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일본 미술, 무라카미2 (?) (51/181)

///// 일본 미술, 무라카미2 (?)

카츠키는 설명을 할까 말까 하는 망설이는 얼굴을 하다가 곧 설명을 시작했다.

"일본은 2차대전 패전 이후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지금 일본이 가지고 있는 많은 사회 문제가 잉태했다는 것은 알고 있나? 일본인은 일본이 갈라파고스섬처럼 되어가고 있다고 얘기하곤 해. 국제 정치, 국제 사회에서 동떨어져서 혼자만의 생태계를 만들어 왔었어. 그러면서 좀 유치해졌다고 해야 될까? 유아틱 해졌다고 해야 되나. 일본에 있는 여러 가지 사회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파고들어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현실 세계와는 동떨어진 상상 속의 세상을 만들어 냈고 거기에 몰입했지. 이런 건 어떻게 만들어도 현실 사회에서 비난받지 않는다는 메리트가 있었기도 했고. 괴물, 우주전쟁, 사이보그, 미소녀 등등, 이런 것들을 애니메이션이나 망가, 비디오게임 등을 통해 생산되었고 과도하게 소비되고 있지. 이런 일본 사회의 단면을 폭력적인 성적 표현으로 제작한 작품이 히로폰이야. 그리고 난 이게 마약같이 일본 문화의 어두운 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일본 서브컬처에 대해 조금은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계시네요? 일본이 이쪽 문화 사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한 걸로 알고 있어서 긍정적인 시각이 많을 줄 알았거든요. 전 그냥 건담과 마크로스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자본이 그쪽으로 몰린 결과라고만 생각했어요. 전쟁 패배 영향 같은 건 생각도 안 해봤어요."

"기동전사 건담과 마크로스도 알고 있나?"

"일본에서 유행했던 만화는 거의 다 알아요. 몰랐는데 TV에서 다 방영을 해줬죠. 심지어 한국에서 만든 마크로스 짝퉁도 있었어요. 스페이드 간담 V라고. 한국 만화인 줄 알고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았죠. 그게 마크로스 카피였다는 걸. 건담 플라모델도 알고요. 새로운 건담 모델을 그려도 봤는걸요. 무라카미 씨도 잘 아시겠네요."

"잘 알지. 만약 내 원래 꿈은 만화가였어."

"만화면 로봇 아닌가요? 로봇 작품을 제작하시지는 않으시네요?"

태호는 조각들 중에 로봇 작품이 없다는 걸 알고 농담반으로 물어봤다.

"로봇을 제작해서 줄 수 있는 메시지가 뭐가 있을까? 내가 보기엔 없었어. 거기에 어설프게 로봇을 제작하는 건 못 할 짓이지. 그건 SF 영역이라고 생각해. 결정적으로 로봇 쪽은 내 전공 분야가 아니야. 만화를 잘 그리고 싶었는데 잘 안 되더라고. 하하."

*

작품들을 보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이미 점심시간이 지나버렸다.

아침 첫 도쿄행 비행기로 오다 보니 새벽 일찍 일어나서 길을 나섰기에 배가 살짝 고팠다.

"먼 길을 오셨으니 오늘 점심은 제가 대접하고 싶습니다. 대접이라고 했지만 거창한 건 아니고요. 근처에 가락국숫집이 있는데 면발이 아주 좋습니다. 발로 꾹꾹 눌러 밟아 반죽하는 족탕면인데 아주 쫄깃쫄깃하죠. 일본에선 가락국수 면의 식감을 표현할 때 코시라고 하는데 이 집의 코시가 매우 좋습니다. 두 분도 좋아하실 겁니다. 외지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집이에요."

식당은 작고 아담했지만, 사람들로 붐볐다. 태호 일행도 서두른 덕분에 간신히 마지막 테이블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음식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릴 듯해 보여 태호와 무라카미는 대화를 이어갔다.

"무라카미 씨 작품을 보면 현재 일본 사회에 대한 단면을 담고 거기에 대한 꽤 비판적인 시각을 입힌 것들이더라고요. 그런데 작품에 무라카미 씨는 잘 보이지가 않아서요. 왜 그런 건가요?"

"결함투성이에 못생긴 내가 작품에 나와서 뭐 하게? 봐 줄 사람도 없어. 차라리 이쁘거나 기괴하거나 충격적인 비주얼이 낫지. 굳이 나라는 사람을 투영해서 이미지를 만들어 낼 필요가 없어. 내가 유화로 그림 그리는 것도 아니고. 하하."

무라카미는 과장된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요즘 내가 골몰하고 있는 주제가 있어. 예술이 사람들에게 더 공평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지."

"그런 비슷한 생각을 가진 작가들은 많이 본 거 같은데요?"

"그 대상이 우리가 지금까지 저급하다고 생각했던 '서브 컬처'까지 아울러야 하고."

"무슨 '서브 컬처'를 얘기하시는 건가요?"

"말 그대로. 오페라와 클래식에 비해 로큰롤은 저급한 문화라고 무시했었던 역사가 있잖아. 그런 것들. 유화에 비해 그라피티가 저급한 것으로 생각되고. 발레에 비해 스트리트 댄스가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지."

"그런 취급을 받는 건 사실 말도 안 되는 거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식이 변하고 그러면 대접이 달라지지. 발레도 옛날에는 매춘에 이용되어 왔다는 건 아나? 난 오타쿠 문화, 즉 애니메이션이나 망가라는 서브 컬처를 하이 컬처로 올려놓을 생각이야."

"좋은 생각인데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지 잘 감이 안 와요." 태호가 대답했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거지. 상품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널리 퍼트리고. 하이 예술보다 저렴한 가격에 팔리겠지만 대중들에게 내 생각이 널리 공유된다면 그것 나름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

대중에게 공유될 만한 저렴한 작품이라는 말에 태호는 자잘한 기념품 등이 떠올랐다.

"열쇠고리나 인형 같은 것도 되겠네요. 더 나가면 가방이나 옷 같은 패션용품에 공유되면 좋겠고요."

"그렇지. 가능하면 고급 브랜드와 협업하면 좋겠지.

일반 브랜드와 하면 가격은 낮아져서 대중화는 쉽게 되겠지만 하이 컬처로 진입하는 건 어려워지니까."

"에르메스 가방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져 있으면 좋겠네요."

태호가 생각만으로도 유쾌한지 웃으며 말했다.

"그 고지식한 사람들이 잘도 그러겠군." 무라카미는 코웃음 쳤다.

"난 이걸 '슈퍼 플로우'이라고 이름 지을 거야. 나아 같은 생각을 가진 작가들이 일본에는 많아."

*

식사를 마치고 무라카미의 작업실로 돌아온 태호는 그의 작품을 구매하고 싶어졌다.

가고시안과 계약을 맺고 있는 그에게서 직접 구매가 가능한지도 의문이었고, 무라카미의 작품가에 대한 정보도 전혀 없었기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태호가 가지고 싶은 것은 작가의 손때가 담긴 도안 같은 것이지, 판매하려고 하는 작품이 아니었다.

"혹시 슈퍼 플로우에 대한 기본 도안이 들어간 그림 하나 그려도 될까요?"

"무슨 얘긴가?"

태호는 베이징에서 두 작가와 그렸던 그림 사진을 보여줬다.

"기념으로 그리게요." 태호는 살짝 애원하듯 말했다.

"좋아. 다만 나와 가고시안과의 계약을 고려해 줘야 해."

"전 두 작품을 만들 생각이에요. 하나는 여기 작업실로 보내고 하나는 뉴욕의 제 딜러에게 보낼 생각이고요. 팔려는 건 아니에요. 작품이 커질 듯해서 집에서 보관하기 안 좋거든요."

태호는 가방에서 캐논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꽃무늬, 이빨이 날카로운 둥그런 괴물, 미스코, 히로폰, 여기에 무라카미 본인까지. 정신없이 카메라 필름을 교체하며 사진을 찍었다.

무라카미는 정신없이 사진 셔터를 눌러대는 태호를 보고 혼이 살짝 빠졌다.

태호가 오타쿠 혹은 산업 스파이 같았다.

*

"태호는 어떤 예술가가 되고 싶은 거지?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

"일단은 미국에 가보려고요. 다들 그곳을 추천하시기도 하고. 미국에 가려고 하는 이유 중 하나도 거기서 방향을 결정지을 생각이기도 하거든요. 지금 생각은 많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활동을 하고 싶진 않거든요."

태호는 아주 큰 목표는 있지만 누구에게 말할 거리는 되지 못했다.

"태호는 거래하는 딜러가 있나? 나이를 생각하면 없는 게 맞지만, 작품의 퀄리티를 보니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프리 윌슨이라고 뉴욕 브루클린과 맨하튼에서 꽤 잔뼈가 굵은 딜러와 계약을 했어요."

"좋은 딜러를 만나기도 쉽지 않지. 이름은 들어본 적은 없지만... 태호의 마음에는 들었나 봐?"

"한국에 왔다가 우연히 제 작품을 보고 계속 연락을 하셨던 분이에요. 지금도 제 작품 몇 개만을 가지고 꾸준히 마케팅을 하시고 계시죠. 무라카미 씨는 누구와 거래하세요?"

"난 가고시안과 거래하고 있어. 래리 가고시안이라고 알지?"

"유능한 딜러라고 알고 있어요."

"예술가에게 딜러는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야. 수수료를 많게는 50%까지 가져가는데 밥값을 해야지."

"태호의 딜러가 얼마나 유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아까 보여준 작품을 제작해서 공급하는데도 시장에서 태호를 못 알아본다면 이건 딜러의 실력을 의심해 봐야 해. 주제넘은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딜러를 바꾸는 걸 고려해 보는 게 좋을 거야."

태호는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윌슨 씨와는 언제든지 아무런 조건 없이 계약을 종료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어놨어요. 충고 고마워요."

"김 교수님 같은 분이 옆에서 어련히 챙기셨겠지."

*

"뉴욕에서도 작업을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나중에 가서 만나면 되겠네요."

"뉴욕? 태호 너도 뉴욕에 가나?"

"대학을 그쪽으로 가려고요."

"그렇군. 그래 그때 다시 만나면 되겠어."

"태호도 잘 생각해 봐. 지금의 미술은 작품만 가지고 성공하는 게 아니라는 거. 내가 하는 것을 봐도 되지만 나의 위대한 스승인 앤디 워홀도 있고, 좋은 본보기인 제프 쿤도 있으니까. 나중에 도쿄나 뉴욕에 놀러 올 일이 있으면 놀러 와. 난 한국도 가끔 방문하기도 하니까, 만날 기회는 많을 거야. 그때는 같이 술도 한잔하자고."

"그래요 무라카미 씨. 뉴욕에서 봐요. 무라카미 씨가 쓰는 이메일 주소 있으면 주세요."

무라카미는 일본 명함을 태호에게 건넸다.

"이메일은 비교적 자주 확인하는 편이니까 연락처를 남기면 내가 연락을 할게."

태호도 명함을 꺼내 무라카미에게 건냈다.

"제 홈페이지 주소이자 앞으로 쓸 명함이에요."

*

육 개월 후.

태호에 대한 까맣게 잊고 있던 무라카미는 갑자기 배달된 그림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다.

3m x 2m의 유화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이었다.

왼편에는 정장을 입은 자신이 얼짱 각도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장에는 자신이 슈퍼 플로우에 이용할 캐릭터라고 보여준 꽃무늬가 패턴으로 들어가 있었다. 손에 든 가죽 비즈니스 가방에는 미스터 도가 커다랗게 그려져 있었다.

오른편에는 태호가 배에 커다란 해골 무늬가 있는 우주 해적 캡틴 하록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왼쪽 어깨가 앞으로 나온 얼짱 각도로 그려져 있었는데, 만화 캐릭터라기보다는 대형 피겨를 떠올릴 정도로 플라스틱 질감이 났다.

배경에는 태호가 영혼을 갈아 넣어 그린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초시공 요새 마크로스 앞에서 노래하는 민메이'

'은하철도 999를 배경으로 서 있는 메텔과 철이'

'에어리어 88의 카지만 신과 노스롭 F-5'

'드래건 볼의 손오공, 오룡, 야무치, 그리고 부르마.'

'기동전사 건담을 배경으로 서 있는 아무로와 샤아'

'빨간색 오토바이에 앉아 있는 아키라'

'공각기동대에서 온통 금이 간 의체의 모습인 구사나기 소사'

마징가 Z 같은 태호 취향에 맞지 않는 애니메이션을 뺀 80-90년대 유명했던 작품들의 포스터 컷들이 들어간 작품이었다.

멀리서 떨어져 보면 캐릭터들이 정신없이 섞여있어 태호와 무라카미 두 사람이 돋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각 캐릭터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살짝 떨어져서 그림을 보는 무라카미의 두 눈에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태어나서 작품을 보며 이렇게 눈물이 나긴 처음인 듯했다.

인생 작품이었다. 모두 태호가 손수 그린 작품으로 그림을 통해 태호가 얼마나 고생하며 작품을 완성했는지 상상이 되었다.

안에 같이 동봉된 편지에는 태호가 어떤 노력을 기울이며 그림을 그렸는지 구구절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 한 작품을 더 그려서 태호 자신도 소장하고 싶으니 양해 바란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무라카미는 얼마 전 완성한 대형 슈퍼 플로우 꽃송이 한 작품과 그림 한 점을 더 그려도 좋다는 편지를 동봉해 뉴욕으로 보냈다. 전에 받았던 윌슨의 명함을 아직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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