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프리 윌슨1 (40/181)

///// 제프리 윌슨1

태호가 강 교수의 작업실에 나타났다.

"고등학교를 자퇴했다는 얘기는 들었다."

강 교수는 태호가 고등학교를 자퇴하자 아쉽다고 말은 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방학 때나 두 번 만났고, 학교에 다니는 동안 태호를 거의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는 시간에 뭘 할 거야?"

"대학 준비를 해야죠. 그런데 학교를 안 다니는데 대학에 갈 수 있을까요? 검정고시를 보면 자격이야 얻지만 모든 고등학생이 원하는 학교를 가는 건 아니잖아요."

"대학 준비를 위해 미술상을 시도하는 건 어때?"

"국전 말씀하시는 거죠?"

"아니, 국전 말고. 국전은 만 20세나 아니면 대학생들부터 참가할 수 있어. 넌 나중에라도 참가하지 마. 입선해도 문제고 안 해도 문제야. 입선하면 어린 나이에 교수들 영향력으로 상을 받았다는 소리가 나올 테고, 떨어지면 떨어진 걸로도 체면 구기는 일이지. 이 상을 받는 일은 너의 예술적 역량과 거의 관계가 없어. 나도 이 상을 누가 어떻게 받는 건지 이해 불가니까."

"연령 제한이 낮은 해외 대회가 나을 거야. 가볍게 아티스트 매거진부터 시작해 볼까? 여긴 16세부터 참가할 수 있으니까. "

강 교수는 평소에 즐겨보던 잡지인 아티스트 매거진에 나온 연례행사인 미술상을 추천했다. 그리고 태호를 위해 최신판을 해외 주문했다.

입상작들을 보니 사실주의 작품이 많았다. 이 부분은 태호가 가장 자신 있게 제작할 수 있는 작품이다. 태호는 바로 작품 구상에 들어갔다. 그림 그리는 작업보다 구상 단계가 태호에게는 훨씬 어려웠다.

강 교수가 해외에 있는 몇몇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태호가 참가할 수 있는 미술 대회를 알아봤다.

"만 18세가 되면 참가할 수 있는 상들이 많아. 첼시 국제 미술 대회 (Chelsea International Fine Art Competition) 가 있는데 이 상이 세계적으로도 가장 권위 있는 대회 중에 하나야. 이건 꼭 도전해 봐야지."

"BP 초상화 상 (BP PORTRAIT AWARD), 이건 가장 권위 있는 초상화 대회라고 할 수 있지. 왜 BP냐고? 영국 석유 회사 (British Petroleum)에서 지원해서 그렇다네."

"휴고 보스 상 (THE HUGO BOSS PRIZE), 이건 최근에 기획된 대회인데 '빌바오' 미술관에서 개최하고 휴고 보스에서 지원하는 대회야. 휴고 보스 뭔지 알지? 의류 회사. 이건 상금만 1억짜리 대회니 무척이나 큰 대회라고 할 수 있지."

"그 외 다른 대회들도 많은데 국적이나 거주지 제한이 있어. 영국이나 미국에서 개최하는 대회가 국적 제한이 없는 편이지."

태호는 첼시, BP 초상화, 휴고보스. 이 세 개 상을 받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만 18세면 한국 나이로 대학교 1학년이지만, 태호는 병역을 해결하기 위해 일 년 정도 대학을 늦게 갈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수상 경력을 입학 원서에 써 볼 생각이었다.

*

미국의 수학 능력 평가시험 (SAT)과 토플 (TOEFL)을 준비하면서, 혹시 몰라 영국 대입까지 확인했다. 주위에 있는 해외 학위 소지자들은 다 미국 학위 소지자들이고 영국 학위 소지자는 드물었다. 그마저도 대학원을 잘 알지 학부 입학 조건인 A 레벨 시험을 아는 사람도 적었고 자료 구하기도 까다로웠다. 결국 영국은 두 번째 옵션이었기에 차후 계획이 변경되면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국내 고졸 검정고시는 포기했다. 숙영은 아들의 군대 면제 방법을 궁리했고, 큰돈을 들여 받은 컨설팅을 통해 중졸의 경우 군대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만 18세가 되자마자 신체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준비했다. 어릴 적 자폐 증상을 겪었다는 사실 때문에 온 집안 식구가 태호의 군대 면제가 합법적으로 혹은 편법으로 가능하다면 면제받자는데 동의했다.

신체검사 때 중졸로 면제받으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의 검정고시 격인 GED(General Educational Development)과 SAT를 보고 미국 대학을 지원해 볼 작정이다. 이럴 경우 미국 학생들보다 1~2년 정도 늦게 입학하게 되는 셈이다.

예일대 입학을 위해서는 AP Exams (Advanced Placement Exams)을 봐야 한다. 예일대는 AP 과목 중 수학이나 과학 등 몇몇 과목은 학점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과목 위주로 과목을 선택하고 공부했다. 입학이 늦어지는 만큼 졸업은 빨리하고 싶었기에 태호는 AP 수업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SAT와 AP를 준비하는 데는 정말 많은 돈이 든다. SAT는 과목 당 한 달에 백만 원. AP 과목도 비슷하게 들었다. 웬만한 임원급 봉급쟁이도 집안 재산이 없다면 이런 준비를 하기가 쉽지 않다. 학원은 강남에 집중적으로 있어 이촌에서 늘 버스를 타고 강남까지 이동해야 했기에 그 시간 낭비도 어마어마했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미국 입시를 준비하고 틈틈이 서현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을 오랫동안 그렸더니 그때의 설렘과 즐거움, 상처까지도 잊혀 갔다. 누가 물어보면 웃으며 '그때가 좋았다'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봄에 작품을 제출했던 아티스트 매거진에서 초상화 부분 2등 상을 받았다는 연락과 1천 달러의 수표가 날라왔다. 전체 2등도 아니고 경쟁 부분 2등이었다.

"결과가 아쉽지 않아?" 강 교수가 물어봤다.

"아니요. 생각보다 잘 나왔어요. 더 좋은 상을 받았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예요."

태호는 자신의 실력을 살짝 드러내는 수준의 그림을 제출했다.

이 정도의 대회에 진심이 담긴 작품을 제출하기 싫었다.

다움 미술관에 판 두 점의 그림도 돈이 있다면 재구입하고 싶을 정도로 자신의 작품을 떠나보내기를 싫어했다. 두 교수는 예술가의 필연이니 적응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다움에 있는 두 그림에 대한 태호의 아쉬움은 충분히 이해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이메일 하나가 도착했다. 제프리 윌슨이라는 뉴욕의 딜러였다. 브루클린에서 갤러리를 운영하는데 태호의 작품에 관심이 많다는 내용이었다. 가능하면 포트폴리오를 보고 싶은데 이메일로 제공이 가능한지 문의해 왔다.

강 교수의 인맥을 동원해 제프리 윌슨이라는 딜러를 조사했다. 전화 두 통으로 간단히 파악되었다. 중견급 딜러로 인맥이 두텁고 마당발로 알려졌다. 최근 몇 년간 건강이 안 좋아 쉬었고, 관리하던 아티스트들의 이탈이 있어 최근 신규 작가들 영입에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윌슨은 이메일에서 태호의 작품에서 일부러 숨긴 실력을 발견했다고 했다. 요구한 포트폴리오는 태호가 가지고 있던 작품들의 사진을 보내는 것으로 대체했다. 사진의 스캔본은 이메일에 첨부해 보내고 사진들은 소포로 보냈다. 소포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쯤 태호의 핸드폰에 전화가 왔다.

"난 뉴욕의 제프리 윌슨일세. 태호인가?"

"보내준 사진들은 잘 보았네. 이런 질문을 하는 게 맞지는 않지만... 정말 자네가 그린 게 맞는가? 보고도 믿어지지 않아서 말이지."

"혹시 실제 작품들을 볼 수가 있는가? 특히 관세음보살이 그려진 작품을 보고 싶네."

"다움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벌써 말인가? 관련 내용은 가서 듣기로 하지. 미술관에 담당자 연락처를 줄 수 있겠는가? 전화번호도 좋고 이메일 주소는 더 좋네. 자네가 내 소개를 간단히 해주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지. 이런 게 딜러들의 일일세. 작가들이 작업에 전념하게 하는 일. 아직 얼굴도 못 본 사이인데 자네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는 건 아니지."

태호는 김 관장의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윌슨 씨를 소개하고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받아 윌슨 씨에게 보냈다.

*

며칠 후.

"곧 한국을 방문할 수 있네. 언제가 좋겠나? 일주일 후? 그럼 일주일 후에 한국을 방문하지. 자네 작품은 미술관의 별관인 수장고에서 보여주겠다고 하네. 혹시 그날 제국 호텔에 와 줄 수 있겠나? 만나서 얘기도 하고 계약도 진행하려면 부모님 중 한 분이랑 같이 와줬으면 좋겠군."

*

일주일 후.

태호는 부모님과 함께 제국 호텔 로비에서 윌슨을 만났다. 키가 180 정도 되어 보이는 중년이었다. 그는 전형적인 앵글로 색슨의 피부색에 살짝 마른 체형이었는데 크게 앓았던 사람답지 않게 혈색은 좋아 보였다. 밤 갈색 머리카락은 짧게 정리했고 푸른 눈에는 병마와 싸워 이긴 강인한 의지가 보이는 듯했다.

"이렇게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썬 갤러리의 제프리 윌슨입니다."

태호 일행을 본 윌슨은 태호의 부모님과 악수하고 태호와도 인사했다.

"생각보다 훨씬 잘생긴 청년이군요. 예술이 아니라 배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태호 외모에 대한 예찬을 시작으로, 윌슨은 자신의 배경과 한국에 온 목적을 설명했다.

"썬 갤러리는 브루클린에 위치했는데 브루클린 교와 맨해튼 교 사이에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 명소이기도 합니다."

"저도 30년 이상 미술 시장에 종사하고 있지만 참 재밌는 시장입니다. 작가의 작품들이 주식처럼 거래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사기꾼이 협잡을 벌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포커판에 비유하기도 하죠. 썬 갤러리는 93년에 거래액 기준으로 뉴욕에서 탑 5안에 들기도 했던 영향력 있는 갤러리로 전 뉴욕의 미술 시장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림만 확인하고 뉴욕과 미국 전역에서 통용되는 표준 계약에 맞춰 계약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계약 내용은 좀 후에 상세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이유는 수장고에 가서 설명드리죠."

네 사람은 영준의 차를 타고 한남동에 위치한 수장고로 이동했다.

수장고 앞에는 미술관 관계자가 나와 태호 일행을 맞이했다. 김정호 과장과 처음 보는 다른 직원이었다.

마침내 탱화 앞에 위치한 윌슨은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영준과 숙영도 그림이 주는 강렬한 인상에 숨죽이고 감상했다.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림을 관찰하던 윌슨은 김 과장에게 의자를 부탁해 앉아서 관찰하기 시작했고 말이 없어졌다. 말을 붙여보려고 했던 김 과장은 윌슨의 태도에 살짝 당황했다.

머쓱해진 김 과장은 이런저런 그림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참으로 신비로운 그림입니다. 가운데의 부처님, 우리는 편하게 관세음보살이라고 부릅니다만, 이 부처님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채롭습니다. 입은 웃는 것 같지만 눈은 관찰자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도 같고요. 가끔은 위로를 전하기도 하지요."

"이 그림을 본 대부분 사람이 자신이 본 그림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꼽는 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김유미 관장님 이하 미술관 직원들은 태호 군의 이 작품을 사랑하지요. 그리고 태호 군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 하기를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오늘 태호 군과 윌슨 씨가 정식 계약을 맺는다는 얘기를 듣고 김 관장님이 태호 군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쪽은 한국과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모두 가지고 계시는 강 서진 변호사 십니다. 오늘 태호 군에게 계약과 관련된 법률 자문을 드릴 예정입니다."

김 과장이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윌슨은 그림을 10분을 더 말없이 바라보다가 마침내 의자에서 일어섰다. 감동이 가시지 않은 듯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걸 태호 군이 13살에 그렸다는 게 믿기지 않네요. 이 그림의 거래가였던 100만 불이 지금은 높은 가격으로 보일 수 있겠습니다만, 태호 군의 미래를 생각하면 이건 헐값 거래로 기록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다움 미술관이 실력이 좋으시군요. 이런 작가를 남들이 알아채기 전에 잡다니."

윌슨은 태호가 알려줘 실 그림 가격이 50만 불이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그림은 한국 공영방송을 타고 전국에 알려졌습니다. 이쪽의 사진이 당시 이 그림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사람들을 찍은 것이지요."

"우리는 단지 작품의 가치를 한국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높게 평가하고 제시했을 뿐입니다. 지금 보니 윌슨 씨는 우리보다 이 그림의 가치를 더 높게 평가하시는군요."

"제가 당시 태호 군의 딜러였다면 2백만 불 이상도 받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이건 미술관이 크게 이득인 거래가 맞습니다."

윌슨의 칭찬과 비난의 경계가 모호한 말에 김 과장은 안색이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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