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미술, 동촌2 (?)
태호는 옆에서 주문하는 것을 들으니 처음 듣는 음식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혀, 개구리, 야채, 만두, 면, 양고기, 심장 이런 단어가 들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베이징 덕이 있었고 술은 천진고량주였다.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이웨아웨아가 물어봤다. 베이징 최고급 식당에서 요리와 술을 이렇게 시키면 상당한 요금이 나올 게 확실하다.
"이 정도는 문제없어. 제자 덕에 수수료를 제법 받았거든."
김 교수는 태호 덕에 수수료를 제법 챙길 수 있었다면서 모인 사람들에게 부담 갖지 말고 즐길 것을 요청했다.
"전에 한번 거하게 산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이렇게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기쁘네."
태호는 의아함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두 행위 예술가이신 거예요? 중국에 이렇게 많은 분이 이쪽 예술을 하실지 몰랐어요. 한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데."
한국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행위 예술가들이 공산주의 치하의 중국에 이리도 많다니 태호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많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많은 게 아니야. 중국 인구 십억 중에 여기 있는 사람들이 행위 예술가의 반은 될걸?"
태호는 중국이 한국 인구의 20배는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얼마 안 되네요."
"태호가 잘 몰라서 그렇지, 한국은 1960년대부터 행위 예술가들의 활동이 있었어. 다들 모르고 이해를 못 해 미친 사람 취급해 와서 그렇지."
김 교수가 태호에게 부연 설명했다.
"좀 더 국내 행위 예술가들의 활동에 대해 알고 싶으면 강 교수에게도 물어봐. 잘 알 거야." 평소 강 교수 얘기를 거의 꺼내지 않는 분이 이런 말을 하니 좀 신선했다.
베이징 덕이 나오고 천진 고량주가 2병 이상 들어가자 다들 왁자지껄 해졌다.
정말 다들 술을 물처럼 마셨다.
술이 들어가자 본격적으로 예술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나라에서 자네들이 하는 행위 예술은 인정받기 어려워.
여기는 오로지 회화.
예쁘게 포장해서 벽에 걸어 놓을 수 있는 회화.
잘 떼서 다른 사람들에 쉽게 팔아먹을 수 있는 회화.
가격도 잘 내려가지 않고 탈세도 쉬운 회화가 최고란 말이야."
아이웨아웨아가 화가 난 듯 테이블까지 쳐가며 열변을 토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림을 그릴 줄 몰라서 행위 예술을 한다고 생각하지. 행위 예술이라고 알아보는 사람은 백의 하나? 아니 만에 하나는 될까? 다들 미친놈 취급을 해. 남들에게 튀어 보이기 위해 발악을 하는 똘아이들. 이게 여기서 우리들에 대한 평가야. 하지만 우리는 미친 게 아니야. 우리는 몸으로 하는 예술, 몸으로 직접 소통할 수 있는 예술을 하는 것뿐이야. 물감으로 만든 이미지는 기억에서 금방 사라져. 하지만 몸으로 만든 이미지는 계속 기억에 남아. 우리는 단지 남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것뿐이라고."
마리윙민은 얼굴만큼이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직도 캔버스 위에 그린 그림만을 예술이라고 생각해. 이미 수천 년을 그렇게 살아온 걸 어떻게 바꾸겠나? 시간이 걸리는 거지. 그리고 길이 여기에 없으면 다른 곳에서 찾으면 그만이야."
중후한 목소리의 장 훼얀은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인 듯했다.
"정말로 미국으로 떠날 생각인가?"
아이웨아웨아가 물었다.
"여기에 길이 있다면 돌아오겠지. 일단 뉴욕에서 찾아볼 생각이야."
장 훼얀이 대답했다.
"태호는 행위 예술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장 훼얀이 물었다.
"제가 본 행위 예술은 딱 한번인데, 여성의 권리 신장을 주제로 한 거였어요. 저에게는 그게 순수 예술이 아닌 정치적 목적의 예술로 보이더라고요. 남성이 낄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어요. 전 그걸 반쪽짜리 예술이라고 생각했고, 반쪽짜리 예술은 저에게 설득력이 떨어지죠. 그 뒤로는 거의 관심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구경꾼들은 남자들만 잔뜩 있었겠군." 룽룽이 말했다.
"네, 그렇죠. 다들 여자들의 누드에 관심이 있었지, 그들의 목소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죠."
"전 여기 계신 분들의 과거 사진을 보고 놀랐어요. 무척이나 원초적이고. 대부분의 사진에서 예술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었고, 제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미지였어요."
"최고의 칭찬이야." 장 훼얀이 웃으며 말했다.
*
룸은 피워대는 담배 연기로 가득해야 하지만 환기 시설이 잘되어 있는지 룸 안의 식사를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김 교수와 태호가 사간 담배를 정말 맛있게 피우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고량주 빈 병만 5개가 있었고 칭다오 빈 병도 곳곳에 보였다. 술이 술을 먹는 단계였다. 멀쩡한 건 태호였는데 미성년자임에도 작은 잔이지만 석 잔이나 술을 마셨다. 슬슬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 물어봐도 돼요? 아까 사진을 보며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하나 있었어요." 태호가 물었다.
"왜 행위 예술가들은 작품 할 때 옷을 벗어요?"
"하하하." 장훼얀과 마리윙민, 청신까지 세 사람은 다양한 목소리로 웃었다.
"아니, 왜 웃어요. 전 정말 궁금했다고요." 태호는 살짝 억울한 듯 말했다.
"태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뭐야?" 장 훼얀이 물었다.
"이렇게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화내지 마세요. 그냥 사람들이 작품에 집중하도록 한 거 아니에요? 확 튀잖아요."
태호의 진지한 표정이 그들의 웃음 샘을 제대로 자극한 듯했다.
"행위 예술가는 몸이 곧 캔버스요 물감이야. 옷을 입으면 그림을 가리는 것과 마찬가지지." 장훼얀이 대답했다.
"몸이 좋아야겠어요."
"태호도 내일 벗어야 할 거야."
"네?"
"내일 나와 같이 사진 찍기로 했는데 몰랐어?"
"무슨 사진이오?"
"주소는 교수님이 알고 계시니까 같이 오면 돼. 올 때 수건 꼭 챙겨와."
*
새벽에 택시를 타고 향한 곳은 베이징 도심을 벗어나 시 경계에 있는 저수지 근처였다. 벌써 수십 명의 남자가 담배를 피우며 서성이고 있었다.
"건설 노동자들과 이사 업체 직원들이야." 룽룽이 한 손엔 카메라를 들고 찾아왔다.
태호도 가방에서 라이카 카메라를 꺼내 들고 구도를 잡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꺼낼 필요가 있을까?" 룽룽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태호야. 넌 오늘 모델로 온 거야. 사진작가로 온 게 아니고." 김 교수는 술 냄새가 풀풀 나는 입으로 태호에게 말했다. 늘 깔끔한 김 교수의 입에서 술 냄새가 날 정도면 어제 정말로 많이 마신 듯했다.
"무슨 모델을 하라는 거죠?" 태호는 시치미를 떼며 얘기했다.
"저기." 룽룽은 양어장을 손으로 가리켰고.
태호의 얼굴이 물 색깔로 변했다.
"저길 어떻게 들어가요? 피부병 걸리게."
"여기 물 되게 깨끗해. 밑에 진흙이 있어서 그렇지 물은 깨끗한 물이야."
"깊잖아요."
"일 미터도 안 돼."
*
물에 들어갈 것을 알고 온 태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늘 계약 내용도 모르고 온 노동자들은 물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
계약에는 오늘 여기로 모여 아침에 7시 전까지 사진을 찍는 것을 도와준다는 내용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금액이 많지는 않았지만 사진 한 장 찍는 조건으로 점심값은 하고도 남을 돈을 받기에 아무 생각 없이 여기에 온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새벽에 옷을 젖어가며 찬물에 들어가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 훼얀은 이런 노동자들을 다그쳤다.
"곧 해가 뜹니다. 빨리 안 끝나면 여러분은 직장에 늦을 수 있습니다. 빨리 10분 만에 해치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일터로 나가야죠!"
팬티만 입은 채 하나둘 양어장에 사람들이 들어갔다. 훼얀은 재빨리 이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사진 대형으로 모이게 했다. 그러고는 태호에게 손짓했다.
"태호야! 너도 들어와야지."
사과를 한입 씹었는데 벌레가 반으로 끊긴 모습을 본 표정으로 태호는 팬티만 걸친 채 물속으로 들어갔다.
태호가 양어장 안쪽으로 들어갔고 훼얀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룽룽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태호는 무표정으로 훼얀의 오른편에 서 있었고 룽룽은 필름을 바꿔가며 오 분가량 셔터를 정신없이 눌러 댔다.
*
촬영이 끝나고 노동자들은 하나둘 인솔자를 따라 양어장을 벗어났다. 그나마 약속대로 돈을 받은 건 다행이지만 아침부터 팬티가 젖은 건 영 못마땅한 모양이었다.
태호는 이십 분 만에 끝난 이 촬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훼얀 씨, 오늘 작품의 이름이 뭐예요?"
"양어장 수위 높이기."
"네? 양어장 수위를 왜 높여요?"
"지금 우리가 물에 들어가서 이 양어장의 수위가 올라갔지?"
"조금은 올라갔겠죠?"
"이걸 통해서 양어장이라는 사물의 자연 상태를 우리가 바꾼 셈이지."
"어... 그런데요?"
"오늘의 퍼포먼스로 우리가 자연의 상태를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거야."
"음...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그건 내가 설명해 줘야겠군."
술이 조금은 더 깬 듯한 얼굴의 김 교수가 다가와 태호에게 부연 설명을 해줬다.
"인구가 많은 중국에서는 개개인의 가치가 크게 인정받지 못해. 하지만 이들이 모이고 힘을 합치면 더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지. 이 양어장의 수위가 올라간 것처럼."
태호는 눈빛으로 이 설명이 맞는지 장훼얀에게 물었다.
"물 높이는 올라갔지만 그게 지속이 되어야지."
훼얀은 더 이해하기 힘들게 말했다.
"바꿀 수 있다는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어요."
훼얀은 양어장에서 나와 젖은 몸을 말리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상으로 돌아간다면 의미가 없어. 계속 물에 몸을 담그고 있어야지."
룽룽은 이때까지도 사진을 계속해서 찍고 있었다.
양어장에 들어갔을 때와 나왔을 때의 모습. 이 둘의 비교가 작품이 의미하는 바였다.
태호는 계속 물에 들어가서 높은 수위를 유지하는 것인지, 사람들의 노력으로 물 수위가 올라가서 만족한다는 것인지, 이런 행위 자체가 매우 허무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훼얀도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관객에게 해석의 여지를 남겨주려 그러는 듯했다.
*
동촌 사람들과 작별한 태호와 김 교수는 바로 호텔로 돌아와 샤워부터 했다. 태호는 놀랍지만 그렇게 즐겁지는 않았던 아침의 사건을 돌아보며 김 교수가 평소와는 좀 다르게 행동한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나온 태호는 김 교수에게 물었다.
"여기 오신 게 무척이나 즐거워 보이세요." 배배 꼰 태호의 얘기였지만 김 교수는 웃어넘겼다.
"이 년 전에 동촌 사람들과 작업을 했을 때도 즐거웠는데, 오늘도 재밌었어. 내가 그래서 그 사람들을 좋아한다니까."
"뭐가 그리 좋으세요."
"예술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사람들이야. 젊고 진취적이지. 때 묻지 않았고. 난 이 사람들을 볼 때마다 얼굴을 덮었던 가면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어. 그래서 즐겁고. 태호도 나중에 한국 미술계를 알게 되면 내 심정을 이해할 날이 올 거야."
김 교수는 오늘 저녁이면 내려놓은 가면을 다시 쓸 것이다. 그가 이렇게 자신을 내려놓은 건 오직 이 사람들을 만날 때뿐인 듯했다.
"저녁에 네 딜러가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날 거야. 중국에서 가면극을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