뿐만 아니라 로이의 메뉴까지 시켰다. 처음 온 식당은 아닌 듯했다.
주문이 들어가고 얼마 후 로이가 식당에 도착했다.
“안녕, 레이나, 데이비드. 그리고 이쪽은 태호 맞죠? 첨 만나네요.”
데이비드 보다 조금 더 큰 키에 눈매가 좀 더 날카로웠고, 데이비드가 엄마를 좀 더 닮았다면 로이는 아빠를 좀 더 닮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네 사람은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병원, 학교, 집안일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기본 안부를 다 묻고 난 후에는 본격적으로 태호에게 질문이 쏟아졌다.
"Faceless의 복원작 이름을 빛의 마리아로 명명했잖아요. 왜 얼굴은 몸과 다른 방식으로 그렸는지, 어떤 사유로 그리 이름 지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나요?"
"이건 내 가정이에요. 만약 씨오(Theo)가. 아! 씨오는 Faceless를 그린 원작자예요. 물론 가명이고. 씨오가 Faceless를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그렸다면 그런 얼굴을 하지 않았을까 하고 가정하고 그렸어요. 훨씬 더 정돈되고 좀 더 고전주의 기법에 충실했을 거라는 가정을 했죠.
태호는 Faceless에 사용된 붓질과 자신의 새 작품에서의 붓질을 손가락으로 비교해 가며 차이점을 설명했다.
“씨오가 처음에 그리기 시작한 건 기본 종교화에 더 가까웠을 거예요."
"물론 Faceless의 구도가 사모트라케의 니케와도 좀 닮은 것도 있어서 그리스 여신의 얼굴이 Faceless의 얼굴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난 당시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 마리아가 원작이라고 보고 작업을 했거든요."
"둘 다 스케치를 해봤는데, 그리스 로마 시대의 비너스 상의 얼굴보다는 르네상스 시대의 성모 마리아 얼굴이 훨씬 더 잘 어울리더고요."
그래서 Faceless도 지금처럼 복원이 되었고요."
"지금 Faceless를 보면 그림에 흰색이 많이 쓰였고, 그래서 매우 그림이 밝아요. 이 때문에 씨오를 인상파 화가 중 하나로 보는 사람도 있긴 해요. 그 당시 인상파 화가가 성모 마리아에 관심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은 개인적으로는 안 들지만."
"아무튼, 그림이 밝다는 얘기는 씨오가 그림 자체를 매우 밝게 그리려고 의도가 분명히 있었다는 얘기고 그렇다면 일반적인 성모 마리아 그림보다 훨씬 밝게 그렸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 새로운 그림도 매우 밝아요. 그래서 여기서 따온 빛과 성모 마리아의 마리아를 합쳐서 빛의 마리아라고 부른 거죠.”
곧 음식이 나왔고 네 사람은 사케까지 곁들여서 음식과 술을 즐겼다. 레이나는 예술을 사랑했는데 평소 취미가 미술관 관람일 정도로 뉴욕의 많은 미술관을 다녔고, 학교에서도 교양 수업도 예술 과목들로 채웠다고 한다.
태호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마치 짝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수줍어하면서도, 대학입시 준비하는 학부모 마냥 물어보고 싶은 건 다 물어봤다. 오늘 태호를 초대한 게 레이나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칠 무렵 레이나가 눈치를 주자, 로이는 레이나 집으로 가서 2차를 하자고 제안했다. '이건 뭐지?'라는 표정으로 데이비드가 쳐다보자, 로이도 여자친구를 닮아가는지 뻔뻔하게 얘기한다.
“우리 네 명 가서 제대로 된 양주를 먹어보자고. 밸런타인 30년산을 얻은 게 있거든.”
데이비드가 ‘술도 거의 안 먹는 형이 웬 위스키?’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그리고 곧 술 좋아한다는 태호를 생각해서 산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집에 가서 뭘 하려는 거지?’라는 고민을 하다가 혹시 이거 ‘태호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밑밥 까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저 낚시질에 태호는 바로 낚였다.
“좋은 술을 준비해 두셨네요.” 반색을 하는 태호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이가 저녁 계산을 하고 넷은 택시에 나눠타고 레이나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한 곳은 맨해튼의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위치한 콘도였는데 방 하나와 거실 그리고 부엌이 있는 자그마한 콘도였다. 그냥 여자 혼자 살기엔 적당했다.
집 안의 살림을 보니 이 집은 거의 잠자고 샤워 정도 하는 용도로 보였다. 오늘은 만반의 준비를 했는지 냉장고가 각종 음료로 차 있었고 태호가 좋아하는 육포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데이비드에게 태호 취향을 물어보고 준비한 게 틀림이 없었다. 좋은 술과 안주. 태호를 관대하게 만들기 충분한 것들이었다. 그렇게 네 명은 시사, 정치, 경제 등등을 주제로 다양한 얘기를 했다.
레이나와 로이는 둘 다 신경외과 레지던트였는데 한 명은 뉴욕대 병원에 한 명은 예일대의 협력 병원에서 레지던트 생활을 했다. 둘 다 너무나도 바빠 한 달에 한 번 얼굴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둘은 현재 생활에 대해 이를 박박 갈면서도 관계는 잘도 유지하고 있었는데, 레지던트만 끝나고 나면 결혼할 계획인 것 같았다. 데이비드도 이미 둘의 관계를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눈치였다.
레이나는 혼혈이 확실했다. 얘기를 해보니 어머니가 한국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뉴욕에서 잘나가는 외과 의사였는데 젊은 시절 레이나 엄마의 외모에 빠져 한참을 구애한 끝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레이나는 나이 차이가 좀 있는 여동생도 하나 있는데 컬럼비아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있다고 한다. 집에 있는 가족사진을 통해 봐도 레이나 동생의 외모는 상당했다.
소개해 주겠다는 얘기에 데이비드가 ‘얘 얼마 전에 전 여자친구랑 깨졌어요’라고 말을 해 레이나가 많이 무안해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눈빛은 반짝였다. 마치 먹잇감을 찾은 매의 눈이었다.
잠시 엘리 생각이 난 태호는 양해를 구하고 발코니 쪽으로 향했다. 술기운이 살짝 오른 상태에서 본 뉴욕의 야경이 엘리와의 추억을 회상시키듯 너무나도 멋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밖을 보는 순간, 마침 위에서 떨어지는 물체가 있었다. 눈으로 추정되는 부위와 태호의 눈이, 마치 매트릭스에 나오는 슬로우 모션처럼, 딱 마주쳤고 아래로 푹 꺼졌다.
놀라서 내려다보니 눈 뒤로 사람의 몸과 다리가 마치 머리에 딸려 내려가는 듯 떨어지는 게 보였다. 태호가 잠시 멍한 사이 아래에서는 '퍽' 하고 마치 호박 깨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태호는 곧 뱃속 끝에서 치밀어 오르는 욕을 내뱉었다.
“FUCK!!!!!!!!!!!!!”
태호의 비명 같은 욕에 다들 놀래서 쳐다보니 태호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며 데이비드에게 다가왔다.
“태호. 왜 그래?”
“술 한 잔만 줘. 스트레이트로.”
데이비드가 준 술을 들이켜고 나서 숨을 고르고 난 후 태호는 금방 전에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로이는 베란다에서 밖을 쳐다봤지만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층이 거의 제일 꼭대기이었던 까닭이다.
로이는 레이나에게 태호를 살펴달라는 말을 하고 자신은 콘도 아래쪽으로 내려갔고, 데이비드도 따라갔다.
레이나는 태호를 옆에서 지켜보며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듯 눈동자를 살피고 손이 떨리는지 체온의 변화는 없는지를 살폈다. 그리고 집에 있는 약을 찾아봤으나 마땅한 약이 없어서 태호 옆에서 정신과 카운슬링을 하듯 차근차근 말을 걸기 시작했다.
딱 봐도 외상 후 스트레스를 받기 딱 좋은 사고였기에 레이나는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인지행동 치료부터 시작했다.
“태호 씨. 오늘 있었던 태호 씨에게 어떠한 책임도 없어요. 이번 일은 순수하게 운이 없었을 뿐이에요. 뉴욕에 공포를 느낄 이유도 없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요."
"난 의사로서 응급실에서 일하면서 자살한 사람들의 시체를 꽤 자주 봐요. 하지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게 내 잘못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냥 병원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많이 접할 기회가 있는 것 뿐이고요. 죽음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뿐이에요. 그런 것에 반응하기 시작하면 도저히 이 직업을 할 수가 없어요.”
“태호 씨. 그의 죽음을 태호 씨의 개인의 이벤트가 아닌 사회적 이벤트로 봐야 돼요. 객관화해서 봐야 될 필요가 있어요. 제3자의 위치에서 보는 것처럼 말이죠. 알았죠?”
레이나는 태호에게 계속해서 오늘 일로 인해 발생할 분노, 죄책감, 공포 등의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를 설명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로이와 데이비드가 돌아왔다.
“어떻게 되었어?”
"경찰과 앰뷸런스가 와서 수습해 갔어."
“경찰은 갔고?”
“거의 마무리된 거 보고 돌아온 거야.” 그리고 로이는 태호를 보고 말을 이었다.
“오늘 일을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모르겠군.”
“운이 없었죠. 흠 ... 한잔 더 하죠. 아까 본 걸 알코올의 힘을 빌려 머릿속에서 좀 지워야겠어요.”
태호는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세 사람에게 다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그림을 부탁하려고 불렀을 레이나를 위해 자신이 먼저 스케치북을 가져다 달라고 한 후 레이나와 로이가 오붓이 앉아 있는 모습을 스케치하고 채색까지 했다.
한 20분쯤 그림을 그린 후 그걸 두 사람에게 보여주자, 레이나가 거의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태호가 겪은 일 때문에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