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빛의 마리아IV 제작2 (feat 미즈 테일러) (66/181)

66. 빛의 마리아IV 제작2 (feat 미즈 테일러)

태호가 스케치를 하는 사이, 미술관으로 몰려든 갤러리 중에는 아주 특별한 노부인이 있었다. 그 노부인은 태호가 작업을 시작한 이후 몇 번 마주치고 태호 뒤에서 그림을 한동안 보더니 사라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부터인가부터 태호 뒤에 고급스러운 의자가 놓이더니 그 노부인이 앉아서 태호의 그림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태호는 이 노부인과 얘기할 기회가 생겼다.

"내 이 미술관만 삼십 년째 거의 매달 한 번씩 방문했다오. 자네처럼 저 그림 앞에서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것만 해도 10번이 넘어요. 대부분 완성을 하진 못했지요."

10번도 넘는 다는 얘기에 태호가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자 노부인이 말했다.

"워낙 오래전 얘기이기도 하고, 내가 운이 좋아 볼 수 있었던 거지, 다른 사람들이 볼 기회조차 없었다오."

태호는 이 호의적인 노부인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혹시 그림이 공개된 적이 있습니까?"

"아니. 대중에게 공개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여기 이사진들이랑 주요 후원자들이 모여서 결정하거든. 지금까지 그림들은 아마 여기 있을 거에요."라면서 노부인은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마 미술관 수장고이던지 쓰레기통이던지. 그것도 아님 소각로에서 사라졌으리라.

"이 그림도 그렇게 될까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신은 좀 달라 보여요. 뭔가 특별한 게 느껴지거든. 난 느낄 수 있지요."

"그러고 보니 제 이름도 알려드리지 않았네요. 전 권태호입니다. Faceless에 얼굴을 그려줄 도전자죠."

"정확히는 27번째 도전자랍니다. 처음에는 몇 번째 도전자인지 공개했지만 30년 전부터 도전자의 명예를 생각해서 비공개를 원칙으로 하지요. 난 미즈 테일러에요. 이래 봬도 태호가 그린 그림에 대해 첨언 정도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요."

"미즈 테일러. 반갑습니다."

"내 태호를 많이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해요. 방해 안 되게 멀리서 구경만 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네 미즈 테일러. 전 상관없습니다."

*

스케치까지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채색은 조금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Wet on Dry이니 어쩔 수 없었다. 관람객들은 태호의 그림이 다소 느리게 진행되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면서도 태호가 그림을 그릴 때는 숨죽여 지켜봤다. 위에는 감시 카메라, 옆에는 PBS의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었고, 보안 요원 하나가 멀지 않은 곳에서 줄 곳 이곳을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이 작품에 대해 잘 아는 뉴요커들은 Faceless에 도전하는 새로운 작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정숙하는 분위기였다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먼 길을 온 관광객들은 작품 관람을 방해하는 이 행사를 짜증 반 호기심 반으로 지켜봤다.

*

그림을 건조하기 위해서 자리를 비우면 그때는 어린아이들이 쪼르륵 달려가 사인지를 내밀었다. 미술관 입구 쪽 상점에는 빛의 마리아가 소개된 책자가 있었고, 친절하게도 점원들은 이 책 안에 든 사인지를 가지고 사인을 받을 것을 추천했다. 마치 이미 그리하도록 계약된 듯 계산된 행동이었다. 태호는 미술관에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 들기도 하다가도, 궁정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 거대한 미술관을 자신의 아틀리에 (작업장)로 만든 영예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것이지만, 꼬맹이들이 지나가면서 사인을 해 달라는 통에 정신이 없었다. 한 번은 사인지를 들이미는 아이를 미쳐 못 보고 지나가자 아이가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깜짝 놀라 아이를 달래주며 더 시간을 지체한 적도 있었다.

처음에는 한꺼번에 너무 많이 칠해버렸더니 마른다고 시간이 지체되어 관람객들의 항의를 받은 적도 있었다. 태호가 그림 그리는 것을 보기 위해 왔는데 무려 2시간이나 자리를 비우자 항의를 한 것이다. 그 뒤로 태호는 30분 작업을 하고 1시간은 미술관 지하에 위치한 자신의 임시 작업실을 찾아가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규칙적으로 변하자 미술관의 안내실에는 A4 용지에 태호의 작업시간이 프린트되어 붙어 있기 시작했다.

무슨 동물원 공연 일정 같았다.

*

태호가 미술관 지하에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벨라스케스의 걸작 '시녀들'에 대한 오마주였다. 태호는 작품 '화가와 걸작'에서는 '시녀들'에서 벨라스케스처럼 한쪽 구석에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 자신을 묘사했다.

차이점 중 하나는 발라스케스처럼 캔버스의 뒷면을 보이는 것이 아닌 앞면을 보이도록 묘사했다. 그림 안에 그림이 있는 드로스테 효과를 의도한 것이다.

또 다른 차이점으로는 '시녀들'은 가운데에 공주 마르가리타에 집중하는 비교적 작은 프레임을 유지했지만 태호의 걸작들은 미술관의 한 전시 구역 전체를 크게 묘사했다. '시녀들'에서는 방의 일부분만 보이는 캔버스와는 다르게 전체가 다 보이게 되었다. 언뜻 보면 루잔 프르제파르스키의 루브르의 살롱 카레 같기도 했다.

배경은 미술관을 그대로 묘사했지만 그림에 보이는 작품들은 미술관에 있는 걸작 중 태호가 좋아하는 그림들만을 그렸다. 그렇게 묘사된 그림은 반 고흐의 아를의 눈 덮인 들판,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 바실리 칸딘스키의 작곡 8, 베이컨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인물에 대한 세 가지 연구', 마르크 샤갈, 창문을 통해 본 파리 등이 있었다. 시녀들의 오른쪽 앞에 앉아 있는 늙은 개는 제프 쿤스의 퍼피로 바뀌었다.

시녀들의 자리를 차지한 건 걸작들을 제작한 예술가들이었다. 검은색 가죽점퍼를 입은 프란시스 베이컨이 미술관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푸른색 옷을 입은 고흐가 옆에서 붓을 들고 베이컨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말하는 듯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모자를 위아래를 반대로 쓴 채 갈색 파이프를 물고 돌아다녔고, 무테 안경의 바실리 칸딘스키는 한 손엔 붓 한 손엔 바이올린을 들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녹색 옷을 입은 샤갈은 연체동물처럼 흐느적 하리며 하늘을 날고 있었고, 민머리의 피카소는 수건으로 땀에 젖은 머리를 닦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관람객이자 작가였다.

그림 크기는 빛의 마리아 보다 훨씬 커서 3m x 2m에 달했다.

덕분에 태호는 정말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

미술관의 일정에 맞춰 일주일에 이틀(금, 토)을 쉬었다. 그때 태호는 한 손에는 카메라를 쥐고 맨해튼을 걸어 다녔다. 마음에 드는 장소가 보이면 사진을 찍었다. 다음 작품 구상을 위한 준비였다.

태호는 뉴욕이 맘에 들었다. 미술관을 다니며 구경을 하는 것도 좋았고, 아침에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는 것도 좋았다. 뉴욕에서 힘들게 돈을 번다고 여기저기 치이는 생활을 하는 게 아니었기에 장기 관광 온 기분도 났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흘렀다. 시간이 흐르자 달라진 점은 생겼다. 이제 길거리에서도 태호를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났다. 지금은 이삼일에 적어도 한 명은 만났고, 사인을 해주거나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같이 찍었다. 태호를 아는 사람이 늘어났다.

*

석 달이 지났을 때쯤.

EBC 촬영팀이 뉴욕으로 날아왔다. 나중에 예랑에게 들어보니 없는 살림에 늘 쪼들리는 와중에도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꺼이 회식 등에 쓸 부서 비용까지 아꼈다고 한다. 예랑 혼자 와서 인터뷰를 하면 될 텐데 군식구까지 줄줄이 달고 오니 한 고생이었다.

몇 달 만에 본 예랑은 만성피로에 찌든 전형적인 직장인의 모습에서도 상태가 좀 안 좋은 축에 속했다.

"비행기에서 이렇게 잘 자보긴 처음이다."

태호가 안부를 묻자 예랑의 한 대답이었다.

"너무 자서 환자처럼 보였어. 승무원이 깨우려는 거 내가 말렸다."

같이 온 오 과장이 말했다.

"태호 군은 여전해요. 군이라고 해야 되나 씨라고 해야 되나. 대학생도 군이라고 해야 되나? 호호. 그냥 태호 씨라고 할게요. 엄연히 성공 가도를 달리려고 하는 작가에게 군이라고 부르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

여전히 말은 많은 오 과장이었다. 예랑만큼은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에서도 피곤을 숨기긴 힘들었다. 옆의 성 대리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도착했는데 이렇게 강행군을 해도 되나요?" 태호가 물었다.

"우리도 좀 천천히 하고 싶은데 제작비가 간당 간당 해서 가능하면 빨리 끝내야 돼. 여기까지 왔는데 뉴욕 관광은 제대로 하고 가야지."

여기 온 모든 일행이 출장 일정에 휴가를 붙여서 왔다. 촬영은 4일 내에 끝내고 나머지 3일은 주말까지 껴서 뉴욕 일대를 돌아다니겠다는 계획이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제일 쉬운 거부터 하자. 인터뷰부터."

PBS에서 태호의 인터뷰를 종종 하는데 EBC의 인터뷰는 왜 잡힌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알고 보니 BBC와의 협업과 EBC와의 독자 작업이 꼬인 결과였다.

"지난번에 찍은 거 먼저 내보내기로 결정했어. 네 빛의 마리아 IV 작업이 오래 걸린다고 판단했고, 있는 자료로 방송 하나 먼저 때리고 나중에는 공동 작업한 걸로 다시 하기로."

*

EBC와의 일정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태호가 미술관에 있을 때 찾아와 관람객들을 인터뷰했고, 제이슨과 관장인 토마스까지 인터뷰해갔다. 곧이어 윌슨과도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이틀을 소비했다. 밤마다 태호와 저녁 식사 후 별도 인터뷰를 더 진행한 건 덤이었다.

*

"이제 너만 찍으면 거의 다 끝난다."

EBC 촬영팀의 호텔 로비에서 만난 예랑은 오늘 많이 걸어서 피곤했는지 발을 주무르고 있었다.

"벌써 다 찍었어?"

"벌써가 아니지. 기획안을 낸 게 거의 8개월 전이니까 빠른 건 아니지. 그래도 이미 5부작에 필요한 촬영은 다 했고 편집만 하면 되는데, 틈틈이 앞서서 편집도 진행해 왔기 때문에 니 껏만 집중해서 끝내면 돼. 해외 출장 잡으려고 스케줄 맞추고 비용 맞춘다고 힘들었다. 다시 하라고 하면 못하겠어."

예랑은 작년에 만났을 때보다 한껏 더 성숙한 분위기 풍겼다. 좀 더 프로 같았다.

"고생 많이 했네. 나로 시작한 기획 안이 이렇게 커진 거잖아."

"하고 보니 니가 제일 비용이 많이 든 경우더라. 미국에 중국에 일본에. 팔자에도 없는 영어 한다고 힘들었다."

힘들다고는 하지만 표정은 좋았다.

"넌 어떻게 여기 온 지 몇 달 밖에 안되었는데 나름 유명해졌더라."

예랑은 가방에서 주섬주섬 스크랩해 둔 기사들을 꺼내 들었다.

"한국에서 온 신성."

"벨라스케스의 재림."

"빌바오의 마스코트."

"태호의 뉴욕의 침공."

"21세기 미국에 나타난 19살의 거장."

"Faceless의 재생, 태호가 해내다."

"빛의 마리아가 뉴욕을 비추다."

"타이틀 만으로도 끝이 없어. 이게 다 뉴욕과 미국 유력지에서 쓴 글들의 타이틀이야.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타블로이드가 아니고."

예랑은 슬슬 목소리 톤이 올라가며 흥분된 어조로 얘기했다.

"이제 한국에서도 미국 동향에 민감한 사람들은 태호가 누구인지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고 있다고."

"정말 우리가 시기를 잘 맞춰 온 거야. 태호가 누구인지 막 궁금해하던 차에 우리가 빵 터트릴 수 있게 된 거지."

"잘 됐네."

"뭐야? 반응이 왜 이래."

"아직 잘 실감이 안 나서. 집-미술관-공원 이렇게 만 다니고 있거든. 신문이나 뉴스는 잘 안 봐."

"살짝 기운이 없네. 뉴욕 생활이 마음에 안 들어?"

"누나 와서 인터뷰한다고 신경 쓴 게 있는 것 같고. 또 약간 향수병 증상인 거 같기도 하고."

"전에도 뉴욕에 오지 않았었어?"

"그때는 언제든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한두 달 있는 거라서, 별 신경을 안 썼는데. 지금은 계속 여기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런가 봐."

"그러면 입학하기 전에 한국에 들어가서 좀 있다가 다시 들어와. 뉴욕 생활 정리하고 짐들은 예일대 근처에 옮겨 놓고."

"좋은 생각이야. 그래야겠다." 태호는 목소리에 생기가 살짝 돌았다.

"하지만 들어올 때 얼굴 잘 가리고 들어와야 될 거야. 이 방송 나가고 너 알아볼 사람이 늘어날지도 모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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