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P 초상화 대회1
런던 국립 초상화 미술관의 어느 회의실.
그들의 눈앞에는 기가 막히게 잘 그려진 그림 하나가 걸려져 있었고.
이 그림 때문에 6명의 심사 위원은 늦은 시간까지 퇴근을 못하고 있었다.
"이 그림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정도 실력으로 왜 이미 관 속에 들어간 신고전주의 양식의 그림을 그려 온 거죠? 거기에 인상주의라니. 왜 서로 다른 표현 기법을 섞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시도는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습니다."
"현대적 감각이 결여되었어요. 마치 다비드나 앵그르의 작품을 보는 듯해요. 못 그렸다는 게 아닙니다. 너무 올드해요."
"마치 프랑스 아카데미 그림을 보는 듯하군요. 인상 깊지만 모든 것이 너무 미화되어 있어요."
"풍경도 배제했고. 자연미가 없어요."
영국인 심사위원 네 명의 평가는 태호에게 가혹했다. 독일과 미국 출신의 심사 위원은 이 영국인들이 19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신고전주의를 충실히 따른 표현 방식을 마음에 안 들어 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모른 척했다.
조슈아 레이놀즈*를 추종하는 영국인들과 괜한 토론을 벌이기가 상당히 귀찮은 감도 있었다. 아슬하게 등수밖에 위치할 뻔했던 태호의 그림은 태호의 나이가 매우 어린 것으로 드러나 30세 미만이 받는 젊은 예술인 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
6월 초, 태호는 수상 후보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다.
6월 2x일이 바로 시상식과 만찬이 있는 날이었다.
수상작들이 전시된 전시실에 마련된 단상에는 영국인 영화배우 닐 헤븐이 올라왔고 그 옆에는 BP 사의 회장 낸시 나오미와 국립 초상화 미술관 관장인 밥 찰리가 서 있었다.
"올해 우리는 전 세계 54개국에서 보낸 2천 작품이 넘는 초상화가 심사를 위해 접수되었습니다. 정말 많은 시간을 들여 논의를 거듭한 끝에 55개의 작품을 최종 선발하였습니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55개의 다양한 스타일과 테크닉 그리고 놀라운 스킬들로 그려진 그림들 중 스타일, 테크닉, 스킬이 조화롭고 적절하게 들어간 그림이 오늘 수상의 영예를 가져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첫 소개를 마친 닐 헤븐은 바로 시상식을 이어갔다.
1,2,3등이 차례로 발표되고 태호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져만 갔을 때.
"Young Artist Award 수상자는 권태호입니다. 작품명은 나의 스승입니다."
3등 안에 들지 못하는 작품 중 작가의 나이가 30세 미만을 한정해 주는 상인 젊은 예술인 상은 9천 파운드의 상금을 주는 사실상의 4등에 해당하는 상이다. 태호는 최소 2등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꽤 컸다.
"오늘 바쁜 와중에도 이 자리를 빛내주기 위해 멀리 뉴욕에서 여기까지 날아온 제프리 윌슨과 바쁜 와중에도 제자의 초상화 모델이 되어준 양준만 사진작가 님에게 감사드립니다."
수상 소감 때의 태호의 표정은 석고상처럼 굳어 있어 보는 사람들도 태호가 무척이나 화가 났다는 걸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시상식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를 뜨려고 하는 태호를 윌슨이 눈빛으로 말렸다.
"끝나고 호텔 근처에서 나와 같이 펍에서 맥주 한잔하자고. 잘 아는 집이 있거든."
영국에서는 만 18세부터 음주가 가능했다.
시상식이 끝나자 빠르게 떠나려고 하는 태호와 윌슨을 미술관 직원이 잡았다.
"태호 씨, 혹시 그림을 미술관에 매각하시겠습니까?"
"아니요." 태호는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잠깐만." 윌슨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런 건 나에게 맡겨야지."
윌슨은 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미술관 직원에게 건넸다.
"뉴욕 썬 갤러리의 윌슨입니다. 태호의 그림 거래는 저와 얘기하시죠. 다만 오늘은 날이 좋지 못한 듯하니 연락처를 주시면 내일 연락드리겠습니다."
미술관 직원에게 연락처를 받자, 윌슨은 태호를 이끌고 시상식 장 밖으로 향했다.
"작가는 절대로 '노'라는 말을 하면 안 돼. 무슨 일이 있으면 나를 통해서 해. 알았지?"
윌슨은 태호에게 자신의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했다. 모든 스포트라이트는 작가가 그 뒤의 지저분한 거래는 자신이. 이 것이 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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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P Portrait 수상작 전시회는 6월부터 9월까지 진행되었는데, 단연 인기가 있었던 작품은 태호의 '나의 스승'이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레게 머리와 사진만을 보고 살겠다는 이유로 목까지 문신을 한 그는 프랑스에는 이미 잘 알려진 사진작가였지만 영국에서는 무명이었기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처음에는 없었다.
그림 옆에는 사진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카메라를 눈에 대고 정면을 바라보는 자세로 바로 앞에 서 있는 관객을 찍을 듯한 사진이었다. 한 개의 그림과 한 개의 사진. 둘은 마치 GIF 애니메이션처럼 관람객에게 다가왔다.
그렇게 점차 시간이 지나자 그림을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양 작가의 외모는 워낙에 독특해서 사람들의 머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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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P Portrait Award 시상식이 있을 시기, 국립 초상화 미술관에서 그림을 관람하는 사람 중에는 프랑스에서 활동하다 잠시 영국에 들러 우연히 이번 전시회를 보게 된 가브리엘 뒤봐도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패션 사진작가로 프랑스어 판 보스와 엘르지에 정기적으로 사진을 싣는 인정받는 작가였다. 인물 사진에도 제법 인정을 받기에 패션 쪽 일이 아니어도 일 년 내내 작업이 끊이지 않았다.
이틀 전 영국 맥심*에서 사일 간 사진을 찍는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고, 오늘 아침에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에 도착했다. 그런데 갑자기 잡지사 측에서 계약 해지 통보가 날아왔다. 실수로 작가를 추가 고용했다고 한다.
"이 라이미* 놈들. 일 처리 하나 똑바로 못해서 원. 스케줄을 다 꼬아버리다니."
계약 파기로 전체 계약 금액의 절반은 받았지만 꼬여버린 스케줄이 기분도 꼬아버렸다. 다음 계약도 영국이기에 꼼짝없이 사 일을 런던에 갇혀 지내야 한다는 점이 짜증을 유발했다.
그래서 방문한 게 바로 국립 초상화 미술관이었다. 라이미 놈들이 자랑스러운 프랑스 인보다 잘하는 게 하나 있다면 이 예술 작품을 비싼 값에 팔아먹는 짓이었다.
초상화는 사진작가에게 많은 영감을 준다.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화가들이 물감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우연히 BP Portrait Award 전시장까지 구경을 하게 되었는데 아는 얼굴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친한 친구인 양준만 작가의 초상화가 걸린 것을 보고 처음에는 다른 사람을 잘못 본 줄 알았다. 그림을 확인한 후 작가가 한국인이라는 것에 놀랐고 3등에도 들지 못해 주니어 상을 받았다는 것에 더 놀랐다. 곧바로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어쩐 일이야?" 양준만은 거의 일 년에 한두 번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의 전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내가 지금 런던의 미술관에 왔는데 자네 초상화가 있어."
"맞아. 태호라는 친구가 영국 초상화 대회에 출품한다고 준비를 했어. 아마 영국에 갔을 거야."
"어떤 사이야?"
"내가 한 이년 넘게 가르쳤어."
"그림 잘 그리는걸? 30살 이하가 받는 주니어 상을 받았는데?"
"30살 이하가 받는 주니어 상이 뭐야?"
"3등까지 상을 못 받은 작가 중에 30대 이하에서 한 명에게 주는 상 같아."
"걔가 3등에도 못 들었어? 이 세상에 걔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3명이나 더 있다는 거야? 신기한걸."
"내가 봐도 태호 작가의 그림이 제일 좋아 보이는데. 지금 여기서 들리는 얘기로는, '1등 하고 4등하고 순서가 바뀌었다' 라거나, 'Young Artist Award 가 1등 상이었냐'라는 비아냥까지 말이지. 지금도 태호 작가 앞에 사람이 제일 많아. 그림 솜씨도 솜씨이지만 자네 외관이 좀 독특해야 말이지."
양 작가도 피식 웃었다.
"태호를 4등으로 뽑은 심사위원들도 나름 알려진 사람들이겠지만 다음에는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는 걸 배제해야 해. 태호가 관심을 가졌을 정도라면 꽤 큰 대회인데 겨우 그 정도 안목이라니 원."
"워낙에 주관이 많이 들어가는 심사 과정이니 결과는 다양할 수 있겠지. 하지만 이번 일은 아무리 봐도 문제가 있어. 누가 봐도 그의 그림이 더 좋은걸. 태호라는 친구 사진 솜씨는 어떠한가?"
가브리엘은 그림 옆에 붙은 사진을 보며 양 작가에게 물었다.
"사진으로도 대성할 수 있는 친구지. 근데 나와 만났을 때는 이미 회화 쪽으로 거의 진로가 굳어진 친구라 내가 어찌할 수 없었어."
"나이가 몇인데?
"이제 18살."
"18살에 저런 내면을 표현할 수 있다고? 뭐 천재라도 되나? 아니지. 18살에 이 상을 수상한 것만으로도 천재인 것은 맞지. 그래도 이건 대단하군. 난 최소 20대 중반은 넘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림 뿐만 아니라 사진도 괜찮아. 나에게 마지막 사진을 보여준 건 일 년 전이지만 그때 실력으로도 충분히 프로라고 불릴만했어."
"태호 작가 그림 좀 구할 수 있겠나?"
"그 비싼 걸 내가 어떻게? 나도 겨우 하나 얻었는데. 아니, 지금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울 수 있어. 얼마 전에 그 녀석이 뉴욕에서 사고를 거하게 쳤거든."
"사고? 왠 사고?"
"뉴욕 빌바오 미술관의 Faceless 아나? 그 그림의 새로운 버전이 등장했어. 빛의 마리아라고. 그걸 그린 게 태호야."
"뭐? 그걸 태호라는 친구가 그렸다고? 그런데 여기서 3위에도 들지 못한 거야?"
가브리엘은 일이 재밌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Faceless 또는 빛의 마리아를 우연히 CNN 뉴스를 통해 봤다. 가브리엘은 궁금한 나머지 뉴욕에 가서 볼까 망설였을 정도였다. 그런 작가를 떨어트려? 자신이 봐도 그의 그림이 제일 좋은데?
그는 자랑스러운 프랑스인의 피가 흐르고, 평소에 잘난 척하는 영국인들이 맘에 들지 않았을 뿐더러, 어설픈 일처리로 자신을 런던에서 피쉬앤칩만 먹게 만든 이 레이미 놈들에게 빅엿을 먹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브리엘은 전화를 들어 한 통은 파리의 르몽드 기자에게, 한 통은 뉴욕 타임스 기자에게 걸었다.
*
르몽드의 문화부 기자인 미셸 게린은 가브리엘의 전화를 받고 특종의 냄새를 맡았다.
뉴욕에 전화를 걸어 지인들을 통해 태호에 대한 정보를 모았다.
빛의 마리아 III은 물감도 채 마르지 않고 공개가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한 번씩은 다 보고 갔다.
빛의 마리아 IV도 있다는 루머가 있는데 아직 확실하지 않았다.
태호의 빛의 마리아를 구매하겠다는 미술관과 컬렉터들이 넘치고 있었다.
뉴욕에서는 마치 신인 가수가 등장하자마자 빌보드 1위를 거머쥔 것과 같았다.
뉴욕 언론이 찾고 있는 가장 핫 한 예술가가 런던에서 아주 근사한 대접을 받고 있으니 이보다 더 풍성한 얘깃거리가 없었다.
그는 바로 런던으로 향했다. 아직 태호가 런던에 있을 때 인터뷰를 따야 했다.
지인을 통해 윌슨의 전화번호는 이미 손에 있었다.
*
뉴욕타임스의 문화부 기자인 마크 트레이시는 가브리엘의 전화를 받자마자 런던 지부에 전화를 걸어 BP Portrait Award 란 상에 대해 확인했다. 이 바닥을 빠삭히 아는 그는 심사위원들 명단을 보고 음모론을 엮을 스토리 라인을 몇 개 세웠다. 태호와는 연락이 안 되어 프런트에서의 압박이 상당했는데, 이 기삿거리로 님도 보고 뽕도 딸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나마 윌슨이라는 딜러와는 국제전화로 연락이 닿아 태호라는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윌슨은 극히 제한적인 정보만을 마크에게 전달했다. 아직 작가와 개인 정보 공개 범위에 대해 논의를 못했다는 변명을 했다.
마크는 신비주의가 아닌가 생각까지 했지만, 유럽에 여행 중이고 나이가 아직 18살이라는 사실에 윌슨의 말을 수긍했다.
태호가 미국에 오기 전까지의 행적은 모르지만, 이것도 한국 지부에 연락을 했으니 조만간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다.
윌슨에게 전화를 걸어 태호와의 인터뷰를 요청했다. 윌슨은 태호가 오늘 한국으로 출국할 예정이라며 한국에서 제대로 인터뷰를 할 것을 제안했다.
마크는 프런트의 승낙을 받고 곧장 한국 출장 스케줄을 잡았다. 런던으로 바로 가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아무래도 한국 지부에서 받은 정보를 가지고 제대로 기사를 쓰는 게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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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슈아 레이놀즈: 18세기 영국 화가로 초상화가로 매우 유명함.
맥심: Max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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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미 (Limey): 영국 해군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점점 영국인을 가리키는 속어가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