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BP 초상화 대회3 (60/181)

///// BP 초상화 대회3

"난 양준만이라는 작가와 20년 넘게 알고 지냈다. 그 작가의 철학과 작품 활동에 깊은 교감을 나누고 있으며 개인적으로도 매우 친하고 잘 아는 사이다."

"난 이 그림을 보자마자 양준만이라는 이름이 걸려 있지 않았지만 누구인지 바로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가 사진을 찍으면서 가지고 있었던 철학적 고민 그의 다사다난했던 삶 등이 너무 완벽히 그림에 녹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레게 머리와 몸에 있는 문신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기억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에 담긴 삶에 대한 고민과 작품에 대한 철학은 진실이며 여기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난 초상화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사진은 비교적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다. 이 그림에는 내가 사진으로 담고 싶어했던 모든 것이 담겨있다."

르몽드에 기사 소스를 제공하고 뒤로 빠져 있을 줄 알았던 가브리엘은 BBC의 인터뷰에는 적극적으로 응했다.

진흙탕 싸움이 아닌, 태호라는 작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지자 르몽드를 통해 제안된 인터뷰에 기꺼이 임했다. 사진작가란 개인 사업자는 마케팅에 민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화면은 가브리엘과의 인터뷰 장면을 마치고 전시실에 있는 관람객들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작품 전시에서도 태호의 그림 앞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앉아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이 그림이 어떤 측면에서 특별합니까?"

"이 그림에 담긴 태호의 스승이라는 남자는 참 신비로운 표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웃고 미소를 보이지만 눈과 입 주변에 느낄 수 있는 슬픔은, 보는 이를 붙잡고 다시 한번 이 미소에 대해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좋은 작품은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오래 보고 계셨어요?" BBC의 진행자가 물어본다.

"이십분 넘게 쳐다보고 있었네요.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이 그림에 어떤 특별함이 있습니까?"

"나는 이 사람을 오늘 처음 봤습니다. 그냥 그림으로만 봐서는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적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그림을 관심 있게 바라보면 이 그림에 담긴 사람에게서 읽어낼 수 있는 많은 정보가 있습니다."

"아시안이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서는 사진 작가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한 레게 머리와 문신은 그의 자유로운 예술가 정신을 보여주는 듯하지요."

"얼굴은 전체적으로 웃고 있지만 눈은 마냥 웃고만 있는 건 아닙니다. 뭔가 고민이 많고 사연도 많을 것 같은 눈이죠. 그리고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슬픔도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슬픔인지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어려워요. 하지만 슬픔이라는 감정이 얼굴에서 쓸쓸히 묻어납니다. 정말 많은 것을 말해주는 그림이고, 좋은 그림이에요."

BBC 진행자는 다른 관객도 찾아 태호 그림의 특별함에 대해 물었다.

"이 그림을 잘 아시나요?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지시나요?"

"저는 이 그림을 세 번째 보러 온 겁니다. 시상식 때 작가들을 보고 싶어서 왔을 때 봤고, 그 뒤에 그림 생각이 나서 한 번 더 왔습니다."

"오늘은 이 그림의 작가가 빛의 마리아라는 작품을 제작했다는 얘기를 듣고 다시 왔습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달라요. 그림이 전달하는 느낌이 다릅니다."

BBC 진행자는 이 관객이 태호를 만나봤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질문을 이어갔다.

"태호 작가를 만났습니까?"

"네 만났어요. 바로 이 그림 앞에서 그를 봤죠."

"어땠나요?"

"잘 생긴 청년이었어요. 키는 180cm 중반은 되어 보였고 피부는 하얗다 못해 투명했죠. 약간의 화난 표정만 아니었어도 같이 사진을 찍자고 했을 텐데, 아쉬워요."

"만약 빛의 마리아의 작가란 걸 알았다면 무례를 무릅쓰고라도 같이 사진을 찍자고 요청했을 거예요. 저에게 그는 이제 셀럽 같은 존재거든요."

"그가 화가 났었나요?"

"그날 시상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이 봤어요. 그의 수상 소감은 짧았고 실망으로 가득했죠. 그때는 주니어를 대상으로 한 상이라 해도 수상한 것은 기쁜 일인데 왜 그리 불만족스러워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이해해요."

"그가 빛의 마리아라는 작품의 작가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가요?"

"아니요. 그가 이 그림에 들인 공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가 그린 다른 작품들을 다 배제하고 이 그림만 딱 놓고 보아도 그래요. 정말 잘 그린 작품이에요. 작품을 가까이서 보면 그가 이 사진작가를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가 있었어요."

카메라는 그림의 부분 부분을 확대하여 보여줬다.

"왜 그가 주니어 상 밖에 못 받았다고 생각하세요?"

"제가 미술 전공으로 학생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이쪽에 아주 문외한은 아니에요. 완전히 제 개인적인 느낌을 얘기하면,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19세기 신고전주의 작품의 느낌을 풍겨요. 인상주의 표현기법도 상당히 많긴 하지만 신고전주의 작품이란 느낌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고요."

"전 지금 영국에 있는데 루브르에 걸려 있는 작품을 보고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에요. 이건 정말이지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어떻게 그 어린 한국인 친구가 19세기 대가들의 향기를 담은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이건 전적으로 제 개인의 생각이에요. 작품에는 국적이 없지만 이 작품에 국적이 있다면 아마 프랑스 일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 점이 영국인 심사 위원들에게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

태호에 대한 BBC 기사는 영국에서 커다란 후폭풍을 일으켰다. 아직 20살도 되지 않은 외국의 어린 천재가 자국의 미술상에서 고배를 마셨다. 음모론이 꽃피우기 딱 좋은 토양이 마련된 것이다.

뒤늦게 빛의 마리아를 접한 영국인들도 자국의 미술상을 까 내리는데 두 손을 보탰다. Faceless가 영국인이 제작했다고 믿는 이들은 어린 천재가 영국에 대한 안 좋은 인상을 받았을지부터 걱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불똥은 여러 군데로 튀었다. 타깃은 당연히 심사위원과 대회 운영위였다.

영국의 스카이 아트 채널1에서는 이번 BP 초상화 상의 수상작들을 펼쳐 놓고 태호의 작품과 정밀 비교를 하는 방송을 방영했다.

패널로 나온 노 교수는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의 미대 교수로, 평소에 이 상에 불만이 많았던지 아니면 심사위원에게 불만이 많았던지, 작정을 하고 그림을 찬찬히 분해하듯 설명하며 이번 일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집었다.

"좋은 초상화란 단순히 사람의 시각적 표현만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건 사진이 더 잘 표현할 수 있죠. 초상화를 통해서는 사람에 대한 무언가 중요한 걸 드러내야만 합니다. 그 중요한 무언가에는 이력, 성격, 취미, 직업, 믿음 등등이 포함됩니다."

"이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것들이 있습니다. 문신, 레게머리, 동아시아인, 카메라 등으로 이 사람에 대한 많은 것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건 얘기하지 않기로 하지요. 누구나 다 아는 것들이니까."

"먼저 포즈와 표정을 봅시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강인한 의지가 느껴집니다. 캐주얼 정장을 입고 있으며 손에 든 카메라로 언제든 정면에 서있는 당신을 찍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 그림 앞에 선 관람객들은 자신이 피사체가 된 듯한 인상을 받았을 겁니다. 이 태호라는 작가는 영리하게 그림 옆에 카메라 사진까지 붙여 이런 감각을 더욱 강조했습니다."

"그림은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19세기의 신고전주의가 느껴지죠. 균형 잡힌 구도와 뚜렷한 윤곽, 입체적인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얼굴을 보면 붓 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캐주얼 정장에서는 두터운 물감을 사용했으며 거친 붓 자국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인상주의 표현기법이죠. 이렇게 두 가지 다른 기법이 쓰인 그림을 어디선가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신가요?"

"바로 빛의 마리아로 불리는 Faceless 복원 작이 이렇게 제작된 그림입니다. 태호 군은 이번 초상화 대회를 위해 Faceless의 표현기법을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얼마 전 확인했을 때에는 물감도 거의 다 굳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두껍게 칠한 그림이었는데도 말이죠."

"무슨 얘기냐면 이 작품은 완성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그림이라는 얘기입니다. 1년은 채 안 되었지만 6개월은 확실히 넘은 듯 보였습니다. 이 말은 Faceless 복원작인 빛의 마리아보다 먼저 제작되었고, 매우 독창적인 접근이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듯 정성을 다한 그림이었지만 주니어 부분 우승에 그쳤죠. 난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심사위원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도대체 이 그림의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를. 흡사 Faceless를 보는 기분까지 들게 만드는 이 그림의 어떤 점이 아쉬웠는지를 말이에요."

"난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럴 자금만 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태호라는 작가에게 내 초상화를 맡기고 싶습니다."

*

심사 위원 자질에 대한 얘기까지 자꾸 거론되자 다급해진 것은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었다. 태호에 대한 얘기가 언론을 통해 거론될수록 대회 운영위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거세졌다. 특히 이 대회의 스폰서를 맡은 British Petroleum (BP)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동안 시달리던 운영위는 감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하고 6명의 심사위원을 따로 불러 인터뷰를 진행했다. 6명 중 4명의 심사위원들은 격렬히 인터뷰를 보이콧했지만 독일과 미국 출신의 심사 위원들은 자신들까지 매도 당하는 것이 억울했던지 몰래 인터뷰에 응했다.

"태호의 그림을 수상작으로 올리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난 그 그림을 수상 후보로 처음부터 추천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 6명이 모여 수상 후보를 정할 때, 4명의 영국인 심사위원들이 태호의 그림을 강하게 거부했다."

"난 처음에는 이해를 할 수가 없었으나 그 4명이 나중에 선택한 그림을 보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영국 작가가 대상을 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대상을 수상한 그림도 좋은 그림이고 수상할 자격이 있다. 다만 태호의 그림과 비교했을 때는 고개가 갸웃할 수밖에 없다."

"4명의 영국인 심사 위원 중 누가 주도적으로 수상자 선정을 이끌었나?"

"올리버 그린이다."

"그가 BP에서 추천한 심사위원인 것을 알고 있었는가?"

"전혀 몰랐다. 우리는 이번 대회의 심사위원으로 만난 것이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처음 만난 자리이며, 그뒤로도 난 따로 그를 만난 적이 없다. 사실대로 얘기하면 일부러 피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불필요한 오해를 사기를 원하지 않았다."

감사 결과 음모가 사실로 들어났음에도 운영위측은 이를 대중에 공표할 수 없었다. 스스로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BP측에 강한 항의 서한을 전달하고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영국 미술계에 빚을 지워 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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