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미술, 사천왕2 (?)
"내일 쑹좡에 오신다구요?" 위에밍중이 물었다.
쑹좡은 798 예술구로도 불리며 위에밍위엔 예술촌을 벗어난 작가들이 새로 둥지를 튼 지역 이름이었다. 두 사람의 작업실 모두 그곳에 있다.
"예, 태호가 그림을 구하고 있습니다. 혹시 괜찮은 작품이 있습니까?"
"글쎄요... 일단 오셔서 보시고 얘기하시죠."
작품 얘기가 나오자 말끝을 흐리는 위에밍중. 아무리 돈 얘기에 거리낌이 없는 그였지만 김 교수와 그의 제자와 작품 거래를 이렇게 얘기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두 사람의 명함을 받았고 위치를 확인했다.
"내일 점심 이후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 학교도 근처에 있으니 구경 가봐야겠네요."
*
저녁 식사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태호는 평소에 중국에 대해 막연히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풀기 위해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왜 중국 사람들은 마오쩌둥을 사랑할까요?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 실패로 죽은 중국 사람들 수가 수천만 명은 될 텐데요." 태호가 물었다.
"근대 중국의 아버지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더 크기 때문일 거야. 청나라 이후 난립하던 군벌들을 이기고 하나의 중국을 만든 사람이 마오쩌둥과 공산당이니까. 또 역사는 승자의 것이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란 그저 큰 훌륭한 업적을 세운 사람이 늙은 막에 저지른 작은 과오로 보는 거지."
"숫자가 수천만인데요?"
"정치인들에게는 숫자일 뿐이지. 백만 명이 죽나 천만 명이 죽나 일 억 명이 죽나 뭐가 다르겠어. 그리고 중국 사람들의 숫자 감각은 우리랑 좀 달라."
"천안문 사태로 중국이 많은 부분에서 민주화가 될 거로 생각했었는데 이게 맞는 예측일까요?"
김 교수는 그다지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정치 체계는 오랜 시간 서서히 변해가기도 하지만 보통은 그렇지 않아. 단기간에 강한 내외부 영향을 받아 단기간 변하기도 하지. 천안문은 내가 보기에 중국의 시계를 뒤로 많이 후퇴시켰어."
"국가는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어. 중국의 일당독재는 10억이 넘는 인구를 통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체계이기 때문에 살아남는 거야. 중국 사람들도 일당독재가 좋은 체제가 아니라는 건 잘 알아. 다만 이것보다 나은 대안이 없기 때문에 참는 것뿐이야."
"교수님은 중국이 언제쯤 민주주의 국가가 될 거라고 보고 계세요?"
태호의 질문은 이어졌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배운 세대들이 60대쯤이 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중국 학교에선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아. 사람들이 언제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게 될지 기약이 없는 거지. 그것에 대해 제일 크게 분노하는 사람이 이틀 전에 본 아이웨아웨아 일거야. 자기 나라를 돈만 밝히는 아이 같다고 한 게 그런 이유지."
"아이웨아웨아 아저씨는 말씀을 되게 거침없이 하시던데 괜찮을까요?"
"지금은 괜찮을 거야. 나중에 인터넷이 더 발달해서 그 사람 말이 영향력을 더 가지게 되면 그때는 조심해야겠지. 조심할 사람은 아니지만."
"왜 저렇게 중국 정부에서는 예술가를 탄압하는 걸까요?"
"예술가를 탄압하는 게 아니라, 당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거야."
"가끔 보면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맞나 싶긴 해요."
"중국이 공산당이 정권을 잡고 있긴 하지만 공산주의 모습이 얼마나 남아있어? 많이 없지. 자본주의가 침투할 수록 이데올로기는 빠지고 일당 독재 국가의 모습만 남는 거야."
*
쑹좡에는 정말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실이 있었다. 아이웨아웨아부터 위에밍중, 팽리진, 쯩팡즈까지.
이곳이 중국 예술가들의 터전이 된 배경에는 1990년대 구조조정으로 비게 된 공장과 터를 근처로 이전한 중앙미술 학원의 교수들이 애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미국 소호와 100년의 시간차가 있으나 예술가들의 터전이 된 이유는 똑같이 싼 임대료와 접근성이다.
도심에서 차로 30-40분 거리이고 평당 월세가 만 원꼴로 베이징에선 비교적 저렴했던 까닭에 갤러리와 작가의 작업실이 들어서게 되었다. 단 공장과 터는 국영 기업이 관리하기에 월세는 쌌지만, 구매는 불가능했다.
*
"공장이 예쁜데요? 보통 공장 건물을 이렇게 잘 짓나요?"
태호는 빈 공장 들을 둘러보다 감탄하며 말했다.
"1950년대 동독 기술자들이 와서 지었다고 해.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특징인 단순하고 기능적인 면을 잘 살린 건축물이지. 이 자체만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어."
*
처음 들른 곳은 위에밍중의 작업실이었다. 큰길에서 좀 안쪽에 작업실이 위치해 있기 때문에 팽리진 작업실보다 먼저 방문했다.
그의 스튜디오는 6개의 폐공장 중 하나였다. 60평 남짓한 공간에 높이는 8미터 정도로 보였다. 바닥은 시멘트로 깔끔하게 미장이 되어 있었고, 어느 회색 기둥 사이에 빨간색 벽돌로 된 벽마다 작업 중인 그림들이 걸려있거나 걸쳐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한 남성이 다가왔다. 선약이 있다고 알리자 위에밍중 작가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며 작업실에 걸린 작품들을 소개했다. 아무래도 조수가 그림의 판매까지 하는 듯했다.
안쪽의 한 벽면에는 150cm x 300cm 크기의 거대한 그림이 있었다. 한눈에 고야의 '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을 패러디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이었다. 고야의 작품에서는 공포에 휩싸인 수비군들이 있었다면 이 작품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빨을 다 드러내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총살형을 집행하는 인물들의 손에는 총도 보이지 않았다. 배경은 고궁이 보였는데 한눈에 천안문이란 걸 알 수가 있었다.
"그 작품이 마음에 드나?"
어느새 위에밍중이 태호에게 다가왔다.
셋은 말 없이 그림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림을 바라봤다.
"제목이 어떻게 되나요?" 태호가 잠시 후에 물었다.
"처형"
"역시 그러네요."
태호는 이 그림이 작업실 안에 있는 어떤 그림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위에밍중의 눈치를 살피던 태호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제가 이 그림을 가져가도 될까요? 삼만 달러면 괜찮을까요?"
금액을 들은 위에밍중은 살짝 놀랐다. 잠시 생각을 정리한 그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양광이 선생 때문에 그런 건가?"
"그런 것도 있죠. 양광이 선생 그림보다 이 그림이 비교도 안 되게 좋아요. 지금이야 삼만 달러지만 몇 년 안 지나면 30만 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오를 거예요. 저도 싸게 구입할 수 있어서 좋네요."
태호는 빙그레 웃으며 얘기했다. 정말 옆에서 봐도 기분까지 좋아지는 웃음이었다.
그림이 누가 봐도 천안문 민주화 운동이 담겼고, 크기가 커서 이 년 넘게 팔리지 않았던 작품이다. 이걸 태호가 보자마자 구입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만 달러 정도를 부르고 조금 깎아 줄 생각이었던 위에밍중은 태호의 통 큰 제안에 그림 한 점을 무료로 가져가라고 했다.
"아니요. 전 위에밍중 선생의 작품을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싶지, 이렇듯 덤으로 가져가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자 위에밍중은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이건 어때? 난 태호에게 내 그림 하나를 선물하고 싶어. 대신 태호 네가 그림 하나를 여기서 그려줘. 조건은 자네 모습도 그림에 있어야 해. 정말 기쁜 마음으로 간직하지. 혹시 아나? 나중에 자네가 유명해지면 이 그림이 수십만 달러를 할지? 하하."
위에밍중은 태호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하며 그림 얻기를 희망했다.
"좋아요." 태호도 흔쾌히 승낙했다.
태호는 대략 가로세로 40 cm 정도 되는 캔버스 4개를 요구했다. 위에밍중의 조수는 그 자리에서 프레임을 제작했다.
"4개의 그림을 그릴 거예요. 위에밍중 선생의 초상화, 위에밍중 선생을 닮은 웃는 얼굴 캐릭터, 제 얼굴을 닮은 웃는 얼굴 캐릭터, 그리고 제 초상화."
"유화로 그릴 생각인가? 시간이 충분하지 않을 텐데?"
"알라 프리마 (Alla Prima, Wet-on-Wet) 기법으로 하면 빨리 끝낼 수 있어요."
이 기법으로 그리면 한 번에 천체를 다 그리는 까닭에 빠르게 그릴 수 있다.
이 기법을 이용해 그린 그림은 사실 많다. 그런 그림 중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아마 제일 유명할 것이다. 사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인 프란스 할스와 렘브란트도 이 기법을 즐겨 사용했다. 그림을 빠르게 그려야 하는 인상파 화가들이나 고흐가 애용했던 방법이기도 하다.
알라 프리마 기법으로 그린 그림은 그래서 즉흥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쳤다.
주의해야 할 점은 수정을 자제해야 그 느낌이 산다. 물감이 다 마르지 않은 상태로 칠하기 때문에 색이 뭉개진다는 문제도 있다. 그 외의 단점으로는 유화 특유의 깊이감이 좀 덜 하다.
태호는 유화의 깊이감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위에밍중의 그림은 아크릴로 그렸다고 해도 믿을 만큼 팝 미술의 느낌이 났기에 무엇으로 그리나 비슷하게 보일 거라 생각했다. 여기에 태호는 빨리 그리는 그림에는 자신이 있었다.
4개의 캔버스에 최대한 빠르게 붓으로 큰 얼개를 그렸다. 세세한 디테일은 무시했다. 그런 부분은 나중에 커버해도 된다. 근처에 있는 물감들을 팔레트에 짜서 붓과 나이프로 섞고 붓으로 또는 나이프 자체를 이용해서 칠했다.
바탕을 씃씃 칠 한 후, 그 위에 붓질만 한번 쓱 하면 눈썹이 생기고 눈코입이 만들어졌다. 가까이서 보면 물감 범벅에 불과한데 떨어져서 보면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태호나 위에밍중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마술 같았다.
태호를 만난 게 어제고 아는 것도 거의 없지만 위에밍중은 태호의 빠른 붓놀림에서 거장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다. 태호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위에밍중은 점점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대학생도 되지 않은 어린 학생의 솜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그림을 이렇게 빨리 그릴 수가 있는 건가?"
위에밍중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완전히 새로운 그림을 그리는 거면 생각할 게 많아서 오래 걸릴 텐데 이미 만들어진 그림을 살짝 비틀기만 하는 거면 오래 안 걸려요."
태호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했다. 태호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거만하다고 욕을 했을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얘기하지 말게. 자네를 질투하고 시기할 거야."
위에밍중은 짐짓 염려된다는 말투였다. 어제 처음 만난 작가지만 정말 옆에서 지켜볼 맛이 있는 젊은이였다.
"선생님 같은 대가 앞에서나 하는 얘기죠." 태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림은 2시간이 채 안 되어 완성되었다. 크기가 작아서 가능했다.
빠르게 그렸지만 그림에서 부족한 부분은 전혀 없었다.
완성된 그림은 벽에 두지 않고 평평한 바닥에 두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제법 통일성 있는 연작의 느낌이 났다. 네 개의 캔버스를 조합하는 방법에 따라 느낌이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