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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여행2 (76/181)

76. 뉴욕 여행2

윌슨은 차로 가 트렁크에서 있는 그림 보관 프레임을 통째로 들고 와 갤러리에서 바로 오픈했다. 카운터 쪽에 앉아있던 제시카까지 와서 윌슨의 작업을 도왔다.

그림은 그리 크지 않았고 그렇기에 패트릭의 맘에는 더 드는 모양이었다.

“이건 예일대 캠퍼스군요.”

“한눈에 알아보시네요?”

“내 딸이 예일대 출신이에요.”

“아 소피아가 참 예일대 입학했다는 얘기를 몇 년 전에 들은 기억이 납니다.”

“몇 달 전 졸업을 했는데 이곳은 딸 데려다주며 자주 봤지요.”

“눈에 익으시겠습니다.”

“이 그림의 분위기가 훨씬 더 좋군요. 이건 판매합니까?”

윌슨은 슬쩍 태호의 눈치를 보더니, “저기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시겠습니까?”, 하며 패트릭을 방으로 이끌었다.

패트릭도 윌슨의 태도에 자신이 눈치 없이 물어본 것을 깨닫고 살짝 민망해하며 윌슨을 따라 사무실로 들어갔다.

태호는 얼른 엘리를 제시카에게 소개했다. 제시카는 갤러리 안을 돌며 걸려있는 그림을 설명해 줬다. 그러기를 20분, 둘은 웃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패트릭은 태호에게 작별 인사를 건냈다.

“오늘 정말 만나서 반가웠어요. 다음에 만나면 나랑 저녁 같이 합시다. 내 정말 잘하는 스테이크 집을 알고 있어요.”

그는 엘리와 제시카에게도 인사를 건넨 후 갤러리 밖에 주차된 메르세데스 AMG를 타고 사라졌다.

“본격적인 미국 진출 이후 첫 거래야. 축하하네.”

“팔렸어요?”

“이 그림이 무슨 의미인지 파악을 하자마자 눈빛이 바뀌더라고. 흐흐.”

“무슨 의미요? 내가 모르는 의미도 있나요?”

“자네의 첫 풍경화에 여자친구의 모습까지 들어간 작품이지.”

“약간 무리수 같긴 하지만 말은 되네요. 얼마에 팔았어요?”

“자네가 제안한 가격의 두 배.”

두 눈이 확 커진 태호. 그걸 보는 윌슨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양 작가의 초상화는 내가 판매 불가라고 진작에 알렸기에 입맛만 다시고 있었는데, 게다가 그림 가격이 최소 백만 달러부터 시작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싼 가격에 여러 의미가 있는 그림이 나오니 눈이 돌아갈 만하지."

"패트릭은 은행가야. 집에 걸어두고 보려는 목적도 없지는 않겠지만 투자 목적이 더 큰 사람이지. 내가 추천한 그림을 사서 돈 좀 벌기도 했고."

"첫 판매를 기념하여 내가 저녁을 근사하게 대접을 하고 싶지만... 오늘은 아닌 거 같고 다음에 뉴욕에 나오면 그때는 저녁을 비워두게. 엘리 양. 이거 받아요.”

윌슨은 봉투를 하나 건넸다.

“지금 열어보지 말고 나중에 열어봐요.”

얼떨결에 봉투를 건데 받은 엘리.

“태호가 나중에 설명해 줄 거에요. 갤러리 구경 다 했으면 슬슬 출발해야지?”

“이런. 매튜 씨 갤러리는 오늘 못 보겠군요. 벌써 시간이 4시가 넘어버렸네. 엘리, 우리 가자.”

둘은 윌슨과 제시카에게 작별 인사를 한 후 브루클린 교를 건너기 위해 이동했다.

*

갤러리를 벗어난 지 얼마 후, 엘리가 물었다.

“태호, 봉투에 든 거 수표야?”

“어떻게 알았어?”

“그거 밖에 더 있나. 근데 도대체 얼마를 넣은 거야?"

“내가 전에 모델료 5%라고 하지 않았어? 그만큼 들어있을 거야."

“그렇게 큰돈을 고작 그 사진 하나 찍었다고 주는 거야? 난 이 돈 받을 수 없으니까 태호가 다시 가져가.”

“이건 구두 계약이긴 한데 어찌 되었던 너하고 내가 맺은 계약이고 난 계약을 이행해야 되는 주체야. 그리고 너한테 많이 준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5% 면 이만 불이나 되는 돈이야. 그게 크지 않은 돈이라니?"

“갤러리에서 본 양 작가 초상화는 최소 추정 가격이 백만 불이야. 오늘 판 건 40만 불인 거고. 큰돈인 건 맞는데 내 원래 작품가에 비하면 높은 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받아. 나중에 네가 구두계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고 인터뷰라도 하면 그게 더 나에게는 안 좋아. 그 이만 불이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잖아"

“말이 그렇다고. 난 계약을 이행해야 된다고 강조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냥 받아. 오케이?”

둘은 브루클린 교를 건너며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갔다.

“여기가 밤에 지나가면 야경이 그렇게 좋다고 하는데 오늘은 못 보네.”

“그러게. 여기 고층건물들 불 켜져 있으면 밤에 정말 이쁘긴 하겠다.

“다음에는 밤에 올까?

“그래.”

둘은 걸어서 브루클린 교를 지나 시티홀까지 도착한 다음 택시를 타고 피어 25 앳 허드슨 리버 공원 근처에 있는 시티 바인 야드에 향했다. 다른 갤러리는 시간이 부족하여 다음 기회로 미뤘다.

내부 홀에 들어간 둘은 예약석에 자리를 잡고 해산물 플래터를 시키고 새우 샐러드와 굴을 추가로 주문한 후 하우스 와인까지 주문했다. 다행히 엘리가 생일이 지났기에 만 21살로 술 구매가 가능했다.

“이거 오늘 너에게 얻어먹어야겠는데?”

“모델료도 받았는데 밥 한 끼 못 사겠어?”

엘리는 웃으며 흔쾌히 저녁을 자신이 사겠다고 했다. 은근히 미국 음주법에 적응을 못한 태호의 소심함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둘은 양껏 해산물과 와인을 즐겼다. 다만 술은 조금만 했는데 뮤지컬 공연에 졸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도 술이 조금 들어가자 둘은 조금 더 개인적인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주전 처음 만났을 때는 식구가 몇 명이고 고향이 어디고 하는 수준이었다면 훨씬 더 사적인 대화들이 오고 갔다. 가령 엘리가 사귀었던 옛 남자친구 이야기나 서현에 대한 이야기 같은 것들 말이다.

"남자친구하고 깨지고 왔다고?”

“학교 선배야. 학교에서 매일 보자니 못할 노릇이더라고."

“그럼 그전 남자친구가 졸업하는 일 년 뒤에는 돌아가겠네?"

“아마 그러지 않을까?"

“주위에서는 뭐래?"

“아빠가 서운해하는 거 빼고는 딱히 문제는 없어."

“그래도 첨에 뉴욕 도착했을 때 미국 온 거 후회 안 했어?"

“말을 마. 세상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그 기분은 정말 최악이었어. 타고 온 비행기 그대로 다시 파리로 날아가고 싶더라니까."

“누가 나와서 기다려주면 좀 나은데 혼자 오면 그렇더라."

“태호는 파리에서 공부할 생각은 없어? 불어도 이주 사이에 정말 많이 늘어서 파리에서 대학생활해도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못할 건 없는데 파리가 나에게 딱히 메리트가 없어."

“어떤 메리트?”

“사실 내가 철학과 예술 쪽으로 공부를 오래 했거든. 동양철학, 서양철학, 미술사도 현대 미술까지 공부는 거의 다 한 상태야. 주제만 있으면 일이 년 안에 박사 학위 논문도 쓸 수 있을 거 같거든."

"그럼에도 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내가 미국에 배경이 없어서거든. 여기 예일대는 미술 시장에 내밀 명함 같은 거야. 빛의 마리아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되긴 했는데. 그래도 이 학교 졸업은 하고 싶어. 난 또래 친구가 없거든... 학교를 제대로 다닌 적이 없어서.”

“그럼 잠깐 파리 갔다 오는 건 문제가 안되겠네. 그래봤자 일 년이잖아.”

엘리의 목소리에는 어떤 기대감이 있었다.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생각해 봐야지. 혹시 알아? 프랑스에서 불러주면 갈지?"

프랑스가 태호를 무슨 일로 부를 지는 모르겠으나, 이 말을 들은 엘리는 왠지 안심하는 표정으로 태호에게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 엘리는 얼른 화제를 돌렸다.

“전에 너 바람 맞혔다는 여자는 어떤 애였어?”

“고등학교 동창이자, 한국에서 제일 돈 많은 집 막내딸. 혹시 다성 알아?"

“그 핸드폰 만드는 회사 아니야?”

“프랑스도 들어갔었네. 언제 갔데."

“얼마 전 파리에서 선전하는 거 봤어."

“그 집 딸이야."

“어장관리할만하네. 큭큭.”

엘리는 살짝 삐질려는 태호를 보고 분위기 전환 겸으로 식당을 나가자고 재촉했다.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신 술이 살짝 올라오기도 했다.

둘은 식당에서 나와 근처 공원에서 허드슨강을 바라보면 걸었다. 그리고 슬쩍 태호 옆으로 다가온 엘리는 태호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둘은 강바람을 맞으며 걸었다.

"대학교 1학년 때 미스 프랑스 대회에 나갔어. 부모님은 결사반대를 했지만 난 영화나 방송 쪽으로 가고 싶었거든. 미스 프랑스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그쪽으로 갈 수 있을 줄 알았어."

"보통은 그 대회에서 상을 받으면 영화나 방송은 몰라도 모델 제의 같은 건 쉽게 들어오는데, 어떤 에이전트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어. 당황했지. 뭔가 이상하잖아. 그래서 여기저기를 도움을 받아서 알아봤어."

"확인해 보니 아빠와 큰아버지가 에이전시에게 연락을 다 걸어서 나에게 어떤 제안을 하면 불이익이 있을 거라고 경고를 했더라고. 우리 집이 외교관만 몇 대째라 여기저기 끈이 많거든. 큰 아버지는 정계에 계시고."

"흔하디흔한 게 미스 프랑스인데 정치인과 고위 공직자가 경고까지 날리니 더더욱 나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거기다가 그때 남자친구도 내가 활동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반대했어."

"그래서 심하게 다퉜고 헤어지자고 했지. 아빠 얼굴도 보기 싫어서 급하게 예일에 편입한 거야."

덤덤히 말하고 있지만 엘리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 태호는 손을 엘리의 어깨에 두르고 꼭 끌어안았다. 엘리는 그런 태호의 품에 더 꼭 파고들었다.

얼마 후 바람이 더 차가워지자 얼른 택시를 잡아타고 캣츠 공연이 있는 웨스트 52가의 네일 사이먼 극장으로 이동했다.

*

태호는 맨 앞자리 정중앙을 예약했기 때문에 너무 앞이 아닌가 걱정했지만 기우였다. 바로 앞이었기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도 손에 잡힐 듯이 볼 수 있었고 각종 무대 장치들이 큼지막하게 실제 크기의 몇 배로 구현되어 있어 현장감이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2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인 '메모리'를 늙은 고양이 ‘그리자벨라’가 나타나 부를 때 전신에 소름이 쫙 오르는 감동을 맛보았다.

옆에 앉은 엘리는 눈가를 살짝 훔치며 눈물까지 흘렸다. 정말 이 한 곡을 듣고 보기 위한 뮤지컬이라는 평이 있을 정도인 게 이해가 갈 정도였다.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훌륭한 뮤지컬이었고, 또 혼자 오지 않고 엘리랑 같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동을 같이 공유한다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니까.

둘은 기념품 가게 등을 간단히 돌아보다 밖으로 나와 타임 스퀘어로 향했다. 엘리는 저녁식사 후 보다 더 태호에게 바싹 붙어서 팔짱을 꼈고 태호도 당연한 듯 엘리와의 스킨십을 한껏 즐기며 뉴욕의 밤공기를 즐겼다.

"태호가 생각하는 매력적인 여자는 어떤 사람이야?"

"난 날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끌려."

"잘 이해가 안 되는걸. 지난 1주간 봤던 태호는 배려심이 많은 매력적인 사람인 걸?"

"날 가장 최근에 봤기 때문에 그래. 한국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성격 더럽고 혼자 잘난 맛에 살던 녀석이었거든. 지금도 그 성격이 다 없어졌다고 말 못하겠어."

"정말? 믿어지지가 않는데?"

"뉴욕에 건너오고, 혼자 몇 달 지내면서 성숙해졌다고 해야 되나? 그렇게 되더라. 한국에서의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어. 그리고 깨달았지. 내가 정말 주위 사람들에게 힘들 게 했구나."

"특히 엄마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어. 그런 생각을 하니 내가 너무 못나 보이고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

태호의 넋두리를 다 들은 엘리는 고개를 돌려 태호의 볼에 키스를 한 후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넌 정말 멋지고 섹시해."

둘은 웃고 떠들며 길거리에 파는 타코를 먹고 콜라를 마셨다. 그리고 둘은 호텔로 돌아가 뉴욕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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