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예일대 - 시작3
예일대는 신입생에게 필수 교양으로 들어야 하는 1학점짜리 세미나 수업이 있다
그중 하나는 아트 산업에 대한 소개로 꽤 인기 있었다. 청강 가능한 학생 수가 20명이 채 안 되기에 서둘러 등록해야 했다.
ART 010 Introduction to Art Industry (아트 산업에 대한 소개)
강사의 이력이 특이했다.
예일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시각 예술 아티스트였다.
예일대 경제학 박사라면 어디를 가든지 최소 2-3억의 연봉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할 수 있는데, 본업이 아티스트라는 걸 보면 자유로운 영혼 아니면 기인인 듯했다.
윌리엄 홀 2층에 자리 잡은 교실은 18명의 학생이 자리를 잡자 꽉 차 보였다. 남학생과 여학생의 비율은 1:2 정도. 남녀 차별 없이 거의 대부분 학생의 귀에는 숫자의 차이만 있을 뿐 귀걸이가 있었다.
그중 반은 귀 이외의 신체에 피어싱이 있었다. 코는 이해가 됐는데 눈썹이나 입술 밑은 보기만 해도 아파 보였다.
두 명의 남학생이 특이했는데, 한 명은 올 블랙 앤드 가죽 드레스에 영화 헬레이저의 핀헤드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피어싱이 돋보였고, 다른 한 명은 오른쪽 귀에만 귀걸이가 있었는데 심벌이 돋보이는 스키니진을 입었다.
마징가 Z에 나오는 앞으로 다이 A의 미사일 같았다. 태호는 마주칠까 바로 두려워 바로 눈을 돌렸다.
태호는 영화 세트장처럼 느껴지는 교실 중간쯤에 앉아 몇 분 동안 심각하게 수업을 바꿀까 고민했다. 그러다 강사가 등장해 교단 앞에 섰다. 오른쪽 귀에만 피어싱이 있었는데, 옆의 스키니진 가이의 눈빛이 바뀌었다. 태호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둘은 동족이었다.
"오늘부터 한 학기 세미나 수업을 함께 할 에이든 스미스라고 합니다. 예일대에서 예술 시장 관련 주제로 Ph.D (박사)를 받았고 현재는 시각 예술 분야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실제 작품을 제작하고 판매하고 있으며 계약한 갤러리는 첼시의 메트로 갤러리 소속이니 혹시 갤러리에서 내 이름을 보거든 주위 사람들에게 아는 척을 해주기 바랍니다."
"이번 학기 세미나의 주제는 예술 시장입니다. 여러분 중 몇 명은 졸업 후 예술 업계에서 일하고자 하는 생각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를 위해서는 동시대의 예술 시장의 이해는 필수입니다."
"현재 뉴욕과 런던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예술 시장과 그 안의 여러 플레이어들에 대한 가장 최신 정보를 노골적으로 전달해 드릴 것입니다."
"만약 내 강의가 성공적이라면 여러분 중 상당수가 커리어 계획을 바꿀 것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하는 수업이니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예상하던 세미나가 아니라고 판단되는 사람은 지금 바로 수업을 나가서 다른 세미나 수업을 신청하시면 됩니다. 아직 코스를 바꿀 수 있는 기간이니 말이죠."
에이든은 얼굴을 익히려는 듯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눈빛이 먹이를 찾는 야수 같았다.
"이 중에서 예술 분야에서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손 좀 들어보겠어요?"
한두 명을 제외한 교실에 있는 전원이 손을 들었다.
에이든은 아이들을 갈굴 시간이 왔다는 듯 더욱 사나운 미소를 띠었다.
"먼저 여러분이 발을 내디디려 하는 예술 분야는 어마어마한 가치를 가진 시장입니다. 1996년도에 전 세계에서 거래된 예술품의 가치는 약 $14B (약 12조원) 이었는데 91년도에 $9.7B (7조4천억원)에 비하면 44%의 성장을 보였습니다. 성장세가 매우 가파르죠."
"데미안 허스트라는 영국 작가는 호주 앞바다에서 잘 살고 있는 불쌍한 타이거 상어를 잡아와 포름알데히드가 가득 찬 유리 수조에 넣고 '살아 있는 자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의 육체적 불가능성'이라는 진부한 이름을 붙인 다음에 무려 1200만 불에 팔았습니다."
"물론 이는 부풀린 가격이고 실제 가격은 800만 불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는 이 불쌍한 상어가 담긴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껏해야 일이만 불 정도의 돈을 들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상어 가격이냐고요? 아니죠. 상어는 몇 천 불도 안 했을 겁니다. 상어를 안 썩히고 영국으로 배송하는 배송비가 더 들었을 것을 확신합니다. 예술 산업은 만 달러가 800만 달러가 되는 엄청난 고부가가치 산업입니다."
"여기에, 누구라도 아티스트가 될 수 있습니다. 19세기까지는 아카데미를 나와야 되었지만, 20세기에는 그마저도 필수 조건은 아니었습니다."
"피카소는 15세에 입학했던 아카데미의 수업을 땡땡이치고 미술관에 놀러 다녔죠. 그렇지만 20세기 최고의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더더욱 제한이 없습니다. 아카데미는 없어졌으며, 아티스트가 되기 위한 등용문 또한 없습니다. 학교가 무슨 상관입니까? 그림을 팔 수만 있다면 말이죠."
"문제는 '이 그림을 팔 수가 있느냐'입니다. 여러분들 중 자신의 작품을 판매해 보신 분들이 있나요? 손 좀 들어보시겠어요? 가족 친지 친구에게 판 거 말고 순수한 타인에게 팔아본 적이 있는지 말이죠."
네 명이 손을 들었다. 그중 하나는 태호였다. 에이든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림 값이 천불 이상인 경우는 있었나요?"
세명은 바로 손을 내렸지만 태호는 내리지 않았다. 겸손은 미국에서 절대적으로 추구해야 할 미덕은 아니다.
불필요한 자랑은 게이의 불필요한 관심을 끌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을 드러내는데 주저하지 말라는 두 교수의 조언도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얼마에 팔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에이든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물어봤다.
"만 불 이상이요." 태호는 뒷자리 두 개를 누락 시켰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백만불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교실에는 작은 탄성이 일었다. 스키니진이 흥미로운 눈빛으로 태호를 쳐다봤다. 각오한 일이지만 태호의 등은 긴장으로 정전기가 일어난 듯 따끔따끔했다.
"대단하네요. 평생 동안 저 가격에 그림을 팔지 못하는 아티스트들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이랑 같은 미래를 택한 수많은 사람들이 바로 저런 운명 맞딱드리게 되지요."
"예술을 전공하는 사람들 중 자신의 작품을 판매하지 못하고 꿈을 접거나 다른 커리어를 택하는 사람이 전체 도전자의 90%를 넘고, 나머지 10%가 생산하는 작품의 90%는 50년 안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중 대부분은 쓰레기통으로 사라질 겁니다. 옛날에는 전쟁 등으로 파손되었지만, 지금은 전쟁이 흔히 일어나는 시대도 아니지요."
"매우 경쟁이 치열한 산업이지만 성공할 경우 그만한 보상이 있습니다. 타임지에 나오는 100대 예술가들을 보면 예술가들은 어마어마한 돈을 법니다."
"지금도 뉴욕의 크리스티나 소더비의 경매장을 가보면 예술가들의 작품이 수백수천만 달러의 가격에 거래가 됩니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작품을 만드는데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가지 않는 경우도 많다는 점이죠. 컨템퍼러리 아트의 경우, 그림 실력보다는 아티스트들의 아이디어나 철학이 더 중요합니다."
"과거 19세기에 요구되던 숙련된 제작 실력도 요구되지 않는다는 점이 더욱 매력적입니다."
"미술가란 정말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명성입니다."
"자, 여러분이 상경계열 학부와 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남들이 다 알만한 투자은행에 취직을 했다고 칩시다. 그곳에서 하루에 18시간씩일을 하며 실적을 내 진급을 하면 연봉 뒷자리에 0이 6개씩 붙습니다."
"18시간은 진짜 입니다. 어느날 우연히 만난 친구의 여친이, '남자친구가 너무 바빠서 자신과 섹스할 시간도 없다'며 제게 불평할 정도 입니다."
"사내 정치까지 잘해서 회사 내 최고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당신을 이렇게 부르겠죠. 무슨 은행의 아무개. 이게 무슨 뜻이냐면 은행에 속해있는 아무개라는 말입니다. 은행의 명성에 기댄 아무개라는 말이죠."
"반면에 예술가는 다릅니다. 당신의 이름 앞에 회사 이름이 붙지 않습니다. 당신은 오롯이 당신으로 세상에 섭니다. 시장에서 당신만이 고유하죠."
"이렇든 매력적인 직업에 많은 사람들이 몰립니다. 이 시장에 참여하는데 특별한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허가 없이 예술가로 활동하고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았기에 당신을 체포합니다.'라고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처럼 듣기 싫으니 가수 활동을 중지하시오. 아니면 고소하겠소.' 이러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입니다."
"옛날에는 그림을 그리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재료가 매우 비쌌기 때문이죠. 지금도 가장 비싼 미술재료인 울트라마린의 가격은 같은 무게의 황금과 맞먹습니다."
"값싼 합성물감이 없던 과거에는 천연 안료로 그림을 그려야 했으며 안료를 만드는 데 노동력이 많이 들었기에 가격이 매우 비쌌습니다."
"그림을 그렸는데 고객이 맘에 안 든다며 인수를 안 해간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 자체가 거대한 리스크를 내재한 행위였던 것이죠."
"반면에 지금은 값싼 재료가 넘칩니다. 그림을 못 그렸다? 마음에 안 든다? 괜찮습니다. 당신 집 앞의 쓰레기통은 항상 열려있죠. 가서 버리면 됩니다."
"지난 10년간 호주 예술가들의 소득을 연구한 자료가 있습니다. 평균 30% 정도 감소를 했죠.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0년간 미술시장이 계속해서 커졌지만 예술가의 수가 더 증가했기에 그들의 평균 소득은 내려갔습니다."
"사람이 몰리고 재료값이 싸 작품이 대량생산됩니다. 경제학에서 공급과 수요 곡선을 학기 맨 처음에 배웁니다. 경제학의 알파요 오메가가 바로 이 공급과 수요 곡선입니다."
"공급이 수요보다 높으면 가격이 내려갑니다. 여기에 예술시장은 철저히 승자독식의 현상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피카소의 사인이 담긴 우스꽝스럽게 생긴 진품 한 점을 원하지, 이름도 없는 작가의 잘 그린 초상화를 원하지 않습니다."
"예술 작품은 예술가의 혼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고유한 가치죠. 스승보다 더 작품을 잘 제작하는 제자의 작품보다, 예술가 본인이 그린 진품에만 작가의 예술혼이 담겨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작품의 가치를 상징합니다."
"이런 작품의 고유성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가짜 상품이 제작되고 시장을 교란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합니다. 추후 다룰 주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에이든의 세미나의 상당 부분은 이미 한국의 두 교수에게 배웠다. 차이점은 에이든의 발표가 훨씬 더 매끄럽게 논리적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났다.
슬라이드를 통해 계속해서 그림과 데이터 수치를 보여주며 세미나를 이어가니 학생들은 그의 강의를 절대 진리처럼 믿었다. 태호가 봐도 속임수나 눈가림이 전혀 없었다.
끔찍한 팩트 폭행에 머리가 얼얼했지만 이 교실에서 오늘의 세미나로 진로를 바꿀 학생은 없을 것이다.
예술가로 밥 먹고살기 힘들다는 사실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이 세미나를 듣는 이유는 이 직업에 내포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지 회피할 수 있다고 믿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직업군은 리스크가 없는가? 아니다. 단지 예술가라는 직업이 갖는 리스크가 조금 더, 아니 많이 더 높지만 에이든이 언급한 몇 가지 장점을 바로 보고 기꺼이 감수하는 것뿐이다.
에이든은 다음 세미나부터 조금 더 현실적인 뉴욕 아트 마켓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겠다며 마무리했다. 그는 아주 잠깐 태호를 눈여겨 보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태호도 바로 교실을 떠나려 했지만 스키니진이 좀 더 빨랐다.
"헤이, 난 제이크. 만나서 반가워."
태호는 당황했지만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제이크의 인사를 받았다.
"난 태호."
딱히 할 말이 없었기에 태호의 대답은 짧았다.
"혹시 아트 전공이야?"
"맞아... 넌?"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봤다.
"나도 너랑 전공이 같아."
이 녀석을 4년 동안 봐야 하다니 아찔했다.
"니가 그 유명한 태호구나. 학교에서는 나름 유명해. 네 친구 엘리 때문에."
"아, 그래?" 태호는 영혼 없이 대답했다.
그러다가 태호의 머리속은 순식간에 뒤죽박죽이 되었다. 갑자기 엘리가 왜 나온다는 말인가?
"그만한 미녀가 이 학교를 다닌다는 게 이상한 일이니까."
"그래도 소식이 유난히 빠른데? 엘리가 미국에 온 지 이제 3주도 되지 않았어."
태호가 의아해서 물었다.
"유달리 그쪽 인적 자원에 민감한 애들이 있거든. 우연치 않게 나와도 인연이 있는 애들이 그쪽에 있어서."
"누굴 얘기하는지 모르겠어."
"레즈비언 들."
태호는 레즈비언이 왜 미녀에 민감한지 알아차리지 못했고, 게이가 레즈비언과 친한지 어떤지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지만, 서로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 친하게 지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아트 클럽이 있는데 참석하지 않을래? 이름은 예일 미술 협회 (Yale Art Assocication). 비주얼 아트 관련 학부생들과 대학원생들이 많아. 다양한 크리에이터들이 모여서 같이 창작 활동을 하고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해. 이 클럽 출신들이 뉴욕에서 많이 활동해서 나름 유명하거든."
태호는 나름 방문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름만 들어봐서는 성소수자를 위한 클럽이 아니었으니까.
"어떻게 참석하면 돼?"
"내일 오후 7시, 로드니 홀 3층 311호."
"좋아. 가능하면 참석할게."
방에 돌아오는 길에 태호는 이 아트클럽이 어디선가 들어본 듯하다는 것을 알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윌슨이 예일대 입학을 추천한 이유 중 하나였다. 어떤 클럽인지 확인해 보고 나서 윌슨에게 추가적인 조언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엘리랑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