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aceless 복원2
"그래서 자네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기대해 왔고."
뒷말을 안 들어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혹시 제이슨 씨는 어떤 일을 하세요?"
"윌슨이 알려준 것이 없나?"
"여기 와보면 제이슨 씨가 다 설명해 줄 거라고 했어요. 자기가 설명해 봐야 들은 얘기를 옮기는 거라 별 의미가 없다면서요."
"난 여기 수석 큐레이터이자 Faceless 관리를 책임지고 있지. 즉 Faceless 가 잘못되면 나도 인생 종 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야. 그래서 날 살려줄 태호 네가 와주길 바랐는데 그 망할 놈이 지금에서야 연락을 줘서 내 애 간장을 다 녹여버렸지. 썩을 놈."
제이슨은 태호를 오늘 처음 만났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짐짓 미안한 듯 말을 이었다.
"아, 미안하네. 자네도 내 심정이 되어보면 이해할 걸세. 그래서 자네를 기다린 거야. 복원 작업에 자네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모두가 궁금해하고 있거든."
지하 1층으로 내려가 복도 끝에 위치한 작업실에 들어갔다.
거기엔 이미 10명 정도의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태호와 제이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슨은 태호를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자네의 작품에 여기 있는 모두가 감탄을 했지. 자네가 온다는 소식에 영국 출장도 취소하고 여기로 왔네. 난 토마스 로렌스. 여기 관장이지."
제이슨보다는 조금 젊어 보이는 백인 남성이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권태호라고 합니다. 권이 성이에요. 한국인이고, 이제 막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대학은 미국에서 가려고 합니다."
"자네 그림을 보면 굳이 대학을 안 가도 예술가로 성공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어 보이던데?"
"제가 미국에 기반이 전혀 없어서요. 학교라도 나와야 어디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쓰죠."
태호는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렇군. 일단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설명을 해 주겠네. 자네가 듣고 판단을 해줬으면 좋겠군. 우리 내부적으로는 이미 의견이 모아졌어. 다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 지금까지는 부정적이고. 제이슨 씨. 부탁드리죠."
"알겠습니다."
제이슨은 빔프로젝터의 D-SUB 단자에 노트북 컴퓨터를 연결하고 발표를 시작했다.
첫 번째 화면에는 Faceless, 복제품, 빛의 마리아, 세 그림 사진이 있었다.
"Faceless 와 태호 군의 복제품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복제품을 봐 왔지만 이 정도로 정교하게 복제한 그림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제이슨은 그림 일부분을 확대한 사진을 띄웠다.
"Faceless를 직접 복제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이 제일 애를 많이 먹은 부분은 붓질의 순서를 알기 어려웠다는 점입니다. 그야말로 여기저기 붓 칠이 되어 있죠. 두 번째 어려운 점은 여기저기 튄 물감 자국입니다. 작가는 분명히 온전히 못한 신체를 가진 채 작업을 했을 겁니다. 선은 이리저리 튀고 물감도 같이 튀었죠. 지금 그림을 정밀하게 들여다보면 물감 튄 자국을 여러 번 수정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이게 Faceless의 또 다른 매력이기도 하지요."
다시 원래 사진으로 되돌린 제이슨.
"태호 군의 복제품은 이런 세세한 디테일까지 모두 놓치지 않고 담았습니다. 여기 있는 모두가 감탄해 마지않는 부분이죠. 이건 그림을 옆에 놓고 보면서 그려도 쉽지 않은 부분입니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태호 군이 Faceless를 완벽히 이해한 작가로 생각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제이슨은 복제품과 빛의 마라아를 화면을 띄웠다.
"그런데 복제품은 가슴의 흰색 물감으로 덧칠한 부분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이걸 깨달은 순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이 부분은 없앴을까? 이제 그 대답을 듣고 싶군요. 태호 군."
제이슨은 태호를 응시하며 말했다.
"얼굴이 없는 Faceless에는 불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태호는 Faceless 와 빛의 마리아가 같이 있는 슬라이드를 화면에 띄워 달라고 요청했다.
"Faceless의 가슴을 보면 이쪽 일부분이 흰색 물감으로 매우 거칠게 덧칠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 이 부분이 얼굴에서부터 내려온 빛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태호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추가 설명을 위해 옆에 화이트보드로 이동해서 빠르게 Faceless와 빛의 마리아의 모습을 겹치듯 그리고 설명을 이어갔다.
"빛의 마리아의 이마 부위에서 빛이 비산하고 이런 식으로 비친다면 가슴까지 흰색 물감이 그려진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태호는 이마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빛줄기를 화이트보드에 그리며 설명을 했다.
"이 흰색 물감이 그림의 가장 마지막 레이어를 이루고 있고, 가장 마지막에 덧칠해진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가가 마지막에 무슨 맘을 먹었는지 그림에 흰색 덧칠을 했다는 거죠. 이유는, 제 생각에는, 빛을 표현하고자 했을 겁니다."
태호는 티슈로 덫 칠한 부위를 지웠고 설명을 이어갔다.
"이 부분이 없다고 가정하고 그림을 그리면 이렇게 보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태호는 자신이 그린 빛의 마리아에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린 여성의 얼굴을 가리켰다.
"전 저의 어머니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제가 생각할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엄마가 떠올랐거든요. 아, 물론 이 그림은 많이 미화된 그림입니다. 우리 아빠가 이렇게 생긴 여성과 결혼할 정도로 능력이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태호의 농담에도 회의실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눈빛으로는 뻔한 얘기 말고 계속 설명을 진행하라는 듯 했다.
"그림의 원본에는 아마 작가가 생각하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이 그려져 있었을 것으로 저는 예상합니다. 보통은 자신의 어머니던지 아내가 아닐까 생각되네요."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부분은 '얼굴을 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그렸느냐'와 '이름을 왜 빛의 마리아라고 지었느냐'입니다. 우리도 가정을 할 뿐이지 확신을 하지는 못하는데 태호 군은 확신을 가지고 있어요." 토마스가 물었다.
태호는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찬찬히 소개했다. 우연히 대형 복제품을 보고 거기에 끌려 복제품 그림을 완성했고, 복제품에서 뭔가 이상함을 느껴 빛의 마리아는 Faceless의 원작을 재현했다고 말이다.
"복제품도 훌륭한 그림이긴 하지만 조금 불안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런 티가 나지 않지만 가까이서 보면 여실히 드러났죠. 전 그 불안함을 그림에서 지우고 싶었습니다."
태호는 그림을 확대해 달라고 한 후 비교하며 설명했다.
"불안한 붓질을 간결한 붓질로 변화 시키자 뭔가 다른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앵그르나 다비드의 그 꼼꼼함이 보였던 거죠. 조금은 아카데믹한 절제되고 간결한 그런 붓질 말입니다. 그걸로 전 어떤 확신 같은 게 들었습니다. 저는 신고전주의에 정통한 작가가 인상주의 그림을 그렸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림을 시작했습니다."
"떨어져서 보면 복제품이나 빛의 마리아나 비슷합니다만, 가까이서 보면 빛의 마리아가 훨씬 더 안정적이고 정교하죠. 감히 예상하건대 이렇게 그리는 게 Faceless의 원작자의 의도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원작자는 건강하지 못했고 체력도 모자라 이 대작을 그리느라 무척이나 고생을 했을 겁니다."
"빛의 마리아라는 이름은 원작에 흰색 물감이 과도하게 사용된 것을 확인하였기에 정한 이름입니다. 작가의 빛에 대한 집착을 읽은 거죠. 마리아라는 이름은 기독교에서 따온 겁니다. 얼굴을 중심으로 전신에서 환한 빛을 내는 사람은 신적인 존재밖에 없으니까요."
이름에 빛이 붙은 이유는 설득력이 있었기에 표정의 변화가 없었지만 마리아는 단순히 기독교에서 따왔다고 하자 실망하는 표정이 바로 얼굴에 드러났다.
"단지 그것뿐입니까? 태호 군이 마리아라는 기독교적 이름을 붙인 이유가 단지 그것뿐이냐고 묻는 겁니다." 토마스가 말했다.
"제가 아는 그림에 대한 지식은 19세기 말 프랑스에서 그려졌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우연히 이름 지었다고 설명하는 태호에게 실망하는 사람들.
"혹시 태호 군이 Theo라는 이름을 기반으로 말을 지어내고 있는 거 아닌가 의심할 수 있습니다."
Theo (씨오)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한 태호였다. 괜히 그리워지는 이름었다.
"Theo가 뭐죠?"
"Faceless의 캔버스 뒤에는 Theo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름을 가지고 발생할 수 있는 온갖 억측을 막기 위해 공개하지 않은 이름이지요. 아는 사람들만 알고 있는."
"저는 그런 고급 정보를 접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태호 군은 빛의 마리아라는 그림이 순전히 태호 군의 혼자 생각으로 만들어진 그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기로는 태호 군은 미국에 처음 왔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림에 대해 이렇듯 자세히 알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태호의 그림에는, 여기에는 이 그림을 수십 년째 보며 관리하고 논문을 쓴 사람도 놓친 사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토마스의 눈길이 제이슨에게 향했다.
"우리는 Faceless 작가의 후손이 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집안에서 옛날 일기나 편지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죠. 우리도 모르는 사실을 담은 그림을 그리려면 그 가정이 제일 설득력이 있지요."
"윌슨이 태호 군에 대한 정보를 하나도 주지 않았기에 이 자리에 초대했지 만약 이제 대학교에 들어갈 나이였다면 이 자리에 초대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의 출장도 취소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뒷말이 빠진 듯했다.
"우리는 복제품이나 빛의 마리아도 누가 대신 그려 줬을 거라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보드에 그림 그리는 솜씨를 보니 그런 의심은 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게 아니어도 썬 갤러리에 있는 태호의 다른 그림들을 보고도 그런 의심을 어느 정도 접었긴 했지만."
책상을 검지를 톡톡 두드리던 토마스.
"태호 군, 미안하지만 우리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줄 수 있겠나? 잠시 내부 회의를 하고 다시 부르겠네. 미안하지만 잠시 동안 미술관을 돌아보는 건 어떻겠는가?"
"Faceless를 봐도 되겠습니까? 오늘 여기 온 목적이 그 그림을 보고자 함입니다."
"좋아. 그러도록 하지. 에이미, 태호에게 Faceless를 보여주게. 회의가 끝나면 연락을 하지. 한 시간이면 될 거야."
*
회의실.
"태호를 참여시켜야 할지 의사결정을 하고자 합니다. 제이슨이 먼저 시작해 주세요."
"난 참여를 시켜야 된다고 봅니다. 그는 거의 완벽하게 Faceless의 복제품을 완성해냈어요. 만에 하나 복원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이슨은 빛의 마리아를 봤을 때부터 태호를 포함시키기를 원했으며 이를 강력하게 제이슨에게 어필했다. 돈은 몇만 불 더 들겠지만 자기 돈도 아닐뿐더러 전체 복원 예산에 비하면 티도 안 났다.
그렇지만 그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한 사연이 있었다. 얼마 전에 꿈을 꿨다. 빌바오에서 일하는 동안 얼굴 없는 Faceless를 해마다 최소 한 번씩 봐왔다. 며칠 전 꿨던 꿈에는 정말 최초로 얼굴이 있는 Faceless가 나타났다. 그 얼굴은 얼마 전 태호가 그려온 빛의 마리아에서 본 그 얼굴이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생각을 곰곰이 정리하고 있는데,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왠지 모르게 흘러내린 감동의 눈물이었다. 이때 제이슨은 확신했다. 태호가 Faceless의 얼굴을 찾아줄 수 있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작가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 만의 하나라는 문제 발생 가능성조차 없애는 게 저희의 역할입니다만. 문제가 생겼을 경우 도와줄 사람이 하나라도 더 있다면 나쁠 건 없겠지요. 뜻대로 하세요."
복원 책임자인 엘리야 프라이스는 돈을 더 들이겠다는 미술관의 의견에 굳이 반대를 하지 않았다. 핵심 관계자인 제이슨의 집착을 읽은 것이었다.
"의견 감사합니다. 그럼 태호를 이번 복원 작업에 참여시키는 것으로 하지요."
*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다가와 태호를 Faceless의 복원 실로 안내했다.
몇 단계의 보안을 거친 후 도착한 곳에는 Faceless의 눈부시게 찬란한 그리고 도도한 자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품에서 빛이 났다. 태호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진짜 Faceless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