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aceless 복원4 (55/181)

///// Faceless 복원4

제이슨은 미술관에 온 태호를 복원 실로 데려갔다.

"몸은 좀 어떤가?"

"이제 괜찮아요. 시험 이후에 긴장이 풀려서 그랬나 봐요."

"건강 관리 잘하게. 젊은 친구가 갑자기 그러니 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원."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해요."

"자네만 건강하면 되었어. 일 얘기를 해보자고."

제이슨은 태호의 건강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자, 다시 심각한 얼굴이 되었다.

"Faceless의 상태는 농담으로도 좋다고 말할 수 없어. 녹아내리는 빙하처럼 물감이 깨져 떨어져 내리고 있지."

"Faceless를 만든 작가는 상당히 저질의 물감을 썼어. 캔버스도 마찬가지고. 뭐 최고급을 써봤자 지금보다 조금 낫다는 정도지 크게 개선이 되었을 거 같지도 않지만."

짜증보다는 체념이라는 감정이 더 진하게 목소리에서 배어 나왔다.

"그림을 완성한 후 잘 말리고 관리를 해줬으면 좀 달라졌겠지만 수십 년 전 얘기니 어쩔 수가 없지."

"Faceless의 머리를 날려버린 그때의 충격이 그림의 모든 레이어를 다 흔들어 놨어."

"우리는 자네가 그림의 순서까지 맞춘 솜씨에 기대를 하고 있지."

"자네가 할 일은 복원 그 자체가 아니야. 어차피 미국 최고의 복원 전문가들이 여기에 매달려 작업을 하고 있지. 문제는 이 사람들이 아이디어 고갈로 진행을 못 할 때네. 자네가 그때 도움을 줬으면 해. 복원 전문가들이 모르면 누가 와도 몰라. 그러니 이 그림에 대한 감이 좋은 자네가 조언 정도만 해주면 돼."

"참고로 복원실에는 3명이 전문가가 있는데 모두 자네의 참석에 소극적이었지. 별 도움이 안 될 거라면서. 하지만 나와 관장이 밀어붙였어. 일할 때 조금은 조심해 주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복원실에 도착하자 어제 회의실에서 봤던 사람들이었다. 태호와 제이슨이 도착하자 세 사람은 떨떠름한 얼굴이지만 그래도 같이 얼굴 볼 사람이기에 최소한의 예의를 차린다는 뉘앙스로 인사를 했다. 마치 인턴 직원을 소개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이쪽은 어제 본 태호. 빛의 마리아를 그린 작가이고 이번 복원에 옵서버로 참여할 예정일세."

"이쪽은 엘리야 프라이스. 30년 경력의 19세기 미술품 복원 전문가로 물감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지. 이번 복원 작업의 실질적인 지휘자."

"이쪽은 리암 켈리. 20년 경력으로 19세기 미술사에 해박하지. 인상주의 화가들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이쪽은 미아 콕스. 15년 경력이고. Faceless에 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근처 뉴욕대에서 강의도 하고 있지."

"리암과 미아, 두 사람이 실제 복원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야. 그게 묵은 때를 벗기는 작업이던 파손된 작품을 붙이는 채우는 작업이던 이 두 사람이 진행할 거야."

"파손된 물감에 대한 화학 분석이나 X선 분석은 이미 마친 뒤라 바로 작업에 들어가도 될 거야."

인사를 나눈 세 사람은 마치 태호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본래 일하던 자리로 돌아갔다. 명백한 무시였다.

태호는 난생처음 겪어보는 무시에도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자기라도 바쁜 일이 있다면 인턴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살뜰하게 챙기기란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전 어디로 갈까요?"

이러자 제이슨이 오히려 당황해하며 태호가 앉을만한 자리로 안내했다.

전화기 하나가 있고 그 외엔 아무것도 없는 빈 책상이었다.

"에이미가 필요한 게 있으면 도와줄 걸세. 전화번호는 여기 있고."

제이슨이 명함을 건넸다.

"오늘을 뭘 할 생각인가?"

"그림을 그려 보려고요. Faceless 앞에서 그림을 그려보는 게 소원이었거든요."

"훗, 그런가? 그럼 에이미에게 도움을 청하게. 필요한 미술용품을 사다 줄 거야."

"아니요. 제가 직접 재료를 고르고 싶어요."

"그러게나. 비용은 에이미의 법인카드로 결제하면 될 걸세."

"혹시 구하기 힘들면 어쩌죠? 제가 찾는 게 좀 옛날 재료인데?"

"에이미가 뉴욕에서 못 찾는 재료는 없어."

"아, 궁금한 게 있는데, 제가 여기서 그린 그림은 제 소유가 맞죠?"

"그렇겠지. 우리는 자네를 여기에서 그릴 그림에 대한 소유권은 계약서에 없으니. 하지만 판매하고자 한다면 우리에게 우선권을 주게나. 자네가 꽤 괜찮은 작품을 만들어 낼 거 같거든."

태호의 어깨를 살짝 건드리며 제이슨은 복원실을 나섰다.

*

엘리야, 리암, 미아. 세 사람은 종종 회의도 하며 작품 복원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그리고 막 클리닝 작업에 들어갔다.

태호는 에이미가 알려준 미술용품점에 가서 Faceless 와 동일한 캔버스 두 개와 각기 작은 캔버스를 다양하게 주문해 배달을 요청했다. 배달 장소가 빌바오 미술관인 게 특이하긴 했지만 다음날 점심때에 맞춰 캔버스가 각종 미술 용품들이 배달되어 왔다.

19세기 유화에 쓰인 물감은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면 중금속 덩어리다. 크롬, 코발트, 납, 비소 등등. 듣기만 해도 암에 걸릴 발암 물질들의 범벅이 바로 이 물감이다.

건강을 생각해서 태호는 근처 화학 실험 장비 파는 곳에서 간이 글러브 박스까지 사다 놨다. 돈은 이천 달러 이상 들었지만 나중에 생길 법적 분쟁을 생각해서 윌슨의 카드로 긁어버렸다.

태호는 가루 형태로 배달 온 안료를 아마 오일과 테레빈유 (송진을 수증기로 증류하여 얻는 정유)에 개어 물감을 만들기 시작했다. 간이 글러브박스 안에서 작업이 이루어졌기에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았다. 이에 복원실의 세 사람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었다.

복원실 한쪽 벽에 걸린 두 개의 캔버스 중 왼쪽에 위치한 캔버스에는 태호가 캔버스가 도착한 날부터 부지런히 칠하기 시작했다. 알라 프리마 기법으로 그렸다. 태호는 여기에 빛의 마리아 III라는 이름을 붙였다. 태호가 처음 그린 복제품은 빛의 마리아 I으로 얼굴까지 그린 그림은 빛의 마리아 II로 스스로 명명했다. 나중에 캔버스 뒤편에도 쓸 생각이었다.

스케치도 없이 바로 채색에 들어가는 태호를 힐끗힐끗 보던 세 사람도 곧 관심을 접고 복원에만 집중했다. 태호도 그들의 클리닝 작업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소 닭 보듯 했다.

태호는 오른쪽 캔버스에도 밑 그림을 살짝 그렸다. 이름은 빛의 마리아 IV라고 지었다. 다만 IV는 나중에 작업할 생각으로 한쪽에 치워두었다.

*

태호의 작업은 정말이지 빨랐다. 이미 한번 그려본 작품이기도 했고 얼마 전 원작자 앙리의 과거를 본 후로는 붓놀림에 거칠 것이 없었다. 붓 질 한 번에 옷의 주름이 생기고 바람에 펄럭였다.

복원실의 세 사람은 하루하루 다르게 모양을 갖춰가는 두 그림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감히 자신의 작업을 같이 하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없는 사람 취급을 했지만 지금은 태호가 그들을 없는 사람 취급을 했기 때문이다.

*

한 달이 다 되자 거짓말같이 빛의 마리아 III는 얼굴을 제외한 전부가 완성되었다. 매일 같이 태호의 작업에 대해 보고하던 에이미도 가끔 내려와서 작업을 확인하던 제이슨도 빠른 속도에 감탄과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태호의 Faceless 가 얼굴을 제외하고는 다 완성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토마스는 다시 관련 직원을 다 이끌고 복원실에 내려왔다.

"이 그림이군."

토마스가 그림 앞에 서서 십분 동안 그림을 쳐다본 후 한 말이다. 그의 머리 속도 하얘져서 이 말 밖에는 떠오르는 말도 없었다.

태호는 자신이 그리는 빛의 마리아 시리즈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서 그리는 그림이 빛의 마리아 III라는 얘기에 모인 사람 모두가 I과 II가 어떤 그림인지 바로 이해했다.

"왜 얼굴은 안 그렸는가?" 그나마 그림을 자주 접해서 익숙해진 제이슨이 물었다.

"이제부터 그릴 겁니다. 다만 여러분께 제 작업에 대해 설명을 드려야, 나중에 작품을 보고 놀라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빛의 마리아 III는 최대한 지금 복원하는 Faceless의 원본 양식과 비슷하게 복원할 생각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리고자 하는 얼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얼굴과 다를 수 있습니다."

"혹시 얼굴은 누구의 얼굴을 그릴 생각인가?" 토마스가 물었다.

"그게 오늘 여러분을 이곳으로 오시라고 한 이유입니다. 먼저 제가 그린 샘플을 좀 보시죠."

태호는 6호 크기 (40.9 cm x 31.9 cm)의 캔버스 세 개에 그린 빛의 마리아의 얼굴 후보를 공개했다.

회의실에 있던 10명은 잠시 숨이 멎었다. 심장에 너무 강한 충격을 받아 마비가 온 듯했다.

"참고로 저는 이 세 번째 얼굴은 오른쪽에 있는 빛의 마리아 IV에 그릴 겁니다. 제 감은 이 세 번째가 원본과 가장 가깝다고 말하고 있거든요. 빛의 마리아 IV는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말입니다." 태호는 복원실 한곳에 덩그러니 놓인 캔버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세 번째 얼굴이 가장 평범한 얼굴인 건 알고 있나? 왜 그런 선택을 한 거지?"

"앞에 두 그림은 잘 보시면 많이 보던 성모 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둘 다 라파엘로의 성모상이나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나 다빈치의 성모 마리아의 얼굴과 닮지 않았나요?"

"완벽한 조형미를 갖춘 얼굴이죠. 마치..." 제이슨이 대답했다.

"아카데믹 한 진부한 얼굴이군. 하지만 그만큼 어울리는 얼굴이기도 하지." 토마스가 대답했다.

"태호 자네가 고른 그림은 아무도 적절하다고 판단하지 않을 거야. 누가 초상화라도 남기지 않았다면 말이지. 설마..." 제이슨은 말 끝을 흐리며 태호를 쳐다봤다.

"꿈속에서 봤다면 믿으시겠어요?" 태호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하지만 그것 외에는 설명할 방법도 없군."

"그렇죠. 전 대중이 어떻게 판단하든 상관없이 이 세 번째 그림으로 빛의 마리아 IV를 완성할 생각입니다."

"그건 작가의 선택이고 나는 그 의견을 존중하네. 그럼 III는 우리가 선택하면 되겠군. 왜 이런 선택권을 준 건가?" 토마스가 물었다.

"전 미술관의 도움으로 Faceless를 원 없이 관찰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특혜죠. 그래서 전 III는 미술관에서 원하신 다면 판매할 생각입니다. 제이슨 씨가 첫날 언급했던 것처럼 미술관에 선택권을 드리는 겁니다."

"그런 일이 있었지." 제이슨은 기억이 난 다는 듯 말했다.

"정리해 보면 빛의 마리아 III는 우리가 원하는 얼굴을 그리고 난 후 우리에게 매각하겠다는 얘기인 건가? 나쁘지 않은 생각이야. 지금 이 그림도 Faceless 원작자가 재림해서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 완벽히 같으니까. 저 복원하는 그림이 원본이라는 가치 밖에 없어 보일 정도로 말이지." 토마스가 말했다.

"이런 제안을 해줘서 고맙네. 빛의 마리아 IV는 그린 후에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윌슨 씨와 논의해 봐야 돼요. 아직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저 그림도 우리에게 판매하는 게 어떤가?"

"생각해 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어떤 게 저에게 유리한 건지 판단이 안 서네요."

"그럼 긍정적인 결론이 나오길 기대하겠네. 여기 태호와 복원실의 세 분을 뺀 나머지 인원은 모두 이 층 회의실로 오세요. 아, 태호 군. 그림은 잠시 가져가도 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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