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일 아트클럽 (74/181)
  • 74. 예일 아트클럽

    10분 남짓 스케치북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태호의 손이 멎었다.

    태호는 스케치북을 들어 완성된 스케치를 엘리에게 보여줬다.

    스케치북에는 날개를 그려 넣으면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하늘하늘한 엘리가 있었다.

    짧은 시간에 그린 그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디테일이 살아 있었다.

    옷은 간소한 선으로 윤곽만 잡혀 있는 정도였지만 옷을 표현해 내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진짜는 얼굴이었다. 10분 남짓 한 시간에 8분 이상을 얼굴을 묘사하는데 그린 것이 틀림없었다.

    엘리의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완벽히 들어가 있었으며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정성껏 묘사해 냈다.

    이 크로키는 색조를 제외한 그림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엘리는 문뜩 고등학교 미술 시간에 보았던 앵그르의 드로잉 작품들이 떠올랐다.

    발자크에 이어 앵그르라니. 태호와 가깝게 지내고 싶은 또 다른 이유 하나가 더 생겼다.

    태호는 가방에서 작은 라이카 카메라를 꺼냈다.

    "사진기는 왜 들고 왔어?"

    태호가 들고 온 사진기를 보고 살짝 의아한 듯 물어보는 엘리.

    "장면은 잘 기억하는 편인데... 그래도 사진이 있으면 훨씬 작업하기 수월해. 난 사진과 내 기억, 그리고 느낌을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걸 좋아해서."

    "사진은 그 당시의 기억과 느낌을 끄집어 내는 계기를 제공해 줘. 그래서 가능하면 작업할 때 카메라를 들고나가고 찍은 사진은 작품을 그릴 때 많이 참조하고."

    "이젤 들고 밖에서 그리는 거 아니었어?"

    "난 인상파 화가가 아니어서 말이지."

    "그러면?"

    "찍은 사진을 바탕으로 실내서 작업해."

    "그럼 오늘은 사진만 찍으면 된다는 거네?

    "오늘만 찍는 게 아니라 계속 시간 날 때마다 찍어야 돼. 사진은 절대 그냥 나오지 않거든."

    삼각대까지 챙겨온 태호는 구도를 잡고 둘이 담긴 사진을 계속해서 찍었다.

    엘리는 사진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미스 프랑스 선발대회를 나가고 또 우승하면서 정말 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때의 기억에 비추어 지금 태호가 찍는 이 사진 작업은 아마추어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진도 배운 거야? 많이 찍어본 솜씨인데?"

    "아까 보여준 초상화에 있는 분이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사진작가거든. 그분이 프랑스 보그지와 엘르의 사진작가도 오래 하셨다고 하더라고. 난 그렇게 오래 배우지는 못했지만 내가 필요한 사진 찍을 정도로는 배웠지."

    태호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한동안 사진을 찍지 않았는데, 드디어 정말 맘에 드는 모델과 함께 사진을 마음껏 찍을 수 있어서다.

    여기에 양준만 작가에게 배운 인생 최대의 스킬을 써볼 기회가 왔으니 몸이 바싹 달아오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혈기는 곧 차갑게 식었다.

    짜디짠 소금을 한 움끔 입에 문 듯했고, 소금에 절여진 감정은 순식간에 짜기로 졌다.

    전생의 안 좋았던 기억이 현재의 욕망과 혈기를 짓누르는 듯했다. 마치 다중인격이 된 것 같아 태호는 당황스러웠다.

    애써 감정을 추스른 태호는 무덤덤한 척 엘리에게 오늘 저녁에 시간이 있는지 물어봤다.

    엘리는 흔쾌히 수락했다.

    *

    그날 저녁.

    로즈니 홀 701호.

    학부생처럼 보이는 학생들 이외에도 사회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편한 캐주얼 정장 차림으로 자기들끼리도 서로 안부를 확인한다고 바빴다.

    "모두가 바쁘다고 해서 내가 오긴 했는데, 인간적으로 수요일에 뉴욕에서 건너오라고 하는 게 할 짓이야?"

    "난 금요일에 론칭할 전시회가 있는데도 왔어."

    "이런 건 웬만하면 시간 남아도는 작가들 시켜. 우리 같은 봉급쟁이들 시키지 말고."

    "그럼에도 너희들 왔잖아. 뭐 주워 먹을 거 없나 하고."

    "표현 참 저렴하다. 주워 먹는 게 뭐냐? 미래의 클라이언트 확보하려고 온 건데."

    *

    태호는 엘리와 방명록에 이름과 학번 전공을 적고 분위기 파악에 들어갔다.

    캐주얼 정장 차림의 사람들이 어제 제이크가 말한 학교 선배들처럼 보였다.

    나이는 짐작하기 어려웠지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이제 막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실적을 내기 위해 바쁜 와중에도 학교까지 찾아온 듯했다.

    홀 바깥쪽에는 커피포트와 종이컵, 몇 가지 비스킷이 놓여 있었다.

    "이제 막 아트 클럽 첫 번째 모임을 시작하오니 입장해 주세요."

    회색 예일 후드티를 입은 여학생이 방문객들을 안으로 안내했다.

    태호와 엘리는 커피만 챙겨 홀 안으로 들어갔다.

    10분 후, 200명 정도가 들어갈 홀 안에는 반 이상의 자리가 차 있었다. 둘은 가운데 뒤편에 자리 잡았다.

    아트 전공 졸업자 수가 매년 40명이 채 안 되는 걸 고려하면 오늘 참석한 학생은 적지 않은 수다.

    곧이어 학교 선배로 보이는 사람 중 한 명이 강단에 올라왔다.

    민머리에 짙은 회색 재킷을 입은 남자가 마이크를 들고 단상에 나와 클럽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오버헤드 프로젝터로 사진을 띄웠다.

    "화가, 조각가, 사진작가, 도예가, 그리고 많은 예술 전공자에게. 오늘 예일대 아트 클럽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은 많은 시각 예술가들이 모여 함께하는 클럽입니다."

    "예술가들을 위한 다양한 지원과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며, 당신의 상상 속에 있는 걸작을 실현 시키고 이를 다양한 전시 장소에 전시하여 여러분을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 클럽의 설립 목표입니다."

    "예일 아트클럽은 40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클럽입니다. 여기 보이는 사진은 초기 아트클럽 회원들이 모여 찍은 사진입니다."

    <중략>

    "현 클럽 회장이며 뉴욕 미술관의 큐레이터인 애슐리 스튜어트입니다. 그녀는 지금의 아트클럽을 만든 장본인입니다."

    "그녀는 클럽의 활동이 소극적이며 너무 예술가 위주로만 흘러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그 결과 현재 클럽의 회원 수는 학부생은 62명, 대학원생은 32명, 동문 중 클럽에 적을 유지하고 사람은 약 500여 명으로 아마 뉴욕 등 동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대학에 기반을 둔 예술 동문회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저는 가고시안의 큐레이터인 로이 리퍼드이며 클럽의 부회장입니다. 애슐리가 최근 전시회로 매우 바빠 제가 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늘 그랬듯이 애슐리가 기획한 전시회에는 클럽 회원분들을 대상으로 초대장을 발송될 예정이오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예일 아트 클럽의 회원직을 유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대부분 11월 초에 뉴욕 첼시에서 클럽 이름으로 열리는 전시회 때문입니다."

    "굵직한 전시회가 다 끝난 중형 전시관을 빌려 2박 3일 동안 순수히 클럽 회원들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전시회가 열립니다."

    "작년에 열린 클럽 전시회에 약 10만 명의 관객이 방문하는 대 성황을 이뤘습니다. 이를 기반으로 올해는 조금 더 큰 전시관을 빌려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기도 합니다."

    "주로 학교를 졸업하고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한 아티스트들에게 자신을 홍보하는데 매우 좋은 기회를 제공합니다."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실제 판매가 되는데, 작년 거래액이 약 20만 불에 달했습니다. 전시회를 방문하는 관람객은 큐레이터, 딜러, 후원인, 일반 관람객 등 다양하며, 전시회를 통해 아티스트를 후원하고, 정식 계약이 이어지기도 합니다."

    "저렴한 가격에 미래의 거장의 작품을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도 할 수 있죠. 미국 최고의 아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예일대 학생들의 최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신인 발굴에 목말라하는 뉴욕의 많은 딜러들이 꼭 찾아보는 중요한 전시회로 발돋움 하고 있습니다."

    로이는 다음 사진을 띄웠다.

    "이 사진은 작년 전시회 때는 저의 보스인 래리 가고시안이 방문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왼쪽이 저고 가운데가 래리, 오른쪽이 닉 케이브입니다."

    "닉은 저도 오래전부터 알던 친구로 2년 전 예일대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래리는 닉 케이브의 작품을 처음 만났고 바로 사랑에 빠졌죠."

    "그는 그날 닉에게 전속 계약을 제시했고 닉은 3일을 고민한 후 그 제안을 수락, 올해 뉴욕에서 가장 핫 한 비주얼 아티스트가 되었죠."

    로이는 닉 외에 다른 아티스트들의 활동을 클럽이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클럽의 상업성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며 발표를 마무리했다.

    "예술의 상업성을 경계하시는 분들 중에 클럽의 상업적 활동이 과도하다고 비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희는 그 의견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지나친 상업성에 대해 경계합니다. 다만 클럽을 사랑하고 이를 유지하기를 원하시는 분들이 매우 많으며, 그분들은 지금 정도의 상업성을 유지하는 게 필요하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한 회원분들은 일부러 클럽의 전시회에 자신의 작품을 거래하도록 해 전시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도록 도와주시기도 합니다. 전시회에서 거래된 금액의 10%는 수수료 명목으로 기부되기 때문이죠."

    "올해도 많은 분들이 클럽에 가입하시고 클럽 활동에 적극 참여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이가 내려간 뒤로 여러 스태프나 졸업생 동문들이 강단에 올라와 클럽 활동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회비 등에 설명했다.

    법대로 유명한 학교답게 현직 변호사인 회원이 올라와 클럽과 관련된 여러 가지 법률 내용을 설명했다.

    그전까지는 학생들이 편하게 클럽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면, 변호사가 발표하니 훨씬 긴장감이 있었고 뭔가 집중하게 되었다. 마치 스타트업 투자 발표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발표 와중에도 동문 선배들은 눈에 레이터를 켜고 처음 보는 신입생을 찾아 나섰다. 늘 그렇듯 엘리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이게 왠 미인' 이런 표정을 짓다가 그 옆에 앉아 있는 태호를 봤다.

    "어디서 봤더라?"

    딜런이 혼잣말을 하자 옆에 있는 페니가 대답했다.

    "누굴 얘기하는데?"

    "저기 가운데 뒤쪽에 앉아 있는 동양인 남학생."

    "옆에 앉아 있는 여자는 정말 이쁜데?"

    "그 여자 이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남학생을 한번 봐봐."

    "누군데?"

    "너 쟤가 누군지 정말 모르겠어?"

    "누군데?"

    "하, 진짜 너도 너무한다. 요즘 가장 핫한 작가인데?"

    페니도 참시 생각하다 알아 본 듯 말했다.

    "그 Faceless 그린 애? 빛의 마리아던가? 닮은 거 같기도 하고."

    "닮은 게 아니라 쟤가 맞아."

    "쟤가 여길 왔다고? 왜 왔지? 바로 현역 뛰어도 될 거 같은데."

    "무슨 배경이 있어서 쟤가 바로 현역을 뛰냐?

    "무슨 소리야. 쟤가 그린 작품이 이미 빌바오에 몇 점이나 들어가 있는데."

    "그래? 그건 몰랐네. 아무튼 여기 있으니까 잡아야겠지? 쟤가 이번 클럽 전시회에 작품을 제출하면 대박 날 것 같은데..."

    "당연히. 그런데 쟤 딜러가 있지 않을까? 거부할 수도 있을 텐데?"

    "안되면 할 수 없고. 물어보지도 못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