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 대학 생활 - 1학년 Fall Semester
점심때쯤 엘리에게 전화를 걸어 엘리가 잘 들어갔는지 확인을 하고 푹 쉬고 월요일에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갤갤 거리고 있는 데이비드에게 운전면허 따는 방법을 물어보고 난 후 근처 서점에 들러 운전면허 책을 샀다.
미국에서 차가 없으니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참이었다. 책에 적힌 대로 필기시험 날짜와 실기시험 날짜를 확인한 태호는 ‘캘리포니아에서는 한국어로 시험도 가능하던데’ 구시렁거리면서 시험 준비를 했다.
수요일.
엘리의 옷이 도착했다. 윌슨은 천천히 보내달라는 부탁을 잊어버렸는지 모델에게 꼭 필요한 게 옷이라며 UPS 특급 우편으로 보냈다.
엘리에게 옷을 건네주자 태호에게 또 한 번의 딥 키스를 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 정장을 입고 올테니 그림을 그린 후 저녁도 먹고 극장에도 가자고 했다.
*
태호는 극장에 가는 방법을 찾아봤다. 학교에 다니는 버스를 타야 된다는 생각에 또 짜증이 났다. 목요일에 바로 운전면허 시험 일자를 잡고 실기시험까지 예약했다.
금요일 오후 Fine Art (순수미술) 건물 근처에서 엘리를 만나기 했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갈 때쯤 멀리서 샤넬 클래식 아이보리 트위드 드레스를 입은 엘리가 걸어오는걸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마치 포스가 담긴 듯한 힘찬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모든 사람이 엘리를 쳐다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런 엘리가 태호에게 다가오자 다들 태호까지 쳐다봤고, 엘리가 태호와 키스를 하자 저쪽 많은 수컷들의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오늘 옷이 정말 이쁜걸."
"그래? 나도 맘에 들어."
둘은 같이 미술실에 들어가 지난번처럼 자리를 잡았다. 미술실에는 태호와 엘리 말고도 3명의 학생이 그림을 연습 중이었는데 엘리가 들어서자 6개의 눈동자가 엘리를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여기 앉을까?"
태호는 의자 위치를 조절해 엘리의 자리를 잡아주고 자신도 이젤 앞에 앉았다. 지난번과 다르게 엘리는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고 태호는 그림을 그리는 와중에도 열심히 엘리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 옷은 다 좋은데 피부에 닿으면 살짝 아파. 옷감이 까칠해서 그런 거 같아."
“그렇구나. 옷이 나빴네. 그래도 옷이 이쁘니 용서해 줘야지. 아까 네가 걸어올 때 주위 사람들이 너 쳐다보는 거 느꼈어?"
“약간은? 오늘은 뭐가 달랐어?"
“그냥 니가 오는 길이 런웨이였어. 모든 사람들이 다 넋을 놓고 보더라."
그 말을 듣고 배시시 웃는 엘리. 방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너 다른 남자들 앞에서 그렇게 웃지 마. 나 질투 나려고 한다.”
“정말? 네가 질투를 해? 그렇게 안 보이는데?”
“넌 내가 소유욕이 얼마나 강한지 몰라서 그래.”
“소유욕? 그거랑 내가 웃는 거랑 무슨 관계야?”
“너 그렇게 이쁘게 웃는 걸 다른 사람이 보는 것도 싫어.”
“하하하. 너 웃긴다. 그럼 지금 내가 이렇게 입고 다닌 것도 썩 맘에 드는 건 아니겠다?”
엘리는 자신이 입은 옷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그러자 엘리가 크게 웃었다.
“그렇게 소유욕이 센 사람이 왜 뉴욕에서 첫날밤에 날 혼자 내버려 둔 거야.”
저쪽에서 컥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불어를 알아듣는 게 틀림없었다.
“아직 그때는 키스를 하기 전이잖아. 해도 볼 키스였고.”
“키스 후에는?
"넌 내 거지."
혼자서 큭큭 거리고 웃는 엘리.
“키스가 사랑의 증거야?”
“당연하지. 내 진짜 첫 키스인데."
“정말?”
“내가 토요일 밤에 너랑 헤어지고 나서 혼자 방에서 얼마나 설렜는지 알아? 늦게까지 잠도 못 자고."
“왜 잠을 못 잤어?”
“가족계획 세우느라.”
"큭큭." 엘리는 이제는 거의 숨이 막힐 지경이 됐다.
엘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태호에게 살짝 어색한 모델 워킹으로 다가와 태호의 오른쪽 허벅지에 살포시 엉덩이를 대고 앉아 오른손으로 태호의 볼을 쓰다듬으며 찐득하게 말했다.
“자기(Honey)야. 그래서 결론이 뭐였어?"
“너랑 결혼 해야겠다. 그런데 문제가 있네? 너랑 나랑 좋아 죽어도 양가 부모님이 허락 안 하면 문제잖아."
“그렇지."
“그래서 생각한 게 있지."
“뭔데?
“애부터 만들어야겠다. 손자 손녀 데리고 왔는데 어쩔 거야!"
태호는 엘리의 허리를 두손으로 당겨 몸에 바싹 붙였다.
“미쳤어 정말!"
등을 찰싹 때렸지만 엘리도 싫지는 않은 듯 태호와의 스킨십을 즐겼다.
둘은 그렇게 엉겨 붙은 채로 키스를 나누다 캔버스를 대충 정리해 놓고 나가버렸다. 옆에 다른 학생들 가슴에는 염장만 질러 놓고 말이다.
*
태호와 엘리는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수업 시간이 안 맞는 월목은 빼고 화 수요일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같이 점심을 먹었고 저녁은 대부분 같이 먹었다.
기숙사 밥이 나쁘지 않았기에 한 번은 엘리 기숙사 한 번은 태호 기숙사에서 먹었다. 그러다가 태호가 머무는 기숙사 학생들의 노골적인 시선으로 인해 엘리가 점점 불편해하자 엘리네 기숙사로 가는 빈도가 늘었다.
둘의 기숙사는 거리가 좀 있었기에 태호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10월 중순쯤 드디어 운전면허를 땄다.
*
예일대 기숙사에는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로 바글거렸는데 그중에도 태호가 있는 기숙사 동은 그중에서도 정말 골고루 잘도 섞어 놔서 오대양 육대주 학생들이 분포했다.
지금 태호 앞에서 피자를 먹고 있는 유스케는 아버지가 일본의 유력 정치인이었는데 가업에는 생각이 없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대학을 안 다니고 미국으로 왔다.
키가 180은 안되어 보이지만 SMAP의 기무라 다쿠야를 연상시키는 마스크와 운동으로 다져진 늘씬한 근육질 몸매는 왜 유스케 아버지가 아들을 정계에 입문 못 시켜 안달인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이 녀석의 깔끔한 외모와 매너로 주위에는 여자들이 끊이지를 않았는데 방에도 매번 다른 여자들이 들락거려서 누가 봐도 여자가 자주 바뀐다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매주 금요일 오후에 방을 나가면 일요일 저녁에나 돌아왔는데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닌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다들 여자 집들을 돌아다녔을 거로 짐작했다.
그 옆에서 콜라를 마시는 파블로는 멕시코의 가장 큰 통신사 부회장 아들이었는데 룸메인 데이비드가 멕시코에서 제일 부잣집 아들인 줄 알고 깜짝 놀라 물어보니 그 부잣집의 머슴일 하는 사람 아들이라고 했다.
상당히 멕시코의 정치 상황이나 경제 상황에 대해 시니컬하게 보는 친구였는데, 자신이 자고 나란 멕시코에 대한 애국심은 철철 넘치는 열혈 청년이었다.
파블로는 특이하게 피앙세(약혼녀)가 이미 있었는데 거의 매일 한 시간씩 전화기를 붙잡고 살기에 누군가 했다. 사진을 보니 매일 한 시간씩 절을 해도 모자랄 만큼의 미인이었다.
들어보니 머슴 집 아들과 부잣집 막내딸의 러브 스토리였는데 약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리는 잡놈들이 많아 파블로의 애간장을 녹이고 있었다.
왜 같이 오지 않았냐는 핀잔에 ‘내 나이가 19살이야 이 정신 나간 것들아!’라면 열변을 토했다. 그 나이에 약혼한 게 더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다들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파블로 옆에는 앉아서 ‘왜 미국에선 이따위 피자를 파는 거야?’라는 표정으로 피자 조각을 깨작거리고 있는 자알 생긴 청년은 밀라노에서 온 조지오로 자기 집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꺼내지 않는 녀석이라 뭐 하는 집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녀석의 배경에 대해 내기가 들어갔는데 잘생긴 외모 때문에 패션업계 아니면 마피아 둘 중 하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 녀석도 정상은 아니었다. 엘리를 보자마자 정말 기름 범벅인 인사를 건넸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태호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차라리 이탈리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다면 덜 느끼했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엘리에게 나중에 들어보니 자신에게 집적거리는 남자 중 상당수가 파리에 있던 이탈리안이라고 말해 태호를 빵 터지게 만들었다. 그 뒤로 한동안 조지아는 태호를 무슨 연적 쳐다보듯 했는데 태호는 당연히 쌩했다.
마지막으로는 세토스. 이집트에서 온 고위 관료 아들인 이 녀석은 큰 키에 선이 굵은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짙은 눈썹은 얼굴에 송충이 두 마리가 꿈틀거리는 거 같았고 비교적 짧은 머리와 언더컷은 남성미 펌핑을 제대로 했다.
가끔씩 윗옷의 단추를 반은 풀어놓고 다녔는데 그 짓을 여름이 아닌 완연한 가을로 접어든 그것도 좀 추운 11월에도 하고 다녀서 태호는 이 끔찍한 나르시시스트를 슬슬 피해 다녔다.
뭇 여성들의 맘을 잡고 흔들만한 외모였지만 사생활은 깔끔했는데 친구들 사이에는 게이가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었다.
이 녀석을 화나게 하는 방법은 간단했는데 바로 종교였다. 아니 이 녀석 앞에서는 절대로 종교 얘기를 하면 안 되었다.
거기의 이스라엘 얘기가 나오면 거의 거품을 물고 논쟁을 벌이는데, 생각 없이 데이비드가 말을 꺼냈다가 된통 덴 이후로 얘 앞에서는 이슬람과 이스라엘은 금기어가 되어버렸다.
*
이 배경이 다 다르고 관심사도 천양지차로 다른 이 군상들이 태호와 데이비드의 방에 모여 피자와 콜라를 먹고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차였다.
“그러니까 태호가 운전면허를 땄고 차를 사고 싶어 한다는 거지. 무슨 차를 사야 되는지 잘 몰라서 의견을 들어보고자 너희들을 부른 거고.” 데이비드가 브리핑을 했다.
“예산이 얼만데?” 파블로가 물어봤다.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돈은 5만 불인데 더 비싼 차를 사야 된다면 돈은 더 만들 수 있어. 돈이야 있는데 내 돈이 아닌 부모님 돈으로 사야 되어서."
"왜?" 파블로가 물어봤다.
"나중에 부모님 알면 실망하실 거 같아서. 가능하면 허락받은 차를 사려고 하는 거야."
"그렇군."
“돈만 있으면 이탈리안 스포츠카를 사야 되는 거 아니야?”
조지오가 헛소리를 했다. 돈은 둘째치고 대학에서 타고 다니기 부적절해 보이니 물어보는 거 아니겠는가?
“스포츠카는 일단 부적절해 보여서. 난 그냥 뉴욕 정도 왔다 갔다 하고 엘리랑 밥 먹으러 다닐 정도면 돼. 아. 차는 좀 커야 돼. 그림도 가끔 싣고 다녀야 되어서.”
태호라고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이는 며칠 전 엄마와의 대화로 산산이 깨졌다.
“무슨 차가 사고 싶은데?” 숙영이 물어봤다.
"페라리"
"패 달라고?"
"람보르기니"
"람보 같은 엄마한테 기깔나게 혼나볼래?"
"그럼 RX7"
"무슨 찬데?"
"마쓰다에서 나온 차."
"우린 일본 차 안 산다."
"BMW 850 Ci는?"
"BMW? 그거 투 도어니? (문 두 개)"
"어"
"그럼 보험료 많이 나와서 안돼. 바퀴가 두 개던 문이 두 짝이던 두 개는 안 돼."
"그럼 뭘 타라고?"
"소오나타 어떻니? 소오나타. 휸다이가 미국 연계 프로그램을 만들었거든. 엄마가 한국에서 돈 내면 넌 거기서 인수해서 타고 다니면 된다던데."
"그거 할렘에 가면 많이 보인다고 하던데?"
"그것도 괜찮네. 너 길 잘못 들어도 동네 주민인 줄 알고 보내줄 거 아니야."
"엄마!"
"볼보. 그거 아니면 한국 차 타던가."
"갑자기 볼보는 왜?"
"할아버지가 얼마 전에 볼보 뽑으셨는데 튼튼하다고 맘에 들어 하신다. 금쪽같은 손자, 명문대 갔는데 선물도 하나 못 사줬다고 차를 사주신대. 튼튼한 거 타고 다니라고 볼보로 한대 뽑아 주신단다."
"엄마 내가 나중에 다시 전화해볼게."
태호는 속으로 눈물을 삼키며 볼보 얘기를 꺼냈다.
"얘들아, 할아버지가 볼보 사주신다고 하던데?"
"보올보? 푸하." 가만히 있던 세토스까지 비웃었다. 저 녀석까지 비웃으니까 더 기분이 나빠졌다.
"다른 차들은?"
"바퀴가 두 개 건 문이 두 개 건 두 개는 절대 안 된대."
"크크"
"야 너 절대로 볼보 타지 마. 니가 볼보 타고 다니는 건 생각만 해도 웃긴다." 파블로가 말했다."
"그거 우리 할머니가 주로 타고 다니셨어. 왜건으로." 데이비드가 말했다.
"우리 집 세 번째 차도 그거. 엄마가 장 볼 때 주로 몰고 다니지" 파블로가 말했다.
“렉서스 SUV 타고 다녀. RS 470 차 잘 나왔더라.” 유스케가 그나마 제일 사람다운 대답을 해줬다.
“그 차 넓던데?” 데이비드가 말했고.
“오. 그럼 우리 그 차 다 타고 다닐 수 있겠다.”
파블로가 말을 받았다.
“이탈리안 차를 못 타는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차와 기사가 생기는 일이니."
조지오가 중얼거리더니.
"앞 좌석은 내 거야!"라고 선언했다.
그러자 바로 세토스가 반박을 했다.
“여기서 내가 제일 키가 크니 내가 앉아야 되지 않겠어?”
그러자 조지오가 벌떡 일어나 말했다.
“내가 더 큰데”
그리고 곧 둘이 일어서서 키를 재고 있었다.
이 도움 안되는 화상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허탈할 정도였다. 태호는 슬쩍 유스케에게 차량 가격을 물어봤더니 가격은 6만 불 정도로 고 한다.
저 녀석들이 자기 차를 가지고 뭐라 하던 태호는 "이런 저런 비용 다 합치면 총 7만 불 정도 있으면 되겠네"라며 수화기를 들고 할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일본 차라 맘에 안 들어 하던 할아버지지만 그림 때문에 큰 차가 필요한데 볼보도 작다는 손자 말에 흔쾌히 7만 불을 손자의 미국 계좌에 쏴주셨다. 볼보 왜건도 충분히 크지만 태호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차를 산 이후에는 엘리와 캠퍼스 밖에서 밥을 사 먹는 일이 늘었고 이동 반경도 늘어나 둘은 더 자주 뉴욕으로 보스턴으로 그리고 필라델피아까지도 놀러 다녔다.
학교 친구들이 극장 다닐 때나 월마트나 타깃에 장을 보러 갈 때 태호가 주로 라이드(이동수단)를 제공했는데 그래서 차를 산 이후에 훨씬 더 바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