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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celess 복원3 (54/181)
  • ///// Faceless 복원3

    그림을 본 순간부터 태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치 정보로 이루어진 덤프트럭에 치인 것 같았다.

    얼마 전 본 매트릭스에서 봤던 녹색의 텍스트들이 머리에 쏟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오래전에 코드명 J에서 봤던 데이터 전송 장면이 보이는 듯하기도 했다. 커다란 충격에 태호는 몸을 가누기 힘들어 벽에 손을 집다가 다리마저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통각 세포가 부족한 뇌가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갑자기 전신에 통증이 물밀듯 밀려왔다. 한 사람에 대한 수많은 순간들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기억되기 시작했다.

    무수히 많은 정보들이 등의 척수 신경다발을 타고 내려가 손에 있는 모든 신경세포들을 활성화시켰다. 불과 1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2박 3일은 잠 못 자고 일한듯한 피곤함이 머리를 가득 매웠다.

    "태호 군. 괜찮아요? 여기요. 도와줘요!"

    옆에는 에이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태호의 상태를 체크하다가 주위의 도움을 청했다.

    곧 911에 전화를 걸기 위해 핸드폰까지 들었을 때 태호가 가까스로 손을 들어 에이미에게 괜찮다는 의사를 겨우 표현했다.

    "괜찮습니다.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머리가 아픈가요? 머리가 아프면 바로 얘기해요. 빨리 병원으로 가야 되니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문밖에 있던 경비원들도 에이미의 도움을 요청하는 외침을 듣고 와 태호의 상태를 살폈다. 의식 및 눈동자 등도 살펴본 가드들은 심각한 상황은 아니지만 혹시 모르니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제안했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태호는 터질 것 같은 머리는 뒤로하고 일단 그림을 다 살펴보려 일어섰다.

    "괜찮겠어요?"

    "이제 괜찮아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오늘 좀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봐요."

    "그럼 빨리 구경할게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죠."

    "컨디션이 안 좋으면 바로 얘기해요. 병원에 가야죠."

    "그 정도는 아니에요. 걱정을 끼쳐서 미안합니다."

    태호는 그림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아까의 충격만큼은 아니지만 그림은 끊임없이 어떤 정보를 태호에게 전달하는 것만 같았다. 태호는 양해를 구한 뒤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아 센티미터 단위로 그림을 샅샅이 훑어 봤다. 사진으로 본 그림이기에 자신이 아는 것과 차이는 없었다.

    앞을 다 본 태호는 마음의 준비를 마치고 그림의 뒷면을 봐도 되냐고 물어봤다. 에이미는 좀 떨어져 있던 가드 둘을 불렀고 그들은 그림을 살짝 들어 뒤면이 보이게 했다. 거기에는 Theo라는 사인이 멋들어지게 적혀 있었다.

    뒷면의 Theo라는 서명을 보는 순간 마치 뇌에 있는 형광등 스위치를 켠 듯 무언가가 번쩍이는 것만 같았다. 태호는 최대한의 침착함을 가장하고 그림에서 떨어져 다시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에 쌓여있던 정보가 막 최적화를 하려는 듯 맹렬히 뉴런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것만 같았다. 눈앞은 어지럽고 머리는 CPU 과부하 걸리듯 맹렬히 온도가 올라가는데 손도 말을 잘 듣지 않는 것만 같았다. 걱정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에이미와 그 옆의 가드들에게 말했다.

    "그림은 잘 봤습니다. 조금만 앉아 있다가 나가도 될까요?"

    가드들은 그림을 다시 앞면이 보이게 위치 시킨 후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 병원에 안 가봐도 괜찮겠어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고마워요."

    태호는 10분을 더 앉아 있다가 일어났고, 떠나기 전 한 가지를 물어봤다.

    "이 작품의 얼굴을 찾는 건 어째서 중단한 건가요?"

    "얼굴을 그려줄 만한 실력을 가진 화가가 없었어요. 있어도 고사했죠. 최근 20년 사이에만 총 10명이 넘는 화가들이 도전을 했고 다 실패했죠. 마지막 그림은 그나마 나았지만 관장님이 그림을 내렸고요. 이 정보도 정확한 건 아니에요. 워낙 미술관에서 쉬쉬해서."

    "얼굴을 찾으면 상금이 있다고 하던데 맞나요?" 태호는 얼마 전 윌슨에게 들었던 말을 꺼냈다.

    "마지막 상금은 5만 불이었고 그건 10년 전 마지막 도전자가 받아 갔어요. 그나마 있던 그림 중에 제일 나았지만 관장님 마음에는 안 들었나 봐요. 그래서 이사회의 동의하에 그림을 내렸어요. 태호 군도 관심이 있나요?"

    "관심은 있어요. 지금보다 더 잘 그릴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는데 오늘 그림을 보니 더 자신이 생기네요."

    "조금 후에 회의가 끝나면 제안해 보세요."

    *

    에이미에게 회의실로 돌아오라는 연락이 왔다.

    터질듯한 머리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태호도 회의에 참석하는데 지장은 없었다.

    태호의 창백해진 얼굴을 보고 제이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은지를 물어왔다.

    "일시적으로 두통이 생겨서요."

    "그런가? 얼굴색이 안 좋아 보이는군. 빨리 진행하겠네. 미술관은 태호 군이 Faceless 복원에 참여하길 원하네. 수락할 건가?"

    "너무 오래 걸리지만 않는다면 괜찮습니다."

    "우리도 작품을 최대한 온전히 보전하는 내에서 빨리 진행할 걸세. 계약 조건 등은 윌슨과 상의한 후 결정하겠네만, 태호 군이 특별히 바라는 게 있는가?"

    태호는 순간 눈앞에 Faceless의 본래 모습이 떠올랐다.

    폭풍 한가운데에서도 머리카락의 미동도 없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모습.

    인자한 얼굴로 구원을 내리는 듯한 두 팔.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말하는 입술.

    이런 장면들이 태호의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태호 군?"

    잠시 멍하게 있던 태호에게 토마스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죠?"

    "태호 군이 뉴욕에서 생활하며 복원 작업을 하는데 필요한 편의 등이 있는지 물었네."

    태호는 가까스로 정신을 챙기고 전에 생각해 두었던 부탁을 꺼냈다.

    "아, 제가 이번에 예일대에 원서를 쓰는데 추천서를 부탁드리려고요."

    "지금 예일대 미대 학장님이 누구죠?" 토마스가 물었다. 잘 아는 사이지만 혹시나 바뀌었을까 싶어 다시 물었다.

    "로버트 스토 박사님이세요." 에이미가 대답했다. 얼마 전 뉴욕 행사에서 만났던 스토 박사를 에이미가 기억했다.

    "그럼 문제가 없겠군요. 나도 거기 출신이기도 하고."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태호 군은 추후 윌슨 씨에게 자세한 내용을 듣겠지만 일단 내일부터 와서 여기 분위기에 적응하도록 해요. 커리어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

    태호는 미술관을 둘러볼 생각도 못 하고 서둘러 미술관을 빠져나왔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오는 와중에도 손도 수전증 걸린 사람 마냥 계속해서 떨리고 눈에서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귀로는 메탈리카의 라스 울리히가 드럼을 치는 듯한 이명이 들리고, 머릿속은 대뇌 전체가 미친 듯이 신경 반응을 일으키고 있었다.

    태호는 내리자마자 호텔로 뛰듯이 올라가 화장실에서 어제 먹은 저녁을 확인할 듯이 속에 있는 걸 다 게워내고 침대에 뻗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뒤 태호는 잠들었고 곧 꿈에 빠져들었다.

    *

    어린아이가 무어라 엄마에게 얘기하고 있었고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보고 또 물음에 대답을 해주고 있었다. 뒤로 보이는 세간살이는 별 대수롭지 않았지만 모자의 표정에서는 그 어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더 자란 아이는 종이에 뭔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 솜씨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사뭇 대단하였고 집안 곳곳에 아이가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의 그림은 주위 사람들의 입소문을 마을 사람들이 다 알 정도였으며 시간이 지나자 근처 성당의 신부부터 나중에는 주교까지 이 어린 신동을 알아봤다. 특히 아이의 그림은 성당의 성모 마리아나 그리스도를 매우 사실감 있게 표현했는데 미래의 라파엘로니 다빈치니 이런 별명이 붙었다.

    아이의 엄마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실하게 성당에 참석했고 아이 또한 엄마를 따라 성당을 다녔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청년이 되어가는 15세가 되던 해 주교의 주선으로 파리의 미대 교수의 추천서를 받을 수 있었고 시험을 통해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청년은 어렸을 때의 실력이 윌취월장하여 아카데미에서도 두각을 나타냈고 이내 교수들의 주목을 받았다. 아카데미에서의 최고의 상인 Prix de Rome (번역. 로마 미술 대상) 을 받아 로마의 프렌치 아카데미에 5년간 유학을 했다.

    유학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이후 청년은 아카데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이어진 살롱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크게 성공. 이름을 날리고 성공 가도를 열었다. 그 뒤로도 이어지는 살롱에서의 성공과 호평 그리고 밀려드는 주문으로 파리에서 최고로 전도유망한 젊은이로 알려지게 되었다.

    얼마 뒤 자신에게만 운명처럼 다가온 사랑. 친구들과 주위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루어진 초호화 결혼. 이어지는 주문으로 돈은 벌지만, 점점 더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많아지게 되어 결국에는 빚까지 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맞닥뜨린 아내의 불륜은 그를 극한의 스트레스로 몰았다.

    그렇게 마시기 시작한 술은 늘어만 갔고, 우연히 접한 아편은 그의 정신까지 갉아먹으면 그의 화가로서의 기량을 떨어뜨렸다. 그에 대해 퍼진 악의적인 소문으로 인해 주문은 줄어들어 갔고 경제 사정은 더 악화되었다.

    결혼도 파경을 맞이했다. 파경을 맞이했지만 주위에서는 동정보다는 세상 물정 모르는 촌놈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소리가 뒤에서 더 크게 들렸다. 파경 뒤 얼마 후 고향에서 날아온 한 통의 편지는 그의 남은 정신 마저 날려버렸다. 어머니의 사망 통보였다.

    그는 더 저렴한 술과 더 저렴한 아편을 찾았고 몸은 더욱 축났다. 그리고 찾아온 병마. 그럼에도 끊지 못하는 술과 아편은 그를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었고 결국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았다.

    시한부 삶을 선고 난 후 불현듯 찾아온 예술에 대한 열정은 백내장 때문에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그에게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빛이었다. 비웃어 마지않았던 인상주의 그림에 그가 푹 빠진 것이다. 그는 의과대학을 방문하여 죽은 후의 몸을 기증하는 절차를 마친 후 얼마간의 돈을 받아 그걸로 술과 캔버스와 물감을 샀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을 완성시키고 쓰러졌다.

    *

    깨어보니 아침 8시였다. 어제 오후 1시부터 잠이 들었으니 꼬박 하루 가까이 잠든 것이다. 눈가는 눈물과 함께 퉁퉁 부어 있었지만 다행히 머릿속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가는 기분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한 사람의 인생을 다 돌이켜 봤기에 정신적으로는 지쳐있었지만 어제 온몸이 덜덜 떨리는 것에 비하면 몸 상태는 훨씬 나았다. 호텔에서 조식을 먹고 윌슨에서 전화를 걸었다.

    "어제 연락이 안 되어 얼마나 놀랐는지 아는가? 몸 상태가 안 좋았다는 얘기를 제이슨에게 듣고 호텔까지 찾아갔네. 곤히 자는 모습을 보고 그냥 나오긴 했지만."

    "왔다 가셨어요?"

    "그래. 문 열고 들어갔는데도 세상모르고 자고 있더군. 혈색이 나쁘지 않아 그냥 나왔네."

    "걱정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어제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어요."

    "지금은 어떤가?"

    "어제보다 훨씬 나아요."

    "미술관에 갈 수 있겠나? 제이슨이 네가 많이 아픈 줄 알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어."

    "갈 수 있어요. 조금 후에 출발할게요."

    "그전에 먼저 계약 조건을 알려주지. 시간당 20불을 줄 거야. 예술품 복원가 치고는 좀 박하긴 한데 자네가 초보고 어떤 자격증도 없다는 걸 생각하면 후하게 주는 거야. 지금 뉴욕의 최저 임금이 시간당 4.25불이니 하루 일당이 적어도 160불, 한 달이면 3200불로 나쁜 건 아니야."

    "반년 짜리 워크 퍼밋이 나올 거야. 보통 이게 나오는데 한 달 정도의 시간이 걸려. 엄밀히 말하면 자네는 퍼밋 나올 때까지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미술관에서는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담 주에는 나오게 만들겠다고 하더군. 이번 주 일한 것도 다음 주에 바로 지급할 거야."

    "제가 가서 할 일이 뭐가 있을까요? 복원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는데?"

    "그건 미술관에서 알려줄 거야. 도착해서 제이슨에게 연락하면 그가 나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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