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예일대 - 시작2
데이비드는 엄마가 경고를 날리거나 말거나 금요일 밤 캠퍼스에서 가까운 프랫 (Fraternity, 프래터니티, 클럽형 기숙사)을 방문했다.
금요일 밤 8시쯤 도착한 프랫에는 이미 사용한 빨간색 플라스틱 맥주컵이 도처에 널려있었고 방에는 담배 냄새와는 다른 역한 냄새와 남녀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방안은 매우 어두웠는데 간간이 할로겐램프가 조도를 낮춘 채 켜져 있었고 벽에 있는 다양한 해골 장식과 형광빛으로 번들거리는 양주병으로 가득했다.
위 층은 크게 둥둥거리는 우퍼 소리와 미러볼이 현란한 불빛을 만들어 내고 있었고, 그 앞에는 몇 명의 남녀가 춤을 추고 있었는데 옷만 입고 있다 뿐이지 둘이 같이 침대에 들어가기 전 몸을 달구고 있는 단계였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음악 소리 때문에 거의 악을 쓰듯 태호가 물었다.
"내 고등학교 선배들이 다 여기 살아. 나도 여기 들어가고 싶어 했는데 엄마 때문에 기숙사 간 거야."
전에 명문대 출신 집안은 프랫도 같은 곳을 선택한다는 글이 기억났다.
"네 아빠와 형도 프랫에서 지냈어?"
"어."
앨리스가 프랫을 매우 싫어하는 게 바로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태호는 데이비드의 소개로 몇몇 학생들과 통성명을 했다. 태호도 별 관심이 없었지만 데이비드의 친구들은 더 관심이 없었는지 데면데면하게 인사만 했다.
데이비드는 잠시 자리를 비우더니 두 손에 맥주잔을 가득 채우고 등장했다.
"맥주네? 무슨 브랜드야?"
"밀러"
"먹어도 돼? 나중에 경찰이 방문하는 거 아니야?"
태호는 손으로 팔목에 수갑을 채우는 시늉을 해 보였다.
"경찰은 신고 없이 방문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여기 술은 21세부터 살 수 있는 거지? 한국은 19세부터인데."
"운전도 16살부터 하고, 결혼은 18살, 전쟁 징집도 18살부터 가능한데, 왜 술은 21살부터인지 이해를 할 수가 없어. 심지어 총도 18세부터 구입할 수 있어."
"금주법도 하는 나라잖아. 그래도 21살부터 허락해 주는 게 어디야."
"흥. 코네티컷은 일요일과 크리스마스 땐 술을 팔지 않아."
"일요일은 경건하게 교회 가라는 거야?"
"그렇지. 평생을 일요일 아침에 잠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어."
"엄마가 교회 열심히 다니시나 봐?"
"가시려면 혼자 가시지 늘 늦잠 자는 아빠까지 일요일 아침에 깔 맞춤 정장 갖춰 입고 교회 간다고. 태호, 넌 종교가 뭐야?"
"친할머니가 불교 신자 셔. 어렸을 때 할머니 따라 절에 많이 다녀봤지. 엄마는 크리스천. 가톨릭. 성당 다니셔. 엄마 따라 성당도 많이 가봤지."
"너는?"
"프리 싱커. 자유로운 영혼이지."
"좋네."
"종교에 구애받는 성격은 아니라서. 난 코란도 읽어봤어. 유목 민족의 풍습이 반영되었다는 것 빼고는, 그 부분에서 이해 안 되는 게 좀 있지만, 훌륭한 내용이 많아. 난 라마단이라는 금식 기간이 제일 인상적이었어. 어느 종교가 가난한 사람들 경험하라며 한 달을 금식 기간으로 정하겠어?"
"이슬람 쪽은 아는 바가 없네. 내 주위에는 거의 개신교야. 가톨릭도 얼마 없어."
"한국은 전 인구의 1/4는 개신교인 거 같고, 1/4는 불교, 1/8은 가톨릭. 숫자는 정확하지 않아도 대충 이런 듯한데? 정확하진 않아."
"개신교 숫자가 많네? 불교는 옛날에 들어왔을 테고. 가톨릭 숫자는 생각보다 적고."
"2차 대전 끝나고 미군이 한국에 들어왔잖아. 그때 개신교도 같이 들어왔지. 미국에 우호적이었던 한국 사람들이 미국이 들여온 종교에도 우호적이었던 거지. 지금은 비행기가 공항에 랜딩 할 때 하늘에서 도시를 이렇게 보면 공동묘지 같아. 교회가 너무 많아서."
"교회가 많은 걸 어떻게 알아?"
"한국은 교회에 십자가를 걸고 그걸 빨간색 네온사인을 달거든. 워낙에 개척 교회가 많다 보니까 한 상가 건물에 교회가 2개씩 있는데도 있어. 상가 건물마다 교회가 있는데 어떤 데는 두 개씩 있고. 그 교회가 다 빨간 네온 십자가를 켜 놓으니까 밤에는 하늘이 다 뻘게."
"난 첨 들어보는 전통인데? 그러고 보니까 내가 다닌 교회엔 뭐가 있었지? 기억도 안 나네. 뭐 없었던 거 같은데. 네온사인 같은 건 안 켜놨어. 확실히."
둘은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들이켰다. 주제는 종교에서 정치로 넘어갔고, 결국엔 이성에 대한 얘기로 넘어갔다.
"태호, 넌 여자친구 있냐?"
"사귀는 애는 없어. 넌?"
"깨진지 좀 되었네. 난 여기로 왔는데, 제시는 뉴욕대로 갔거든. 아, 제시는 전 여자친구. 난 롱디스턴스 (Long Distance, 장거리 연예)는 자신이 없어서. 연락은 가끔 하는데, 딱 그 정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더라."
"여기서 찾지 그래? 오늘 여자들 많은데? 우리 학교에 이렇게 이쁜 애들이 많았어? 저쪽 봐봐."
태호는 고개를 살짝 돌리며 턱 짓으로 반대편 방에 있는 여학생들을 가리켰다.
데이비드도 뒤에서 한 무리의 여학생들을 발견했다.
"근처의 다른 학교 애들이 놀러 온 거겠지. 근처에 대학교 많잖아."
"저 중에 누가 제일 예쁘냐?" 태호가 물었다.
"난 저 키 큰애 앞에 있는 애. 노란색 티."
"선 굵은 애를 좋아하나 봐? 브룩 실즈 필 나는데?"
"키 큰애도 괜찮긴 한데, 난 아담한 스타일을 더 좋아해서. 너는?"
"난 키 큰 애. 내가 청순한 스타일을 좋아해서. 그런데 경쟁자가 좀 많다?" 태호가 말했다.
"너? 아니면 나?"
"둘 다인 거 같은데. 남자들이 주위를 완전히 삥 둘러쌌는데? 문밖에도 기다리고 있어."
"줄 서야 되나? 누가 번호표 발권 하나 봐봐. 크크."
*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여학생 중 키가 큰 여학생이 태호 쪽으로 다가왔다. 끝없이 말을 걸어오는 남자들을 피해서 오는 듯했다.
그녀는 다가오다 태호를 보고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약간은 주저하는 듯이 태호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안녕. 난 엘리. 넌?"
"하이. 난 태호."
앨리는 더 놀란 얼굴로 태호를 쳐다봤다.
"태호? 혹시 화가니? 한국에서 왔고?"
"어? 나를 알아?"
"만약 내가 생각하는 태호가 맞는다면, 알아. 신문에서 네 기사와 사진을 본 적이 있어. 빛의 마리아의 작가, 권태호 맞지?"
태호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 상당히 놀랐다.
"어 맞아."
"우와. 신기하다. 널 여기서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
앨리는 큰 눈을 반짝이며 태호를 쳐다봤다. 마치 팝 스타라도 본 표정이었다.
태호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데이비드 네 식구도 자기를 알아보는데 처음 보는 이 여학생까지 자신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지 말이다.
"신문 기사를 본 정도로 나를 알아봤다는 게 신기한걸."
"얼마 전 다큐멘터리에서도 봤어. 권태호라고 나오던데? 내가 이쪽에 좀 관심이 많아서."
태호는 자신이 알기로 다큐멘터리를 보는 인구층이 얇은 것으로 아는데 이 생각을 수정해야 될 듯했다. 알기로 전체 인구의 10% 정도라던데.
"아, 그렇구나."
"신입생이야?"
"그래. 넌?"
"정말 신입생?"
"여기 미국 학생들보다 나이는 좀 더 있지만 신입생은 맞지."
"난 교환학생."
"어디서 온 거야?"
"프랑스 파리, 소르본 대학교."
"난 한국."
"일본 옆에 있는 나라 맞지?"
"맞아. 잘 아네."
"전에 일본에 몇 년 살았었거든."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룸메가 이 프래터니티에 친구가 많다고 해서 와봤어. 딱히 재미는 없어 보이지만 서도.
"나도 같이 온 애가 오자고 해서 왔어. 여기가 예일에서 제일 유명한 프랫이라고 하더라고."
앨리의 억양에는 불어 억양이 어느 정도 있었다.
"영어보다는 불어가 아직 더 편하겠다?"
"맞아. 미국 온 지 이주도 안되었어."
"그래?" 태호도 슬쩍 불어를 써봤다.
"불어 할 줄 알아?" 반가워하는 엘리.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하고 있어. 나름 열심히 배웠지."
엘리는 말문이 터진 것처럼 속사포로 말 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태호는 알아듣는 건 문제가 없는데 모르는 단어가 섞여 있어서 다 완벽하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잠깐만 엘리. 내가 막 배우고 있어서 불어에 능숙한 건 아니어서 그런데 조금만 쉬운 단어로 얘기해 주면 안 될까?"
"미안 미안. 지난 이주 동안 답답해 미치는 줄 알았어.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표현이 안되는 게 얼마나 답답한 줄 알아?"
"알지. 내 불어가 지금 그렇잖아. 일본 살았다고 했지?"
태호는 일어로도 슬쩍 물어봤다.
"어, 일어도 할 줄 알아?" 엘리는 다시 한번 놀라며 말했다.
"한국어하고 일어하고 문법이 비슷해서 처음에는 쉽게 배워. 깊숙이 들어가면 어렵지만. 일본에는 얼마나 산 거야?"
"거기서 중학교 졸업하고 파리로 다시 갔어. 아빠 직업이 외교관이었거든."
태호와 엘리는 간단히 서로의 호구 조사를 시작해서 연애사까지 쫙 파악을 끝냈다.
엘리의 전공은 정치학으로 생일은 엘리가 몇 개월 빨랐다. 태호는 학교를 늦게 갔고 엘리가 교환 학생을 조금 늦게 온 경우였다.
"혹시 불어는 어디서 배운 거야? 왜 이렇게 옛날에나 쓰는 표현을 써?"
"그래? 책으로 배웠더니 이 모양이네. 얼마나 오래된 표현인 거 같아?"
"1차 세계대전 전에 쓰던 표현들을 써. 내 생각엔 그거보다 오래된 거 같은데?"
태호는 할 말이 없어 겨우 떠올린 게 교재 탓이었다.
"교재를 잘못 골랐나 보다."
"내가 고쳐줄까?"
"그래 주면 내가 고맙지. 흠... 난 뭘 도와줘야 되나?"
"너 철학이나 미술사 쪽 잘 알아? 근데 동양 철학하고 동양사야."
"어 잘 알아. 그런 수업도 들어?"
"신선하잖아. 이 학교가 그쪽 프로그램도 잘 되어 있는 편이고."
"나는 이 학교에 대해서 잘 몰라. 뭐든 잘 되어 있겠지."
"점심은 어디서 먹어?"
"보통 기숙사에서 먹는데?"
"그럼 담주에 실리만 칼리지 다이닝 홀에서 먹어보자. 가보고는 싶었는데 혼자 가기 뻘쭘했거든."
"같이 온 친구는?"
"쟨 벌써부터 남자친구가 있어서 걔랑 붙어 다녀. 오늘 여기도 쟤 남자친구 때문에 온 거야. 전화번호 줘. 그럼 내일 12시에 입구에서 보자. 내일 봐."
엘리는 태호의 전화번호를 받아서 사라졌고, 그동안 안 보이던 데이비드가 갑자기 나타났다.
"태호, 너 대단하다. 전화번호 교환한 거지? 쟤 누군지 알아?"
"엘리라는 교환 학생이라던데?"
"미스 프랑스 출신이래. 캠퍼스에 소문 쫙 퍼졌다던데?"
"그래? 그러고 보니 예쁜 얼굴이긴 하다."
"우와, 이 복도 많은 녀석. 저런 프랑스 미녀를 꼬신 거야?"
"꼬시긴 뭘. 인사하고 통 성명한 게 단데."
"사귈 거야?"
"사귀긴. 얼마 뒤에 갈 사람하고."
"더 좋잖아. 화끈한 프랑스 여인과의 일 년. 더군다나 미스 프랑스인데."
"밤이어서 그런가 난 그렇게 예쁜 거 모르겠던데."
"낮에 실제로 보고도 그런 얘기 하는지 보자고."
엘리가 떠나자 알게 모르게 프랫 내의 긴장감이 확 떨어졌고 그 반작용으로 모든 남자들의 적의가 고스란히 태호에게 향했다. 슬슬 눈치를 살피던 데이비드도 별수 없이 태호와 같이 기숙사로 돌아갔다. 캠퍼스의 첫 금요일은 그렇게 태호만 이득을 본채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