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파슨스의 여왕벌1
학교에 와서 처음으로 한국 학생들과 인사를 했다. 1학년 때는 내내 엘리하고만 쏘다녀서 주위를 둘러볼 틈이 없었는데, 지금은 혼자 있다 보니 슬쩍 멍 때릴 때도 있었고, 그게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걸어볼 기회로 비쳤나 보다.
다른 한국 학생들도 우물쭈물하며 뭔가 더 말을 걸어보려고 하는 듯 보였지만, 때 마침 전화가 와 자연스럽게 웃으며 인사하고 바로 전화를 받았다. 데이비드의 전화였다.
“어 데이비드. 전화를 다 주고 왠일이야? 지금 방에 가는 길이었는데?”
“주말에 뉴욕 갈래?"
“뭐가 있는데?”
“파슨스.”
“파슨스? 누가 엮은 거야?”
“조지오. 걔 사촌이 거기 학생인데, 졸업전에 정말 괜찮은 남자를 구경하고 싶데. 밥 먹고 나이트 코스.”
“우리가 괜찮은 남자는 아니지 않나? 그냥 너드 (Nerd, 괴짜) 나 긱 (Geek, 괴짜) 아니야?”
“거긴 게이 가이 (Gay Guy, 동성애자)들만 버글거린다더군. 흐흐”
태호는 거절을 할까 했는데 엘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극으로 받은 게 있다 보니 가보고 싶기도 했다. 나이트클럽에 가본 적도 없었기도 했고. 서울에서나 뉴욕에서나 말이다.
“잠은 어떻게 자는 거야? 거기 학생들 기숙사 생활하지 않아? 호텔 잡아야 되니?”
“아, 조지오 사촌이 쓰는 아파트가 있는데 거기서 저녁에 놀다가 잔다던데?”
“가도 괜찮은 거야? 무슨 이탈리아 마피아와 뉴욕 마피아, 다 만나 보는 거 아니야?”
“보고 아니다 싶으면 내 빼면 되지. 아무튼 너도 가는 거다.”
*
토요일 오후 3시 정도에 정말 6명이 태호 차에 끼여 타고 겨우겨우 뉴욕 맨해튼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도를 따라 들어간 곳은 어퍼이스트사이드의 신축 아파트였다.
"오늘 호스트 이름은 뭐야?"
"벨라!"
조지오가 지하에서 연락을 한 후 10분쯤 후에 어슬렁 어슬렁 나타난 벨라는 떡진 머리에 프라다 점퍼와 실크 소재의 잠옷 바지. 거기에 구찌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민 얼굴은 보여주기는 싫었는지 샤넬 선글라스로 얼굴 전체를 덮다시피 하고 나왔다.
조지오는 친구들 앞에 대충 나타난 사촌을 이탈리아어로 강하게 나무라는 거 같았지만 벨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검지만 까닥이며 들어오라고 했다. 일행은 서로의 얼굴을 보며 이걸 들어가 말아 고민하다 조지오가 들어가자 따라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고 꽤 올라간다 생각했는데 도착한 곳은 최고층이었다. 태호와 데이비드가 쓰는 기숙사 방 크기의 두 배가 이 집의 거실 사이즈였고, 기숙사 방 크기의 방이 2개가 더 있고 그보다 살짝 작은방이 하나 더 있었다.
부엌도 무지하게 컸는데 모든 가전이 완벽히 갖춰진 풀 퍼니싱 (Full furnishing 혹은 풀옵션) 집인 듯했다. 3베드 (방 3개)의 펜션 하우스라니, 태호는 이 집 렌트비가 계산이 안되었다.
얼마 전까지 자기가 맨해튼에서 지낸 별로 크지도 않은 투 베드 (방 2개) 아파트의 월세가 얼마인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나 좀 씻고 나올게. 앉아 있지만 말고 집 좀 치워봐!”라며 안방의 샤워실로 들어가 버리는 벨라를 보며 조지오는 화가 난 듯 보였다. 하지만 곧 체념한 듯 돌아서서 말했다.
“미안 친구들. 얘가 미국 오래 있다 보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사나 봐.”라며 에둘러 벨라를 두둔했다.
집은 한동안 제대로 안 치운게 분명했다. 딱 봐도 고급스러운 소가죽 소파는, 한쪽은 먼지로 살짝 덮여 있었는데, 사람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곳은 그러했다.
식탁도 어제 먹고 안 치운 맥주병과 피자 케이스가 널려 있었고, 거기에는 먹다 남은 피자 조각에 덤으로 담배꽁초도 있었다.
바닥도 빵 부스러기와 흘린 피자 소스에 말라비틀어진 파인애플 조각까지 있어서 벨라의 주식이 뭔지 쉽게 짐작이 되었다. 신축이라 개미는 없는 듯했다. 아니었으면 파블로의 곤충기 - 개미 편을 라이브로 볼 수 있었을거다.
싱크대는 깨끗했는데 세제나 행주 같은 게 없는 걸로 봐서는 집에서는 전혀 밥을 안 해먹고 다닌 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열어본 냉장고는 거실 바닥과는 다르게 매우 깨끗했다. 어떻게 집에 생수 하나 없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남자 여섯이 여자 집 청소해 주는 게 우습긴 했지만 유스케가 부엌 근처 바닥에 굴러다니는 비닐봉지 몇 개를 주워봐 쓰레기는 대충 담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소파에 대충 쭉 둘러앉아 ESPN NCAA 대학 농구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당연히 응원하는 팀은 다 달랐다. 예일대 농구팀 경기를 ESPN을 해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길 30분, 청소하라며 오더를 내리시고 샤워를 하러 들어가신 벨라 양은 정말 꽃단장을 하고 나왔다.
170은 되어 보이는 키. 선글라스로 얼굴을 다 가릴 수 있었던 이유가 주먹만 한 얼굴 사이즈에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작은 얼굴. 녹색과 파란색이 섞인 요요로운 눈동자.
오드리 헵번을 연상시키는 이목구비. 오드리 헵번에 비해서는 눈썹은 좀 더 짙었으며, 입술은 작지만 앤젤리나 졸리의 것과 같이 육감적이었다.
어떻게 저 작은 얼굴에 완벽한 밸런싱을 가진 눈 코 입을 오밀조밀하게 잘 배치해 넣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비너스상에서 볼 수 있는 시뇽 (올린 머리)에 아기 피부같이 뽀얗지만 혈색이 도는 피부도 벨라의 매력을 한껏 업 시키고 있었다.
거기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세하게 코디한 명품들은 그녀의 세련된 취향을 뇌리 깊게 새길 수 있었다.
그런 벨라를 본 순간 조지아를 뺀 5명의 남자들 사이에 눈치 보기가 시작되었다. 유스케는 ‘내 취향 아님’이라는 표정으로 눈을 피했고, 파블로는 아쉬운 표정으로 고사했으며, 태호는 ‘나는 이별 중’이라는 기색을 내비쳤고, 세토스는 알듯 말듯 한 표정이었는데 순종적인 여자가 아니면 답이 없는 이 인간은 나머지가 알아서 탈락시켰다. 그리고 보니 남은 건 데이비드이었는데, 이 녀석 표정도 알쏭달쏭했다.
벨라의 외모만 보면야 삼고초려를 해야 할 판이지만 첫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딱 봐도 유지비가 많이 들 거 같은 여자인데다가, 성격도 꽤 피곤할 것 같아서 사귀다 보면 유지비 만큼의 정신과 치료비도 요구될 것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벨라 전담은 나머지 5명에 의해 데이비드로 낙점이 되었고 데이비드도 빠르게 체념했다. 이 녀석, 성격이 좋아서 폭탄 제거반으로 제격이다.
청소를 하고 옹기종기 앉아있는 6명의 남자가 귀여웠던지 벨라는 씩 웃더니, “누가 나 좀 도와줄 수 있어?”라며 유혹하듯 물었다.
남자 5명이 짠 듯이 데이비드를 쳐다봤고, 데이비드는 "어? 어"라며 엉거주춤 일어나 벨라에게 다가갔다.
벨라는 평소에 안 했던 집안일을 몸종 득템 기념으로 일을 좀 하려는 듯 냉장고에 물 채우는 것부터 시작해서 가구 재배치까지, 데이비드를 데리고 다니며 하나 둘 일을 시켰다.
보통 이런 집은 청소는 물론 이불 세탁까지 정기적으로 외부 업체에서 해주기 때문에 특별히 할 일이 많은 집이 아님에도 벨라는 계속 데이비드를 데리고 다니면서 일을 시켰다.
나중에는 좀 즐기는 듯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나머지 남자 다섯은 모르는 척했다.
벨라와 데이비드가 마님-몸종 놀이를 한지 20분, 현관 쪽에서 문 여는 소리가 나더니 여러 명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 우리 왔어.”
"왠 신발이 이리 많아?”
“남자 신발인데?”
입구부터 시끄럽게 하고 들어온 건 네 명의 여자였는데, 동양인으로 보이는 여자 두 명에 미국 애처럼 보이는 여자애 두 명이었다. 태호의 눈에는 중국하고 한국으로 국적까지 구별이 가능했지만 중국인으로 보이는 한국인도 적지 않은 만큼 확인 작업은 거쳐야 했다.
“세상에나.”
“가짜 아니지? 진짜 남자지?”
자기들끼리 입을 가리고 얘기를 하지만 앞에서 다 들리니 의미 없는 행동들이었다. 어찌 되었던 6명의 남자와 5명의 여자는 거실에서 편하지 않은 첫 대면을 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이 어색함을 깬 건 벨라였다. 물론 무성의했지만.
“여긴 아이린, 비비안, 헤나, 조안. 그리고 여긴 내 사촌 조지아.” 벨라는 조지아에게 너도 소개하라는 듯 쳐다봤다.
아이린은 중국 묘족처럼 보였는데, 키는 160대 초반에 젊은 시절 장만옥을 연상시키는 미녀였다.
비비안은 전형적인 게르만족처럼 보였는데 노란 금발에 파란 눈동자에 키는 180 정도는 되어 보였다. 큰 눈에 큰 코, 큼지막한 입은 젊은 시절 줄리아 로버츠를 연상시키는 외모였다.
헤나는 키는 아이린보다 조금 더 컸고 쌍꺼풀이 없지만 큰 눈이 매력적이었다. 마치 걸그룹의 막내 느낌이 나는 귀여운 이미지를 가졌다.
조안은 벨라보다는 좀 작은 키에, 만약 영화 '연인'의 제인 마치가 입이 살짝 덜 돌출되고 나이를 5살 정도 더 먹으면 저런 외모를 가지지 않을까 싶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온 유스케, 멕시코에서 온 파블로, 한국에서 온 태호, 이집트에서 온 세토스, 저쪽은 롱아일랜드에서 온 데이비드." 조지아는 상냥하게도 출신지까지 알려줬다.
확실히 인기남은 데이비드이었다. 롱아일랜드가 나오자 미국 여자 둘의 눈빛이 바뀌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태호를 소개할 때 헤나라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자애의 눈빛이 살짝 바뀐 것 같기도 했고, 홍콩 아니면 대만 애로 보이는 아이린은 조지아에게 관심을 보였다.
“신사 여러분들께서 저녁을 사신다면 그 뒤는 우리 가녀린 소녀들이 살 거야. 오케이?” 벨라가 말했다.
태호에게는 그냥 다 너희들이 내라는 얘기처럼 들렸지만 말이다. 태호 포함 5명의 남자는 조지아를 쳐다봤는데, 조지아는 바로 벨라에게 세부 계획을 요청했다.
“우린 뉴욕을 잘 알지도 못하고, 네가 무슨 스케줄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니까, 오늘 계획을 알려주겠어?”
“저녁은 메디슨 스퀘어 공원 근처의 일레븐 메디슨 파크 식당으로 예약했어. 그 후 클럽은 미라지. 브루클린에 있고. 다들 차는 여기에 두고 가고.”
“둘 다 모르는 곳이군. 일단 너와 내 카드를 쓰고 나중에 정산하는 것을 하지. 어때?"
“좋아.”
“잠은?”
“알아서들. 눈 맞으면 알아서 배 맞추러 가. 관심 없으면 여기로 돌아와서 자면 되고. 단 이 집에서는 하지는 마!”
그 뒤, 남자들은 소파에서 NCAA를, 여자들은 식탁에 앉아 남자들 외모에 대한 품평회를 하며 5시 반까지 시간을 보낸 후 11명은 택시 4대에 나눠타고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은 벨라의 이름으로 예약된 룸이 있었다. 벨라-데이빗-태호-헤나-세토스-비비안, 조지아-아이린-파블로-조안-유스케로 테이블이 나뉘었다.
벨라는 미리 계획이 있었던 듯 바로 테이블을 지정해 주는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으며 큰 테이블이 붙여져 있어서 크게 의미가 없었기도 했다.
얼마 후 웨이터 2명이 들어와서 물을 따르고 주문을 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자 주문들 해. 이 식당은 프랑스 요리 기반의 컨템퍼러리 요리가 메인이니까 보고 주문하고. 보다가 잘 모르겠으면 내 주문 따라 해도 되고.”
벨라가 호스트로서 메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