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예일 아트 클럽 전시회1
태호의 수업은 상당히 널널했다. 시각적 사고, 그림의 기초, 회화 기초 수업을 들었고 불어와 이탈리아어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수업을 들었다.
수업은 6개로 작진 않았지만 커뮤니케이션 이외의 수업은 태호에게 쉬운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주말에 그렇게 놀러 다니는 게 쉽지 만은 않았을 것이고, 엘리의 그림을 완성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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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일주일 뒤면 예일 아트 클럽이 주최하는 전시회는 뉴욕 맨하튼 파크 가에 있는 아모리에서 열린다. 태호는 윌슨을 통해 학기 초 아트 클럽 운영회에서 요청했던 작품을 2점 제작해 전시 및 판매 목적으로 전시회에 내놓았다.
두 작품 모두 엘리가 태호가 사준 검은색 실크 샤넬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담겼는데, 하나는 앵그르의 드 브로그리 왕자비의 초상 느낌이 나는 작품으로, 크기는 120 cm x 90 cm이며, 신고전주의 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다른 하나는 210cm x 100cm 크기로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 X' 느낌이 나는 인상주의 그림이었다. 태호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작품을 엘리 I, 인상주의 양식의 작품을 엘리 II라고 이름 지었다. 두 작품 모두 전신 초상화였다.
엘리I은 머리가 생각에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살짝 왼쪽 아래로 기울어져있고,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깔끔히 뒤로 당겨져 주먹만한 실크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반쯤 감은 듯한 두 눈과 가볍게 다물어진 입술, 사색에 담긴 듯한 표정은 엘리의 지적인 모습을 한껏 돋보이게 했다. 목에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빛의 마리아가 정교하게 양각된 오벌 플래티넘 펜던트가 걸려져 있었고, 귀에는 작은 진주 귀걸이가 걸려져 있었다.
몸은 정면을 기준으로 왼쪽으로 30도 정도 틀어져 있었는데, 오른발도 반 발자국 정도 앞쪽에 위치해 있었다. 왼손은 자연스럽게 허벅지까지 내려져 있었고, 오른손은 허리춤에 얹었다.
이 때문에 가슴이 강조되어 봉긋하고 새하얀 젖가슴 옆 라인이 정면에서 살짝 보일 정도였다. 오른손 약지에는 플래티넘 반지가 끼워져 있었고, 작은 진주로 된 체인 팔찌가 오른 손목에서 흘러내리듯 걸쳐져 있었다.
매끈하고 유리처럼 투명한 피부와 그 위를 부드럽게 덮은 실크 드레스는 엘리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냈으며 엘리의 목에 걸린 가는 끈이 풀어지기라도 하면 금방이라도 물처럼 흘러내릴 것 같았다.
엘리 뒤에는 거대한 거울이 있어 완전히 노출된 엘리의 등과, 이젤 앞에서 엘리를 그리는 태호의 모습이 선명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거울 뒤에는 예일대의 거대한 도서관이 배경으로 들어가 엘리의 지적인 면을 강조했다. 그림이 빈틈없이 꽉 차 보였다. 놀랍게도 붓 자국이 없어 마치 사진처럼 보였다.
엘리 II는 마담 X의 포즈를 그대로 차용했다. 머리는 오른쪽 수평으로 돌렸고 턱을 살짝 치켜 들었고, 전신은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왼팔은 옆에 놓인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오른팔은 자연스럽게 허벅지 위에 올려져 있었다. 가슴선과 볼륨감이 느껴졌다.
머리카락은 브레이디드 번 스타일 (결혼식 헤어스타일로 유명) 땋아 올렸으며 머리끝에서 하얗고 긴 목을 지나 가냘픈 어깨를 거쳐 팔로 내려가는 라인이 관능적을 넘어 선정적이었다.
목에 걸린 펜던트와 오른손 약지에 반지는 반짝였으며 귀에는 작은 진주 귀걸이가 걸려 있었다.
엘리 I의 가장 큰 매력이 화려한 색상의 사용이었다면 엘리 II는 리드 화이트와 아이보리 블랙을 이용한 강력한 흑백의 대비를 꼽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엘리의 피부색이 더욱 더 하얗게 도드라졌다.
엘리 I이 보그의 화보 모델 같았다면 엘리 II는 사교 모임에 참석하는 귀족가의 영애 같았다.
엘리의 뛰어난 외모와 투명한 피부를 바탕으로 가늘고 이쁜 목과 어깨 선, 비현실적으로 잘록한 허리 등 태호의 몸매 교정까지 더해져 그림 전체가 도발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한마디로 존재할 수 없는 아름다운 미인을 담은 작품이었으며, 100년 전이었다면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을 작품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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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엘리 I, II를 작업하기 위해서 수십 장이 넘는 스케치를 했다. 종종 학기 초 둘은 저녁 식사 후 도서관에서 만났는데, 엘리가 학교 공부를 한다고 바빴다면 태호는 옆에서 공부하는 엘리를 두고 작품 구상에 바빴다.
거의 이주 동안 구상을 한 다음, 사진을 찍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호텔 룸을 빌려,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디자이너를 통해 한껏 치장한 블랙 실크 샤넬 드레스를 입은 엘리의 전신사진 수십 장을 찍었다.
여기에 학교의 고문서 도서관인 바이네케 도서관 사진도 여러 장 구해 엘리 I의 배경으로 삼았다. 다시 한참을 스케치한 다음 두 달 동안 채색과 건조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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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완성된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윌슨에게 보내자 그는 거짓말처럼 세 시간 뒤에 학교에 나타나 그림을 확인한 후 잘 챙겨서 뉴욕으로 사라졌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엘리는 무엇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원래 저분 저런 분이셨어?"
"내 작품을 좋아하시긴 하는데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태호도 배트맨과 로빈의 '로빈'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윌슨을 보며 당황했다.
윌슨이 떠난 후 3시간 정도가 지나자 전화가 왔다.
앞뒤 다 생략한 채 윌슨은 본론부터 들어갔다.
"이거 정말 거기에서 팔아야 되나? 오해하지 말게. 내가 수수료를 못 받아서 하는 얘기가 아니야. 이건 개인에게 팔면 안 되는 작품이야. 미술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접해야 돼."
"그 정도 작품은 아닌데요?"
"뭐가 아닌가?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이 어디에 있다고?"
"아름답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요. 물론 제 개인적인 창작 욕구를 만족시켰다는 점은 빼고요."
"이렇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극한으로 드러내는 작품이 흔한지 아나? 엘리 양을 두고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벗은 모습보다 훨씬 야하고 자극적이야. 카바넬의 비너스보다 더."
"그럴 의도로 만든 작품이긴 한데요. 그렇게 극찬해 주시니 얼떨떨하네요.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일단 판매 불가를 걸지. 현재 클럽 회장이 누군가?"
"잠시만요."
태호는 받아 적어두었던 노트를 꺼내 뒤적이다 이름을 찾았다.
"모마 (MOMA, Metropolitan Museum of Art,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애슐리 스튜어트요."
"그래? 내 알아보고 연락하지."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판매 불가를 걸고 싶은데 예일 미술 협회 정책을 알 수가 없으니 미리 확인을 해야지. 만약 불가하다면 내가 아는 뉴욕에 있는 미술관 큐레이터를 다 불러서라도 개인에게 그 작품들이 넘어가게 하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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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은 몇 번의 통화 끝에 애슐리 스튜어트와 연락이 닿았다.
가볍게 자기소개를 마친 윌슨은 이번에 태호가 작업한 두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흥미롭군요. 기본적으로 전시회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그림을 구매할 권리가 있어요. 누구든 사겠다고 나서면 작품을 살 수 있어야 전시회의 취지에 맞으니까요."
"미술관에는 팔고 개인에게는 안 팔겠다는 건 형평성에도 어긋나요. 그렇지만 작가가 판매하지 않겠다면 저희도 어쩔 수 없지요. 판매를 강요할 수는 없으니."
"차라리 이러는 것은 어떨까요? 처음부터 작품을 전시하지 마시죠. 우리도 아쉽지만 원칙을 깨면서까지 무리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생각보다 강력한 반발에 윌슨은 골치가 아파졌다.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군요. 일단 사진을 보낼 테니 보시고 관심이 있으시면 연락을 주세요."
윌슨은 갤러리의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사진 파일에 각각 이름을 붙여 송부했다.
한 시간 후 애슐리는 윌슨에게 전화를 걸어 갤러리의 위치를 물어봤고, 저녁에 찾아왔다.
"이 그림이었군요."
애슐리는 사진으로 본 태호의 그림을 가까이서 관찰하며 입에서 새어 나오는 탄성을 막을 수가 없었다.
"빛의 마리아를 제작한 태호 작가의 신작이라는 얘기에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한없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작품이네요. 우연의 일치로 이 그림의 모티브가 된 두 작품 모두 우리 미술관에 있지요. 너무나도 좋아하는 작품들인데, 이 두 작품이 마치 새로운 버전 같습니다."
말을 마친 애슐리는 생각을 정리 중인 듯 말이 없었고, 윌슨은 기다렸다.
"이 작품은 전시를 하되 가격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면서 판매 불가 작품으로 구분하죠."
그러면서도 애슐리는 가격에 대해 궁금해 했다.
"어느 정도 가격이면 이 작품을 개인에게 판매하실 생각이십니까?"
"두 작품을 세트로 판매할 생각입니다. 미술관에서 구매한다면 4백만 달러, 만약 개인이 구매한다면 6백만 달러는 받아야겠습니다. 이 가격이 최소한입니다."
애슐리는 윌슨의 생각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늘 미쳐있는 미술시장이지만 이제 대학교 1학년 학생에게 그 정도의 돈다발을 안길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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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는 11월 첫 째주 금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저녁까지 열렸다.
태호는 엘리와 함께 뉴욕으로 향했다.
아모리에는 예술대 학장 로버트 스토를 포함한 예일 동문뿐만 아니라 빌바오 제이슨과 에이미, 윌슨과 매튜, 거기에 방돌이들까지 왔다.
데이비드가 마침 차를 가지고 있었고 금요일에다 시험기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전시회 관람 후 태호를 뺀 나머지는 데이비드 집에서 주말을 보내기로 했다.
예일대 미술 협회의 전시회라고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하얀색 부스와 조명이 아모리 내부를 꾸미고 있었다.
이번에 참여한 작가의 수는 약 200여 명. 60명의 학생과 14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600점의 작품을 전시하는 나름 규모가 있는 전시회였다.
전문 갤러리들이 참여하는 아트 페어와 다르게 학생들과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작가들이 대거 참석하기에 작품이나 전시회 운영 부분에서 미숙한 부분이 보였다.
그럼에도 이 전시회가 뉴욕에서 나름 인정을 받게 된 배경에는 이 학교 출신들이 뉴욕을 포함한 미국 전역에 비교적 잘 형성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을 보러 오는 것보다 사람을 만나 최근 소식을 교환하는데 더 큰 의미를 두고 있었다.
빌바오의 토마스 관장과 예일대의 로버트 스토 학장이 서로 만나자고 얘기하면서도 정작 얼굴을 볼 때는 연중 이때가 거의 유일했다.
"이번에 태호도 작품을 냈나?" 토마스가 물었다.
"난 몰라." 로버트가 대답했다.
"어떻게 자기 학생이 작품을 냈는지도 모르나?"
"학생이 몇 명인데 그걸 다 파악하고 사나?"
"쯧쯧. 그 학교 학생 중에 제일 전도유망한 학생인데 그것도 파악 안 하다니 직무 유기야."
농담인 줄은 알지만 짜증을 나게 만드는 토마스의 화법에 로버트는 못들은 척 협외 운영 위원으로 보이는 동문에게 물어봤다.
"혹시 권태호 학생의 작품은 어디 있는지 아는가?"
질문을 한 사람이 학장이라는 것을 깨달은 운영 위원은 얼른 인쇄물을 뒤져서 태호의 작품이 위치한 부스를 찾아냈다.
"H3으로 가시면 됩니다. 이쪽으로 직진 후 좌측에 있습니다."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