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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생활 - 1학년 Winter Break (feat 서현) (81/181)
  • 81. 대학 생활 - 1학년 Winter Break (feat 서현)

    기말고사가 끝나자 엘리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태호와의 이별을 고하며 파리로 날아갔다. 4주 뒤에 다시 보자는 말로 겨우 엘리를 떨어트려놓고 태호도 서울행 직항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인천 공항에 도착한 태호는 마중 나와 있는 식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회포를 풀었다. 자주 통화를 하긴 하지만 20년 넘게 품고 있던 자식을 떠나보낸 영준과 숙영 두 사람도 넉 달 만에 귀국한 아들을 만나 매우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태호의 학교 얘기를 재밌게 듣던 태호 엄마는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서현 얘기를 했다.

    "서현이가 추석 때 선물을 보냈다."

    "네? 서현이가요?"

    "너 한국 들어오면 자기에게 꼭 전화 달라고 부탁하더라."

    "흠... 알았어요."

    태호는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후 서현에게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엘리와 지내는데 푹 빠져서 서현에 대해 남아 있는 기억도 거의 없었다.

    영준은 아들을 앞에 두고 처음으로 술을 같이 했다.

    태호는 학교와 수업, 룸메이트와 작품 제작 얘기를 이어갔다.

    영준은 아들의 연애 생활이 궁금했다.

    "여자친구는 있니?"

    "네 있어요. 엘리라고. 프랑스 교환 학생이요."

    "동갑?"

    "생일도 그리 차이가 안나요. 걔가 늦게 유학 온 경우고 저도 늦게 간 경우라."

    "재주도 좋다. 어떻게 전화 하면서 한번도 여친 얘기를 안하냐?"

    "안 물어보셔서..."

    "프랑스어는 늘었니?"

    "지금은 원어민 수준으로 해요."

    "예쁘냐?"

    "199x년 미스 프랑스 출신인데요?"

    "역시 내 아들이다."

    영준은 아들의 재주에 새삼 감탄했다.

    위스키를 한잔 마시고 난 후 문뜩 생각난 듯 물어봤다.

    "교환 학생이라고? 그럼 얼마 뒤 돌아가는 거 아니야?"

    "한 학기 더하고 돌아갈 거예요."

    “그럼 반년 뒤에 돌아간다는 얘기네?”

    “그렇겠죠?”

    “힘들지 않겠어?”

    “각오하고 시작한 일이니까 잘 되겠죠. 아직 시간이 좀 남아서 미리 걱정하지는 않으려고요."

    *

    태호는 식구들과 짧게 4박 5일로 발리 여행을 갔다 왔다.

    돌아와서 집에서 쉬고 있는데 연락이 왔다. 서현이었다.

    마음에서 밀어낸 서현이지만 오랜만에 닿은 연락이기에 살짝 긴장이 되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서현의 전화를 받을 생각은 없었지만 엘리와 반년 가까이 보내다 보니 서현에 대한 미움이나 원망은 희미해지고 고등학교 때의 추억으로만 서현이 다가왔다.

    "태호니?" 서현의 목소리였다.

    "서현이구나." 태호는 딱히 원하지 않았는데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잘 지냈어?"

    "잘 지냈지. 너도?"

    "나도 별일 없었어."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우리 연락 안 하고 지낸 지 4년이 다 되어가네." 서현이 말했다.

    "그래. 참, 집에 명절 선물 보냈다고 들었어. 엄마가 잘 먹었다고 전해 달래."

    "뭘 그런 거 가지고. 네가 보내준 그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걸. 엄마가 한번 집에 놀러 오래. 네 그림 이대로 그냥 받으면 안 된다고. 나보고 신신 당부를 했어."

    "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갈게."

    명백한 거절이었지만 서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일 저녁 시간 돼?"

    태호는 순간 당황했다. 밀어내려는 자신을 어찌 되었든 끌어당기려는 서현. 늘 마이페이스인 서현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갑자기 훅 들어오는 초대에 거절할 생각을 못 했다.

    다음날 저녁 7시.

    이태원의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둘은 만났다. 같이 술까지 마시려는 서현의 의도가 들어간 시간이었다.

    서현은 오늘 만남을 위해 집에서 풀 셋업을 했다. 최대한 화장은 안 한듯하지만 청순미는 돋보이는 화장.

    발목이 살짝 보이는 몸에 착 달라붙는 스키니진 청바지. 네이비 니트에 티파티 목걸이와 귀걸이를 했다. 신발은 스니커즈.

    전체적으로는 수수하게 보이고 메이크업도 눈에 띄지 않았지만 들인 공은 데뷔 무대를 맞은 연예인 못지않았다.

    태호는 짙은 푸른색 청바지에 스니커즈. 차콜 색 터틀넥 폴라 니트에 딥 브라운 발마칸 코트를 걸쳤다. 퇴근 시간 길이 막혀 약간 늦게 도착했다.

    "안녕, 서현아. 늦어서 미안. 길이 생각보다 더 막히네."

    별실에 자리 잡은 서현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태호가 보였다.

    태호의 머리 위에서는 꽃잎이 날리고 요정이 팡파르를 울렸다.

    동작 하나하나가 슬로우 모션으로 보였다.

    서현은 태호가 들어온 순간부터 자기 앞에 앉을 때까지 말 그대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발리 여행을 때문인지 얼굴이 살짝 벌겋게 올라와 있는 것을 제외하더라도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훨씬 더 성숙해졌고 늠름해졌다. 고1 때 얼굴에서 묻어 나오던 세상에 대한 삐딱한 시선과 그로 인한 시니컬한 느낌도 완전히 사라졌다.

    지금 표정으로는 마치 인생의 어떤 역경도 자신 있게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넘쳤다. 결정적으로 행복해 보였다.

    자신을 바라보며 짓는, 행복해 보이는 얼굴에서 뚝뚝 묻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미소는 서현의 가슴에 한 송이 꽃을 피울 것만 같았다.

    갑자기 심장 박동이 빨라졌고 태호가 오면 마셔야겠다고 생각한 달콤한 캐러멜 마키아토도 머리속에서 사라졌다.

    약간 늦은 그에게 한마디 던지려고 했던 생각도 더불어 같이 날아갔고 두 눈에는 태호의 모습만 가득했다. 인사를 건네야 되는데 그 타이밍마저도 놓쳤다.

    “아니. 괜찮아. 좀 늦을 수도 있지.”

    왜 지금까지 연락하지 않았냐고 따지려고 했던 생각도 저 미소 하나에 태풍 앞 촛불처럼 사라져버렸다.

    서현의 마음에는 저 미소를 계속 보고 싶다는 생각과 저 붉은 입술을 자신만이 차지하고 싶다는 진실한 욕망으로 채워져가고 있었다.

    “많이 예뻐졌어. 이렇게 예쁜 줄 몰랐는데?”

    갑자기 훅 들어온 칭찬에 서현이 당황했다. 예뻐 보이는 건 당연했다.

    오늘 태호를 만나려고 헤어 디자이너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패션 코디네이터까지 불러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코디를 갖추고 나왔으니 말이다.

    어찌 되었던 예쁘다고 하는 거 보니 오늘 아침부터 난리 친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좋던 기분도 곧 나락으로 떨어졌다. 태호에게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이었다.

    “서현아, 잠시만.” 양해를 구한 태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룸을 빠져나가며 유창한 불어로 통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태호가 전화기를 받으며 일어설 때 지은 미소를 서현은 살짝 볼 수 있었다.

    자신에게 지은 미소와는 비교도 안되는 환한 미소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자신의 여자에게 지어 보일 만한 미소였던 것이다. 이건 서현에게 지독한 패배감을 불러왔다.

    자신이 먼저 알아보고 고등학교 때 첫 키스까지 하며 잡으려고 한 남자가 잡히기는커녕 딴 여자를 향해 가슴을 녹일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화는 짧게 끝나 태호는 곧 돌아왔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서현은 살짝 멍해져 있었다.

    “너 어디 아파? 오늘 좀 멍한듯한데?”

    “아니. 괜찮아. 방금 통화한 건 누구야?”

    서현은 이 연적을 먼저 파악해 해치우고, 결국엔 이 남자를 내 남자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했다.

    스스로 똑똑하다는 생각을 하며 이 녀석을 다시 잡을 생각을 했다. 어렸을 때 왜 아이돌에 빠져 이런 멋진 애를 못 잡았는지 지금 생각하면 한탄만 나올 지경이었다.

    지금부터는 자신도 모든 걸 다 걸어 이 남자를 잡기로 결심했다. 오늘 그 단초를 잡아야 한다며, 스스로 다짐하는 서현이다.

    “아, 친구.”

    각오는 했지만 막상 들으니 더 기분이 나빠진 서현이었다.

    “한국 유학생?”

    “아니야. 프랑스 학생이야.”

    “그렇구나. 너 금방 전에 한 게 프랑스어였지? 언제 배웠어?”

    “배우긴 했었는데, 엘리 덕분에 정말 많이 늘었어.”

    “이름이 엘리야? 무슨 과야?”

    “정치학. 정확히는 정치 과학 (Political Science)”

    “뭐 하는 과야?”

    “외교학과랑 좀 비슷한 거 같아.”

    “이뻐?”

    “잠깐. 뭐야 이거. 지금 엘리 외모까지 물어보는 거야? 너답지 않은데?"

    “내가 알기로 너 한국에 있는 친구는 나밖에 없지 않아?"

    “그런데?”

    “어떤 여자인지 내가 파악해야 내 친구 태호가 잘못된 길에 빠질 수도 있는 걸 막아줄 수 있지."

    “하하하. 고맙다. 걱정해 줘서."

    “천만에. 그 정도는 충분히 해줄 수 있어."

    그래도 태호는 엘리에 대해 더 이상 공개하지 않았다.

    "난 예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나에게 매우 잘해줘. 난 그게 좋고."

    저 까칠한 성격인 태호가 예쁘다고 할 정도면 정말 미인일 테고 태호에게 잘해줄 정도면 성격도 매우 좋은 여자임에 틀림이 없었다. 강적이다.

    *

    둘은 일차는 한우집, 이차는 이자카야, 삼차로 재즈 바까지 들러서 먹고 마셨다.

    삼차 때 서현은 태호 옆에 바짝 붙어 앉아서 팔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당기고 턱을 태호 어깨에 걸친 후 코맹맹이 소리까지 하면서 엘리랑 깨지면 자기랑 정식으로 사귀자고 졸랐다.

    태호도 술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알겠다고 했지만 결코 엘리가 교환학생이라는 얘기도, 옛날에 서현이 다른 남자를 만났던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태호에게는 서현은 선 밖의 여자였기 때문이다.

    *

    4주라는 시간 중 친척들을 만나고 가족여행을 갔다 오고 나니 벌써 2주가 지났고, 거기에 교수님들에게 인사하고 서현과 예랑을 만나고 나니 일주일도 금방 지나가 버렸다.

    태호 자신과 관련된 많은 소식은 예랑에게 들을 수가 있었는데 EBC 다큐멘터리 방영 이후에 나온 여러 가지 피드백이었다.

    “다움에서 연락 안 왔니? 그 서현이라는 네 친구는 별말 없고?”

    “못 들었는데? 서현을 만난 것도 이틀 전이라서. 걔도 별말 없었고.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속 울렁거리는 거 같아.”

    “선남선녀가 사고는 안치는구먼."

    “걔랑 사고 나면 대형사고라 절대로 사고 치면 안 돼.”

    “너 능력 있겠다, 사고 치고 데리고 미국 가버려.”

    “나 사귀는 여자 있어.”

    태호는 엘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줬다. 태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예랑은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이틀 전 네 친구 앞에서도 이랬니?”

    “뭐가? 무슨 말이야?”

    “넌 정말 여자를 아는 듯하면서도 전혀 모르는 거 같고. 헷갈린다. 너 지금 네가 엘리라는 친구를 나한테 소개하면서 짓는 표정 알아?" 잠시 태호를 살펴보는 예랑.

    "모르네, 몰라. 아주 행복해 죽으려는 표정이야.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보는 여자들 질투 나게 말이지. 넌 잘 모르나 본데 너 얼굴이 되게 밝아졌고 환해졌어. 너 미국 가기 전 얼굴은 차도남 그 자체였는데, 지금은 누가 봐도 열애 중인 남자야.”

    “그래? 티가 나?”

    “어. 널 아는 사람들이면 다 그렇다고 할걸?”

    “그래서 어제 걔가 그렇게 적극적이었나? 평소에 안 하던 것들을 하더라고. 대표적으로, 나에게 매우 솔직해졌어. 엘리랑 깨지면 다음 차례는 자기라고 하던데?"

    “걔가 너 잡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런 건가?"

    “그런 거야."

    “그렇구나."

    “왜 넌 관심 없어?"

    “여전히 부담스러워서. 그때는 그냥 만나는 게 즐거웠는데 정말 어려서 뭘 잘 몰랐던 거 같아. 지금은 걔가 가진 배경 전체가 그냥 부담스러워. 친구 정도가 적절하지 그 이상은 아닌 거 같아."

    이쪽 대화가 불편한 태호는 화제를 돌렸다.

    “누나는? 사귀는 남자 없어?"

    “이렇게 일하는데 무슨 연애를 해. 너네 동네는 괜찮은 남자 없냐?”

    “내가 나가서 느낀 게 있는데, 괜찮은 사람들은 절대로 나이 23이 넘어갈 때까지 싱글로 있지 않아."

    "어떻게 엮이든 간에 짝이 있어. 잘난 남자들은 여자들이 내버려 두지 않고 괜찮은 여자도 마찬가지로 남자들이 절대 혼자 있게 내버려 두지 않아. 학교에 박사 과정에 있는 사람들 보잖아? 와이프들이 학교 학생들보다 훨씬 이뻐. 나이도 훨씬 많은데 말이지. 화장이며 옷이며 학교의 선머슴 같은 너드들이랑 비교가 안돼.”

    “결론이 뭐야?”

    “없다고. 남은 남자들이.”

    “알았다, 이 나쁜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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