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뉴욕 여행1
태호와 엘리가 홀을 빠져나가기 전 딜런과 페니가 다가왔다.
"안녕. 난 딜런이야. 이쪽은 페니. 우리는 이번 11월 초에 있는 클럽 전시회 운영 위원이야. 혹시 권태호 작가가 맞아?"
두 사람의 명함을 받아보니 둘 다 뉴욕 소재의 갤러리 소속이었다.
"어. 맞아."
태호의 긍정에 반색하는 두 사람이었다.
한참을 클럽 전시회에 대해 설명을 했지만 결론은 이거였다.
"혹시 클럽 전시회에 출품해 줄 수 있어? "
태호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얼굴로 딜런을 쳐다봤다.
"흥미롭긴 한데, 내가 계약상 가능한지 확인해 봐야 돼. 확인하고 이쪽으로 연락 주면 될까?"
"좋아. 좋은 소식 기대할게."
*
태호는 윌슨에게 시간 되면 전화 달라는 문자를 보냈고 얼마 후 전화를 받았다.
"작품 한 점이야 큰 대수겠나? 자네 학교 과제로 제출한 작품 중 하나 골라서 내면 될 거 같은데?"
"그저 제출하기 전에 나에게 좀 보여주면 되네. 너무 좋은 작품을 그런 곳에서 팔기에는 좀 아깝지 않을까?"
*
다음날.
태호와 엘리는 같이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기 위해 붙어 다녔고, 예일대 최고의 퀸을 한 동양인이 채어갔다는 소문도 쫙 퍼졌다. 그럼에도 엘리에게 접근하거나 치근덕대는 백인들이 있었는데 둘의 관계가 그렇게 깊지 않다는 소문까지 같이 돌았기 때문이다.
엘리는 한번 손을 잡은 이후 먼저 태호의 손을 잡지 않았다. 태호가 손을 잡아오기를 기다렸지만 태호는 이상할 정도로 스킨쉽이 없었다.
스킨쉽과 상관없이 둘은 시간이 될 때마다 캠퍼스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한참을 찍은 사진을 비교한 후, 결국은 처음 사진을 찍었던 하크니스 타워가 보이는 구 캠퍼스 광장 잔디 밭에서 최종 사진을 찍었다.
둘은 잔디 밭에 있는 큰 나무에 나란히 등에 대고 찍었다. 멀리서 잡았기에 두 사람이 서 있다는 느낌만 났다.
캔버스와 물감 등 유화를 그릴 준비를 한 후 24시간 개방되어 있는 미술실로 간 둘은 태호는 이젤 앞에 앉았고 엘리는 태호 뒤의 의자에 앉아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봤다.
사진은 크게 현상되어 옆에 비치되어 있었고 태호는 사진을 보며 빠르게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스케치는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아 끝이 났고, 태호는 정말 오늘 작업을 끝내겠다는 듯 빠르게 붓 칠을 이어갔다.
엘리는 그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재미있는 친구는 만나본 지는 1주도 채 안 되었지만, 자신의 외모에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깨끗한 매너를 지켰다.
다만 선은 확실히 지킨다고 해야 되나? 순간순간은 자신에 대한 배려가 묻어 나왔지만 절대로 친구로만 봤지 이성으로서의 접근은 없었다. 그래서 왠지 반가우면서도 섭섭한 이중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지금 엘리가 태호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경외감이었다. 하늘이 생기더니 건물이 올라가고 나무가 쑥쑥 자라더니 잔디가 쫙 깔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먼 곳에서부터 시작해서 가까운 곳으로 그려지는데 속도도 놀라웠지만 그 디테일이 더 놀라웠다.
마지막에는 세필로 태호와 엘리를 그렸다. 그렇게 뚝딱 그림 하나를 만들어 내는데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림을 다 그린 태호는 그림을 한쪽에 치우며 중얼거렸다.
"역시 풍경화는 재미가 없어. 하아... 정말."
태호는 뒤에 앉아 있던 엘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엘리, 저기 앉아 볼래?"
"나? 왜?"
"캔버스 작은 거 하나 더 있거든. 널 그려보고 싶어서. 앉아봐."
태호는 엘리가 앉아있던 의자를 들고 햇빛이 직접 비치지는 않지만 그래도 밝은 곳에 의자를 놓고 엘리를 앉혔다. 태호는 이젤을 엘리가 잘 보이는 곳에 위치시킨 후, 겉모습을 빠르게 스케치하자마자 바로 채색에 들어갔다.
엘리의 초상화를 그리기 전 거의 두 시간 정도 작업을 하던 태호는 초상화를 그리던 한 시간까지 포함해 거의 세 시간 동안 말을 안 했다는 것을 깨닫고 채색을 그만두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엘리는 태호 옆으로 와 작업 중이던 그림을 확인했다.
"와. 어쩜 이렇게 잘 그릴 수 있지? 대단하다."
"내가 말도 안 하고 거의 세 시간 동안 그림만 그렸네. 지루했지?"
"아니. 괜찮아. 전혀 지루하지 않았어."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엘리의 표정에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지났음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다는 점이 태호를 더 미안하게 만들었다.
엘리는 완성한 풍경화를 가리키며 물어봤다.
"저건 완성된 거지?"
"완성은 되었는데 그림이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네. 그냥 생애 최초 풍경화를 한번 그려보겠다는 목표만 달성했어. 하하."
*
기숙사로 돌아온 태호는 윌슨에게 전화를 걸어 풍경화를 하나 그렸으니 와서 가져가라는 말을 했다.
“네가 무슨 바람이 불어 풍경화를 다 그렸어?”
“그리긴 했는데 막상 그려놓고 보니 그림이 전혀 흥미롭지가 않더라고요. 팔기도 싫을 만큼요.”
“내가 보고 판단할 테니 그림은 파기하지 마.”
“언제 올 거예요? 혹시 금요일 오후에 오면 안 돼요? 한 2시쯤?”
“무슨 일 있니?
“뉴욕에 놀러 가보려고요."
“뉴욕에? 혼자?"
“친구랑 같이요."
“여자친구니?"
“여자인 친구죠."
“그게 그거 아니야?"
“아직 사귀는 거 아니에요."
“개학한지 일주일 좀 더 된 거 같은데 넌 참 재주도 좋다."
“오실 거죠?"
“친애하는 태호 화백이 여자친구와 뉴욕에 데이트를 가시겠다는데 내가 도와야지. 그림은 얼마나 커?"
“24 x 36 인치요."
“트렁크에 들어가기 딱 좋구나. 오일 페인팅이지? 아직 안 말랐을 테고. 오일은?"
“포피유요."
”쓰던 거 썼네. 금요일에 그쪽으로 가지. 점심 먹고 출발하면 한 2-3시 정도 될 거야. 맨해튼에 내려줘? 아니면 갤러리까지 같이 올래?"
“갤러리 구경도 시켜줄 겸 갤러리로 가죠. 매튜 아저씨 갤러리도 구경하고요."
전화를 마치고 난 후 막 방으로 돌아온 룸메 데이비드는 방 한쪽에 놓인 그림 두 점을 보고 감탄을 했다."
“언제 그린 거야?"
“오늘."
“하나는 캠퍼스 하크니스고, 하나는 엘리지?"
“맞아."
“환상적이군. 저런 그림을 어떻게 하루 만에 뚝딱 그릴 수 있지?"
“엘리 그림은 시작도 안 했어."
“다 그린 그림 아니야?"
“바탕만 그린 거야. 완성하려면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아. 데이비드. 너 뉴욕에 다닐만한 식당 아는 데 있어?"
“뉴욕에 잘 하는 집들이야 많지. 무슨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고."
“한국에서 온 촌놈이 프랑스 미녀와 다닐만한 데는?"
“엘리랑 가냐?"
“어.”
“정말 진도 잘 뺀다. 벌써 뉴욕에 같이 데이트도 가고."
“엘리가 뉴욕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더라고. 나도 그림 그린다고 바빠서 거의 못 돌아다녔어."
“코스는 잡았어?"
“갤러리들 구경하다가 맨해튼에서 저녁 먹고 뮤지컬 보러 가게."
“예약은 안 했겠고. 엘리가 채식주의자는 아니지? 알러지도 없고?"
“채식주의자는 아닌 거 같은데 알러지는 안 물어봤다."
“그건 나중에 물어보면 되고. 패스트푸드도 괜찮은 데는 많지만 너 데이트하려면 코스 요리가 낫겠지? 맨하타라고 증권거래소 근처에 식당이 하나 있는데 식당이 60층에 위치해 있고 가격도 맨해튼에서 그 정도면 저렴하고 가격도 나쁘지 않아. 인당 팁까지 해서 100불 정도?"
“그러네. 위치도 좋은데 가격도 나쁘지 않네."
“그래서 예약이 어마어마하지. 이번 주 금요일에 가능한지는 모르겠다. 거기가 안되면 ‘시티 와인 야드’도 괜찮아. 시푸드인데 실내는 예약해야 되고 실외는 예약 없이 갈 수 있고. 물론 여기도 사람이 많아서 연락해 봐야 알아."
“혹시 전화번호 있어?"
"뉴욕 411에 연락하면 알 수 있어."
“고마워!"
곧 연락을 해보니 맨하타는 이미 한 달 예약이 다 차있어서 접었고, 시티 와인 야드는 5시에 겨우겨우 예약이 되었다.
뮤지컬 캣츠 공연 시간이 8시니까 저녁을 좀 일찍 먹고 공연을 보면 되겠다. 캣츠 상연시간이 2시간 정도니 끝나면 10시고 그 뒤 타임스퀘어를 구경하다가 출출하면 근처 식당에서 야식을 먹고 호텔로 가면 된다. 호텔은 맨해튼에 많은 5성급 호텔 중 비교적 괜찮은 곳을 잡았다.
그 다음 날 아침은 섹스 앤 더 시티의 캐리의 단골집인 사라 베쓰에서 브런치를 먹고 근처 센트럴파크나 근처 미술관을 다니다가 저녁때쯤 펜 스테이션에서 뉴헤이븐으로 돌아오는 경로다.
윌슨은 금요일 2시경에 학교 초입에서 만났다. 윌슨은 엘리를 보고 살짝 놀랐는데 수수하게 하고 나온 앨리지만 그 자체 발광이 어디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로 날 놀라게 하는 구만.” 윌슨이 말했다.
태호는 둘을 간단히 소개하고 가지고 있던 그림을 윌슨에게 건넸다. 윌슨은 그림을 보더니 말했다.
“생각보다 훨씬 괜찮군! 페데르 모크 몬스테드 느낌도 나고.”
“너무 난다는 게 문제죠.”
“그건 칭찬이야. 보니까 막 완성한 그림 같은데?"
“목요일에 완성해 놓고 오늘 아침까지 꽤 고쳤어요. 막상 갤러리에 걸 거라고 생각하니 작품이 조잡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기 나무 근처에 있는 사람은 태호와 엘리겠군. 그림 실력이 더 나아진 거 같은데 아닌가? 뭐랄까··· 좀 더 깊이가 있어졌어. 아, 물론 전에 가벼웠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난 자네가 이 짧은 시간에 그림이 이렇게나 좋아졌다는 게 신기해서 그런 거니."
“그게 보여요?"
“당연히. 좀 더 명암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고 해야 되나? 그림이 더 눈에 잘 들어와. 더 힘이 있어졌고. 신기하군. 어떻게 몇 달 사이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지? 매번 빛의 마리아만 보다가 다른 걸 그려서 그런가? 아무튼 출발하지."
*
뉴헤이븐에서 차로 한 시간 반이 걸려 브루클린에 도착한 후 셋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여전히 갤러리에는 한 관객이 갤러리에 걸린 태호의 그림을 골몰히 쳐다보고 있었다.
양준만 작가의 초상화였다. BP 초상화 대회 이후 양 작가에게 줄까 했는데 윌슨이 두 손을 들고 사정을 해 지금 썬 갤러리에 모셔져 있었다. 판매 목적은 아니고 전시 목적이었다.
윌슨이 갤러리에 들어서자 윌슨의 딸인 제시카가 얼른 다가와 말을 건네왔다.
“패트릭 씨가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렸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윌슨은 웃으며 패트릭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패트릭 씨. 이게 얼마 만입니까.”
둘은 인사를 나누고, 윌슨은 패트릭에게 태호와 엘리를 소개해 줬다.
“이쪽은 권태호고, 이쪽은 엘리 까르띠에에요. 태호는 지금 보고 계신 그림의 작가고 엘리는 태호의 친구로 둘 다 예일대 학생입니다.”
“이쪽은 프랭크 패트릭 씨. 내 오랜 고객 중 하나고 태호의 그림을 오래 기다린 사람 중 하나지.”
인사를 나누자 패트릭은 그림에 대해 궁금했던 점을 하나하나 물어보기 시작했다. 작업 동기부터 제작 과정 그림이 담긴 의미까지. 태호는 어차피 엘리에게 설명해 줬어야 하는 일이기에 자세히 설명을 했다.
"이 그림이 영국의 BP 초상화 대회에서 겨우 주니어 상을 받았다는 건가요? 허 참.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졌군요. 이렇게 멋진 (Gorgeous) 초상화를 그릴 줄 아는 작가가 몇 명이나 된다고."
패트릭은 그림에 대한 다양한 찬사를 늘어놨고, 태호는 그의 찬사에 감사를 표했다. 패트릭이 태호에게 깊은 관심을 보이자 윌슨이 바로 딜러 마인드로 패트릭에게 영업이 들어갔다.
“태호가 최초로 시도한 그림이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아직 물감도 안 마른 작품이긴 합니다만 너무나도 미국적인 작품이죠.”
“오 그거 좋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