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뉴욕 생활2
윌슨은 바로 태호의 핸드폰에 전화했지만 받지를 않기에 미술관 근처의 센트럴 파크로 향했다. 넓디넓은 센트럴 파크지만 태호가 좋아하는 장소는 미술관 옆 저수지였다.
저수지 위로 보이는 뉴욕의 고층건물과 저수지 옆 트랙을 도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벤치에 앉아 있는 시간을 태호는 매우 즐겼다. 그렇기에 윌슨도 '호수 주위를 한 바퀴 돌면 찾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에 저수지 주위를 돌았다. 곧 운동화를 신고 오지 않을 것을 후회하긴 했지만.
다행히 후회가 짜증으로 바뀌기 전에 벤치에 앉아 있는 태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태호가 윌슨을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어 자신을 알렸기에, 윌슨은 환한 미소로 태호를 반겼다.
"윌슨 아저씨가 여기까지는 왜 오셨어요? 미술관에서 전화 했나 봐요?"
"제이슨이 네 걱정을 많이 하더라."
"완성 못할까 걱정이겠죠."
"하하 그것도 맞아. 혹시 어디가 아픈 거니? 여기 앉아 있는 걸 보니 딱히 아파 보이지는 않는다만."
"문제가 있긴 해요. 그게... 떠오르지가 않아요."
"뭐가 안 떠오른다는 거니?"
"그 눈빛이오. 그림을 그릴수록 그 여신을 본듯한 생각이 드는데, 그 눈빛이 기억이 나질 않아요."
"느껴지는 감정은 어떤 것인지 기억나?"
한참을 생각하던 태호는 입을 열었다.
"빛이 매우 밝아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어요."
곰곰이 같이 고민을 하던 윌슨은 한참 뒤 말을 이었다.
“불행히도 걱정하는 눈빛 중에 제일 안쓰러운 건 아픈 자식을 쳐다보는 부모의 눈빛이야. 아마 태호는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를 거야.”
윌슨은 태호를 이끌고 근처에 있는 크라비츠 어린이 병원에 갔다. 거기서 아픈 아이들을 이끌고 온 부모들의 다양한 눈동자와, 또 자녀의 병이 나아 기뻐하는 부모들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태호는 자신이 꿈속에서 봤던 여신의 눈동자와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다.
그렇게 윌슨과 병원에서 지나가던 사람들을 쳐다보던 태호는, 윌슨이 떠난 이후에도 3시간을 넘게 앉아있다가 미술관으로 향했다.
감을 잡은 태호가 윌슨에게 눈동자에 대한 감을 잡았다고 연락을 했고, 윌슨은 제이슨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태호가 그림을 마무리하려고 하니 관객들이 있으면 준비를 하라는 충고도 잊지 않았다.
병원에서 미술관까지 15분 거리지만 태호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공원의 호수를 둘러서 갔다.
미술관에 도착하고 안에 들어가자 일층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태호를 향했다. 모두가 기대에 찬 눈빛이었다. 역사적 순간을 맞이하는 것 같은 희열도 엿보였다.
그림 앞에 선 태호는 오늘 봤던 느낌을 담아 그 자리에서 천천히 그리고 세심하게 눈동자를 완성시켰다. 그 눈빛은 다리가 아픈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눈빛이었으며, 그 아픈 아이가 두 다리로 스스로 일어섰을 때 이를 지켜보던 부모의 기쁨도 담긴,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복잡한 감정이 담겨있었다.
피에타의 성모 마리아가 아들 예수를 바라보며 짓던 눈빛도 닮아 있었고 다빈치의 성모가 아기 예수를 보며 짓던 눈빛도 들어 있었다. 태호는 붓을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환히 웃어 보였다.
"와, 드디어 완성이다!"
"Faceless가 재 탄생했다."
"휘~휙"
"드디어!!!"
그 순간 마스터스에서 마지막 어프로치 샷으로 이글을 잡아 우승을 확정 지은 골퍼에게 할만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 함성을 들은 다른 관객들도 다른 전시실에서 달려와 왜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는지 알아보기 위해 듣고 같이 함성을 질렀다.
조용했던 미술관은 후끈 달아올라 명작의 성공적인 복원 아니 재탄생을 반겼고 그 소식은 빠르게 뉴욕으로 퍼져나갔다.
그날 저녁 뉴욕뿐만 아니라 미국 전국 뉴스에도 Faceless의 진정한 재탄생에 대한 뉴스와 태호의 인터뷰가 올라왔다.
언론은 Faceless의 새로운 얼굴에 담긴 눈빛을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와 견줄만한 것으로 포장하며 미국이 드디어 세계적인 명작을 가지게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발표했다.
작품을 그리기 시작한 지 2달이 채 안 된 8월 셋째 주 어느 날의 일이었다.
*
빛의 마리아 V는 여러 면에서 신비로웠다.
사람들은 곧 Faceless 와 빛의 마리아 V를 비교했다.
곧 Faceless는 죽어있는 그림이고 빛의 마리아 V가 살아있는 그림이라는 데 쉽게 동의했다.
보는이마다 Faceless의 원작이 있다면 빛의 마리아 V 일거라는 데에 동의했다.
특히 저 살아있는 눈빛이 관객의 마음에 새긴 듯이 자리 잡았다.
그림에서 빛이 났다. 하늘의 여신을 붙잡아 그림에 가둔 듯하기도 했다.
그림 앞에 서면 여신이 두 팔로 관객을 붙잡고 따듯한 말을 건넬 것 같기도 했다.
우연히 사람이 없을 때 그림 앞에선 많은 이들이 특별한 경험을 했다.
몇 명은 실제로 그림이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고 느꼈고 이는 인터뷰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다.
이런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자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이 늘었고 그림 앞에서 단 10초라도 홀로 온전히 그림을 관람하고 싶어 했다.
미술관 내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이는 곧 관람객들의 방해로 이어져 미술관을 골머리 아프게 했다.
결국 미술관은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작품 보호를 위해 추가 가드를 고용하고 특정 시간대에 홀로 그림을 구경할 수 있는 이벤트를 마련했다.
개관 직후 30명, 폐관 직전 30명이 45초 이상 그림을 홀로 즐길 수 있었다.
그러다가 이상한 소문까지 돌았다. 병이 나았느니 소원이 이루어졌느니 하는 뜬 소문들이었다.
그러자 외국 정상들이 뉴욕을 방문하면 꼭 찾는 명소가 되어버렸다. 미술관에서는 난색을 표했지만 외국 정상이 보고 싶어하고 국무부에서도 읍소를 하는 통에 폐관 이후 공개했다.
태호가 저 눈동자를 그리는데 꽤 애를 먹었다는 얘기는 이미 신화처럼 뉴욕에 퍼졌다.
*
태호는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미국 예술계를 이끌어갈 차세대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동양인이지만 새하얀 피부 톤과 큰 키, 호리호리한 체격은 당장 런웨이에 올려놔도 괜찮을 만한 비주얼이었고 인종에서 오는 핸디캡을 상쇄시켰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는 뒷모습까지도 섹시하다’라는 평을 내놓으며 태호에 대한 관심을 부채질했다.
모델이나 광고 제안을 하고 싶어 하는 에이전시들은 많았지만 태호와 연락이 닿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윌슨이 다 차단했기 때문이다.
*
뉴욕에서 나오는 빛의 마리아와 태호에 대한 기사는 다음날 바다 건너 프랑스에서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눈동자를 그리지 못해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고 극적으로 완성한 눈동자는 마치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신비롭고 아름답다'는 소식은 영웅이 역경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하는 것처럼 극적이었다.
지금까지 프랑스는 Faceless가 미국에 있는 것에 대해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그러다가 한 동양인이 Faceless를 완성시켰다는 소식이 나오자 뜻밖에도 환호했다.
이는 르몽드의 기자 미셸 게린이 뉴욕까지 날아가 딴 인터뷰가 원인이었다. 유창한 불어로 2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태호는 진심을 담아 프랑스 문화에 대해 찬양했다.
프랑스 국민을 위해 빛의 마리아를 제작해 줄 수 있냐는 예상외 질문에도 루브르 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다면 제작하겠다고 화답했다.
이 소식에 모두가 환호한 것은 아니었다. 파리에 있던 엘리는 자신이 파리에 있던 사이 연인인 태호가 그림을 완성 못해 한참을 전전 긍긍했다는 것을 알고 난 후 흐르는 눈물을 주체 하지 못했다.
바로 전화를 걸어보니 통화 중이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엘리는 이틀 뒤에 있을 패션쇼를 취소하고 뉴욕으로 날아가기 위해 에이전트에게 연락을 했다. 엘리가 사정을 설명하자 에이전트는 다른 말로 엘리를 달랬다.
“엘리. 이틀 뒤에 있을 쇼는 너의 파리 톱 티어 패션쇼의 데뷔 무대이자 뉴욕이나 런던에서 네가 섰던 어떤 무대와도 비교가 안되는 큰 무대야. 이 쇼의 결과에 따라 네가 광고와 영화에 진출할 기회가 열려."
"이 세상의 그 어떤 프로페셔널도 이틀 남은 쇼를 앞에 두고 무책임하게 남자친구를 보러 사라지지 않아. 그건 네 남자친구도 원하지 않을 거야. 이건 장담할 수 있어.”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엘리는 태호와 통화를 시도하는 한편 연락이 안 되자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20분 후 드디어 태호에게 전화가 왔다. 전화를 받자마자 울음을 터트린 엘리와 그 목소리를 듣고 놀란 태호가 오히려 엘리를 달랬다.
“네 에이전트 말이 맞아. 사실 내가 가봐야 되는데··· 정말 중요한 무대잖아. 내가 가볼 테니까 에이전트에게 자리하나 마련해 달라고 할래?”
엘리는 정말로 기뻐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엘리의 에이전트는 태호에게 런웨이 위치와 시간 등을 보냈다. 이를 받은 태호는 미술관 측에 4일 정도의 휴식을 통보하고 비행기 표를 끊어 바로 파리로 날아갔다.
*
파리에 아침에 도착한 태호는 호텔만 잡아 지난번 구매한 아르마니 정장으로 갈아입고 오후 4시에 있는 샤넬 패션쇼를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꽃다발이라도 사서 들고 가야 되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돼 호텔 컨시어지에 꽃값과 팁을 잔뜩 안기고 4시 30분 경에 꽃을 배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잘은 기억이 안 나지만 패션쇼가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실제 패션쇼는 1시간이면 충분하다.
에이전시가 보낸 좌석의 위치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 앉는 런웨이 뒤쪽 자리지만 중간에 빠져나가야 되는 태호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좀 더 기다리자 무대 불이 꺼지고 경쾌한 음악이 울리면서 무대는 시작되었다. 태호는 샤넬 브랜드를 좋아하지만 오랜 비행시간과 이동으로 상당히 피곤해 다른 모델들이나 옷은 눈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엘리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10분쯤 기다리자 엘리가 안쪽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엘리의 워킹이 시작되었다.
엘리의 워킹은 다른 모델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걷는 워킹이었다. 다른 모델들은 몸을 뒤로 젖히는 듯한 느낌으로 다리 보폭도 넓게 한 마치 X자로 걷는 워킹이었다면 엘리의 워킹은 마치 일(I)자로 그어놓은 선을 밟고 앞으로만 쭉 이동하는 워킹이었다.
태호는 엘리의 워킹이 정석이고, 앞의 모델들은 마치 스트립바에 막 등장하는 쇼걸처럼 느껴졌다. 엘리의 뒤에 있는 모델들도 X자 크기가 크냐 작냐의 문제일 뿐 비슷한 워킹을 선보여 태호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3차례 엘리의 워킹을 본 태호는 밖으로 이동해 꽃을 들고 대기 중인 심부름꾼을 확인하고 꽃을 건네 받았다. 그리고 곧 무대 뒤로 건너가 엘리의 에이전트를 만날 수 있었다.
“애나 신가요?"
“혹시 누구신지?”
“태호입니다. 엘리 친구죠.”
“아, 오셨군요. 정말 오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요. 아직 무대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모델들 옷을 갈아입어야 되어서요."
“알겠습니다. 여기서 기다리면 될까요?”
“네, 그러세요.”
동양인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애나였지만 지금 앞에 온 태호라는 남자는 정말 특별하게 느껴졌다. 아르마니 정장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는 오래간만에 본 것 같았다. 아르마니 패션쇼를 시즌마다 빠지지 않고 보는데도 말이다.
능력과 외모.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여자친구를 보겠다고 새벽 비행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 오다니 얼마나 로맨틱한가?
거기다가 지금 쓰는 프랑스어는 분명히 파리지앵의 발음이었다. 아무리 엘리랑 1년간 붙어 다녔다고는 하지만 '불어를 배우는 게 저리 쉬운 건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많은 것이 신비로운 남자였다.
드디어 무대가 끝나고 디자이너들의 인사까지 끝난 다음 시간이 지나자 모델들이 하나 둘 옷을 갈아입고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애나.” 약간은 기운이 없는 목소리로 애나를 찾는 엘리.
애나에게 다가오는 엘리는 표정이 밝지만은 않았는데, 다른 모델들이 쌩쌩하게 나오는 것과 비교하면 대조적이었다.
“엘리!”
태호가 엘리를 부르자 그제서야 태호가 여기 있는 걸 안 엘리가 소리를 치며 태호에게 안겨왔다. 엘리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지만 뉴욕에서 하듯 태호를 보자마자 뜨겁게 키스를 했다. 그 후 꽃다발까지 전하자 그제서야 전처럼 환하게 웃는 엘리였다.
“와줘서 고마워.”
“늦게 와서 미안해. 나도 멍청하게 직접 올 생각을 못 했지 뭐야.”
“바쁘니까 그렇지. 그림 완성했다는 소식은 나도 기사로 봤어. 2주 동안 고생했다는 기사를 읽고 내가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엘리의 두 눈은 다시 눈물이 글썽였다. 눈물짓는 표정에서 엘리의 그늘이 느껴졌다. 무언가 자신에게 숨기는 것이 있었다.
“무대는 끝났는데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은 거야?”
엘리는 눈물을 닦은 후 주위를 한번 살펴보더니 태호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여기서 할 얘기는 아니니까, 우리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