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뉴욕 생활1
기대가 큰 만큼 미술관에서는 태호가 작업하기 쉽고 관람객들도 다른 작품들을 관람하기 쉽도록 작업을 미술관 입구 근처에서 하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Faceless가 걸린 전시실에서 해왔던 작업이었다.
Faceless도 전시실에서 나와 태호의 작업 공간 근처에 전시가 되었다. 태호가 Faceless를 참조하면서 빛의 마리아 V를 작업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전동 이젤이 준비되고 그 앞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앉을 수 있는 간이 의자 수십 개가 놓여있었다. 가드도 세 명이나 추가 고용되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태호는 벌써 네 번이나 거의 같은 그림을 그렸기에 거침없이 붓질을 했다. 뒤의 관객들은 가끔 '오'라는 탄성을 지르며 태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일인 연극 무대를 같았다.
Wet on Wet (알라 프라마)으로 그린다고 해도 Faceless와 똑같은 질감을 내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건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태호도 이를 잘 알기에 물감의 건조시간까지 최대한 고려하여 작업을 했다.
채색이 들어가기 전, 미술관 측은 태호와 협의를 한끝에, 유화 물감은 결국 현재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물감을 이용하기로 결론이 났다.
Faceless의 원작자가 사용한 물감은 납의 오남용은 차치하고 색상이나 보관성 측면에서도 결코 좋은 품질은 아니었기에 미술관에서는 당시 물감의 색상을 닮은 가장 최근의 물감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태호는 여기서 좀 더 작업 속도를 올리는 방법을 궁리했다. 기본적으로는 원작자가 그린 순서를 따랐지만, 필요하다면 색상과 질감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좀 더 과감하게 채색을 해나갔다.
태호의 붓질은 과감하면서도 적절해서 마치 태호가 Faceless의 원작자인 듯한 착각을 줄 정도였다.
몇 번의 터치로 여신의 황금빛 머릿결은 다시 빛이 났고 투명한 피부에 소녀 피부 같은 촉촉함이 살아났다. 또 다른 붓질로 옷 주름은 바람에 펄럭였고, 얼굴 주위로 공기가 돌아 여신이 다시 숨을 쉴 거 같았다.
여신의 가슴에는 따뜻한 피가 흐르고 태호를 향해 뻗은 두 손은 태호를 감싸 안을 듯이 배려와 사랑이 넘쳐 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따뜻했다. 여기서 전달되는 감정은 원작보다 훨씬 더 충만했고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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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거침없이 붓질을 하는 태호의 얘기는 금세 뉴욕에 퍼졌다. 날이 지날수록 태호 뒤에서 그림을 지켜보는 관객들은 늘어났다. 그리고 태호 근처에 늘 있는 엘리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매일같이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태호를 지켜보거나 책을 읽는 미녀를 기억 못 한다는 게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태호가 그림에서 잠시 멀어져 휴식을 취하러 갈 때 저쪽에서 태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였다. 일이 있어 파리로 잠시 돌아갔던 엘리는 태호가 ‘청담동 룩’이라 부르며 사준 샤넬 실크 트위드 정장의 여름 버전을 입고 다가왔다.
베이지 색 반팔 정장과 무릎까지 오는 스커트로 구성된 정장은 여름 결혼식 하객 옷 차림처럼 보였다.
이젠 성숙한 여인의 아름다움이 향기처럼 퍼지는 엘리의 등장에 관람객과 관광객들의 눈도 휙 하니 돌아갔다. 둘이 끌어안고 뜨거운 키스를 나누자 ‘휘휘’ 하는 휘파람 소리와 함성에 나중에는 박수까지 치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잘 갔다 왔어? 마중 못 나가서 미안.”
“바쁜 거 뻔히 아는데 뭘. 신경 안 써도 돼. 그림은 얼마나 그린 거야?”
“채색 들어갔어. 프랑스에서 일은 어떻게 되었어?”
“글쎄, 어떻게 되었을까?” 웃으며 말하는 엘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다시 키스를 한 태호.
둘은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미술관을 빠져나가 커피숍으로 향했다. 마침 태호를 찍기 위해 자리에 있던 NBC 방송국과 관광객들은 그 장면을 찍어갔다.
그날 NBC는 태호의 작품 제작 과정을 한 꼭지로 방송을 했다. 태호와 엘리의 키스 장면은 뉴욕이 한 타블로이드에 났는데 엘리의 정면 사진까지 어디서 찍었는지 같이 신문에 났다. 그 다음날에는 엘리의 프로파일마저 떴는데 뉴욕은 갑자기 등장한 프랑스 미녀에게 열광했다.
174cm의 키와 시원스레 뻗은 팔 다리. 라붐을 찍었던 시절의 소피 마르소를 연상시키는 얼굴형과 선한 듯하면서도 개성 있는 눈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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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뉴욕에 알려질수록, 엘리에 대한 궁금증도 커져갔다. 미스 프랑스 출신이라는 걸 안 방송과 패션쇼 등에서 콜이 이어졌다.
특히 사진에 찍힌 샤넬의 옷 때문인지 샤넬에서 열심히 엘리에게 구애를 보냈는데, 미스 프랑스 출신이긴 하지만 모델 이력도 없고 셀레브리티도 아닌 엘리에게 모델과 화보를 제안해온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었다.
미스 프랑스에 나갈 정도로 당찬 구석도 있고 성공에 대한 욕망도 있는 엘리는 이들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둘이 세운 본래의 계획은 태호 근처에서 엘리는 계속 외교관 시험을 준비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게 태호는 방학 내내 그림만을 그려야 하기에 엘리가 따로 할만한 일은 외교관 시험 준비 이외에는 없었기도 했다. 그런데 파리에서도 없었던 기회가 뉴욕에서 덜컥 생겨버리니 이걸 잡아야 하는지 갈등이 생기는 것이었다.
"기회가 생겼을 때 잡아. 그게 더 나를 위한 일이야. 내 걱정은 말고."
태호는 엘리의 등을 떠밀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끔 했다. 나이도 어린 자신과 엘리가 서로에게 얽매여 정작 인생의 기회가 왔는데도 놓친다면 이것도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태호는 엘리가 외교관이 되어 세계를 누비던, 셀럽이 되어 화려한 경력을 만들던, 자신과 나중에 결혼해 알콩달콩 살던, 지금은 지금의 일에 충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미안해서 그래. 뉴욕에 있는 동안 내가 계속 옆에 있었주겠다고 약속 했는데..."
"아니야. 꼼짝없이 뉴욕에 붙어 있으라고 한건 내 욕심이었어.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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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는 뉴욕에서 에이전시 업체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아 뉴욕에서만 찍던 화보와 광고도 런던과 파리까지 날아가 찍게 되었다.
엘리가 유명해짐에 따라 에이전트는 야심 차게 엘리를 톱 모델로 포장했고 유럽 데뷔도 성공시켰다. 그리고 태호와 엘리가 같이 있는 시간은 점점 더 줄어만 갔다
에이전시는 나중에는 방송과 영화에도 진출을 시도했다. 엘리의 마스크가 유럽인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듯했다. 점점 줄어만 가는 엘리와의 통화시간을 통해 얻은 정보였기에 뒤에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는지는 모르지만, 엘리의 목소리는 매우 활기찼고 그럼에도 태호를 그리워했다. 태호는 그걸로 만족하고 그림에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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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완성되어 갈수록, 태호의 머리에는 원작이 그려지던 당시로 보이는 작업실의 풍경들과 Theo의 뒷모습이 점점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원작의 색감도 떠올라 작업에 큰 도움이 되었지만, 갈수록 선명해지는 감정은 태호의 당황하게 했다. Faceless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그 감정들이, 물속에 있던 거대 잠수함이 물 위로 올라오는 것처럼, 크게 물결치며 올라왔다.
그럴 때마다 태호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근처에 마련된 팔걸이의자에 앉아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전작들을 그릴 때는 이런 감정의 기복이 없었는데 이번 작품은 뭔가 매우 특별했다.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작업을 하던 태호를 결정적으로 흔들어 놓은 건 작품의 마지막 단계인 눈이었다.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빛이 마리아 전작들을 그릴 때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태호는 눈만 남겨 놓고 다른 부분부터 마무리를 시켰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전작들의 눈은 진짜 Faceless 원작의 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눈은 피해서 다른 부분 작업부터 마무리했다. 시간이 지나자 빛의 마리아 V는 화룡점정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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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출근은 했지만 오늘도 Faceless만 쳐다볼 뿐 작업은 진행하지 않았다. 벌써 열흘째. 관람객 들도 태호의 작품을 지나쳐가면서 쳐다볼 뿐 위의 의자에 앉아 있는 관객들은 적었다. 간혹 다리가 아파 앉아있는 외국인 관람객 정도만 보였다.
생각이 많아져 늦잠을 잤던 태호는 Faceless 앞에서 깜빡 졸았다. 그 순간 눈을 찌르듯 다가온 여신과 Theo의 눈빛이 보였다.
백내장으로 뿌연 왼쪽 눈과 거의 멀어 보이는 오른쪽 눈에서 보이는 회환, 그리고 그를 불쌍하게 또 가련하게 쳐다보는 슬픔이 담긴 눈빛과, 이제 무거운 육신의 짐을 벗고 나와 함께 하늘로 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와 기쁨이 교차하는 여신의 눈빛은, 감정이 부족한 신의 눈빛이 아니라 분명한 사람의 눈빛이었으며, Theo를 하늘에서도 걱정하던 그의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그 상반되는 감정에 순간 압도당했던 태호는 바로 정신을 다잡고 자신이 본 눈빛을 떠올렸다. 기억이 날듯 하다가도 사라지는 기억에 태호는 붓을 내려놓고 한참을 다시 Faceless을 들여다봤지만 다시 선명히 떠오르지는 않았다.
할 수 없이 남아 있는 기억이라도 그리려 근처에 있던 스케치북에 기억을 한참을 더듬어가며 스케치를 해갔다. 하나 둘 그려갈수록 생각이 정리되기는커녕 자신이 뭘 본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태호는 붓을 완전히 내려놓고 빌바오 미술관은 물론 근처를 돌아다니며 자신이 본 눈빛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미술관을 자주 찾는 관객들도 태호가 눈동자를 그리는 것을 주저한다는 알게 되었다. 점점 태호가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늘어갔다. 의자에 앉아 있어도 멍하니 Faceless를 쳐다볼 뿐 작업을 재개하지는 않았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다는 얘기가 뉴욕에 퍼졌다. 하지만 정작 마지막을 완성해야 할 두 눈동자만은 남겨놓아 누가 봐도 미완성인 작품이었다.
이 그림의 완성을 위해 오랜 기간을 기다려 온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정작 작가는 자리를 비우고 나타나지를 않으니 미술관 전체가 걱정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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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오늘은 미술관에도 안 오는군."
"좀 더 기다려 봐. 동양에는 화룡점정이라는 말이 있다더군. 눈동자를 그리자 그림 속의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얘기인데, 그만큼 작품에서 눈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겠어?"
"오랜만에 들어보는 얘기야. 하지만 이제는 완성을 해야 될 때가 되었어. 지금까지 그려놓은 작품에 내가 눈동자를 그려도 여기 이사진들은 두 손들고 만세를 부를 거야. 우린 너무 오래 이 순간을 기다렸거든. 지금의 빛의 마리아는 정말 Faceless의 원본처럼 보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고. 재촉해서 될 일도 아니잖아."
"알아. 사실 지금까지 기다린 시간에 비해서는 너무나도 짧은 순간이라는걸. 너도 알겠지만 미술관의 임원진 와 갤러리들뿐만 아니라 뉴욕 미술 관계자 모두가 이 작품의 완성을 보기를 원해. 다들 매우 들떠 있어."
"뉴욕 포스트나 타임지 모두 이미 기사까지 써놓고 대기 중이더군. 태호가 시장의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로 완성을 늦춘다는 말까지 돌 정도고. 그럴 아이도 아닌데 말이야."
"눈동자만 남겨두고 다 완성을 시켰으니까 말이지. 거기의 태호가 그림을 그릴 때 망설임 없이 단숨에 그린다는 얘기는 뉴욕 전체가 다 알 정도가 되었어"
"지금까지 작업으로 충분히 봐왔기도 하고. 그렇기에 나도 태호가 마지막 작업에 고민이 많다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이고. 그 고민을 대신해 줄 수는 없지만 들어는 주고 싶더라. 자네가 가서 좀 도와줄 수 없겠나?"
"그래. 내가 한번 가보지."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