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등학교5 (39/181)

///// 고등학교5

첫 키스 이후 둘은 더욱더 가까워졌다.

학교에서도 붙어 다니고 주말에도 붙어 다녔다.

경복궁부터 롯데월드까지, 연예인도 아니면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둘은 쏘다녔다.

태호는 서현의 차를 타고 다니는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적응하고 나니 편하고 좋았다.

태호는 서현의 백일 선물을 준비했다.

한참을 더 그려야 되는 그림이기에 스케치만 보여만 주고 가지고 와서 한참 동안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서현의 이미지로만 그림을 그렸다.

60호 (97cm x 97 cm) 사이즈의 유화였다.

건조되는 데 일 년은 걸리겠지만 그 집 고용인 중에는 전문가들이 많으니 알아서 잘 말릴 것이다.

*

수업은 따분하다 못해 고문이었다.

유일한 희망이었던 미술 시간도 절망적이었다.

학교에서는 온통 죽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것들만 가르쳤다.

입시를 위한 미술. 합격을 위한 미술. 테크닉을 위한 미술.

왜 그리는지 정확히 이해를 못 한 채 보이는 것과 닮은 것을 그리는 데 급급한 전형적인 19세기 아카데미 식 교육이었다.

지금 태호가 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단 하나. 서현을 보기 위해서다.

학교를 안 다녀도 서현과 만나서 노는 데는 별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태호는 엄마에게 조금만 더 참아보라는 말만 두 달째 듣고 있다.

참으면 달라질까? 왜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없었다.

*

첫 키스의 여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하루가 엄청나게 긴 고등학생들에게는 그 짧은 석 달도 마치 삼 년 같았나 보다. 둘은 석 달도 되지 않아 권태로운 커플이 되어 버렸다.

"네가 먼저 전화하면 안 됐어?"

"난 네가 그 색으로 염색하면 무척 어울릴 거로 생각해서 추천한 거야."

"내가 부탁하는데 좀 해주면 안 돼?"

"넌 맨날 그림만 그리냐?"

"내가 사준 힙합 바지 입고 나오랬지? 왜 그 옛날 구식 일자바지를 왜 입었는데. 내가 입고 다니는 옷이랑 안 어울리잖아."

"이번 주말에 못 만난다고? 나랑 만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아?"

"오늘 노래방 가자. 너 이번에 나온 신인가수 설지태 알지? 그 노래 부를 수 있게 준비해야 해. 나 정말 좋아하거든. 노래 못한다고? 나를 위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아?"

"춤은? 못 춘다고? 한번 연습해와 봐. 잘할 수 있을 거야. 파이팅!"

"깔깔깔. 너 오늘 너무 웃겼어. 춤은 좀 못 추더라. 나니까 너랑 놀러 다니는 거야. 요즘 춤 못 추면 무시당해."

서현의 이상형은 그림 그리는 예술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힙합 전사로 바뀌었다.

태호는 서현과 말다툼을 하다 100일 선물도 전달하지 못했다.

*

김 관장은 태호에 대한 언급이 확 줄어들고 전화할 때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담긴 딸의 모습에 태호와 잘 안 되어 간다는 걸 알았다.

"태호의 뭐가 맘에 안 들어?" 저녁 식사 후에 넌지시 물어봤다.

"애는 착하고 좋은데... 너무 따분해. 재미도 없고. 말도 잘하지 못하는 것 같고. 아니, 말은 잘하는데 내가 관심 있어 하는 건 거의 몰라. 배려심도 좀 부족하고. 내가 정말 가끔 해 달라는 건 신경도 안 써. 내가 싫어하는 행동은 골라서 하는 거 같고. 나랑 너무 다른 거 같아. 난 별로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닌데, 정말 그걸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엉뚱한 행동을 해."

"서현아. 대부분의 남자가 그래. 네가 말하는 걸 다 충족하는 남자는 바람둥이밖에 없어. 아니면 사기꾼이거나. 네가 정말 맘에 안 드는 부분이 뭐야?"

"멋이 없어. 얼굴과 그림 실력 그게 다야. 노래방 갔는데 노래를 너무 못해. 아니 어떻게 그렇게 음치야? 거기에 또 박치에 몸치기도 해. 춤을 전혀 출 줄 몰라. 요즘 대세 댄스 가수들 춤을 하나도 출 줄 모른다니까? 어떻게 설지태를 모를 수가 있지? 엄마, TV 틀면 다 나오는 게 그 가순데."

"그래서 태호랑은 안 만나?"

"태호? 학교에서 보는데?"

"보는데?"

"보기만 하지."

"그래? 따로 연락은 안 하고?"

"안 해. 엄마는 뭘 그렇게 꼬치꼬치 물어봐? 내가 걔랑 언제 사귀었어?"

"아니야?"

"갠 그냥 우리 집에 한번 놀러 온 남자인 친구일 뿐이야. 남사친. 그게 다야."

"누가 뭐라니."

"엄마가 뭐라는 거 같아서."

"아니야. 됐다. 네가 그렇다는데 엄마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말투가 되게 아쉬워하는 말투인데?"

"엄마는 태호를 작가로서 좋아하잖니. 괜찮은 애고."

"응. 괜찮은 애는 맞아. 나랑 안 맞을 뿐이지."

*

일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서현과 전화 통화를 안 한 지도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태호는 괜찮았다. 더 이상 할 말도 없었다. 전화하다 보면 머리에 쥐가 나는 듯했다. 안 하니 오히려 애틋하고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기러기나 주말부부가 이해되었다.

오늘은 태호가 숙영과 이태원에 새로 생긴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 날이다. 영준는 지난주에 지방 출장을 갔고 숙영은 토요일인데도 출근했다. 혼자서 밥 먹을 아들이 짠해진 숙영은 아들을 이태원으로 불렀다.

서현과 통화는 안 하고 지내지만, 이것도 한때라고 생각한 태호는, 틈틈이 주말에 서현의 초상화를 그렸다. 나중에 화해하고 난 후 그 성격에 백일선물이니 일주년이니 하면서 선물을 안 줄 경우 매우 매우 삐질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물감이 다 떨어져 종로에 사러 갔다가 점심때가 되자 이태원으로 향했다. 이태원에서 엄마와 점심을 먹고 나오는 길, 옆에서 걸어가는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 설지태 아니야?"

"정말? 선글라스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야 맞다 맞다."

"옆에 앉은 애는 누구야?"

태호와 엄마는 거의 동시에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엔 통유리로 훤히 비치는 한 카페에 젊다기보다는 어린 남녀가 선글라스를 쓴 채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가린다고 가렸지만 태호는 설지태 옆에 앉은 여자가 서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얗게 질린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진자 운동을 했다. 비명과 질식 사이에 무엇이든 선택해야 했다.

차인 건가 생각해 봤지만 차인 건 아닌 듯했다. 서현으로부터 아직 끝내자는 얘기는 없었다.

양다리였다. 자신이 어장 안에 물고기 같았다. 밥도 못 얻어먹는.

저런 서현이를 그리려고 애쓰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학교를 다니는 단 하나의 이유마저 부정당했다.

"학교는 그만 다닐게요."

회색빛의 태호는 숙영에게 말했다.

"서현이니?"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숙영도 태호 작업실을 청소하다 캔버스를 통해 보다 보니 만난 적은 없지만, 서현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친척일 수도 있잖니?"

말이 안 되지만 이렇게라도 무마하고 싶었다.

"아뇨. 엄마도 알잖아요. 그게 아니란 걸."

숙영은 아들의 깊은 낙담을 처음 봤다.

태호의 자폐 시절까지 떠올라 눈이 벌게졌다.

태호는 괜히 나왔다며 자신을 자책했다.

"저는 괜찮아요. 너무 어릴 때 만나면 잘 안된다잖아요."

최근 읽어봤던 연애소설의 문구가 생각났다.

*

다음날 작업실.

어제 봤던 서현이가 작업실 캠퍼스 안에 있었다.

예쁜 만큼 미움도 커졌다.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슬픈 노래가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위대한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련이 필요한 듯했다.

이겨내야 한다.

슬픔을 잊기 위해 뭔가에 몰두하고 싶어졌다. 그림을 버리는 대신 완성 시키기로 결심했다. 잊어버리는 대신 인내하기로 했다.

작업을 시작하자 다양한 감정과 생각이 떠올랐다.

서현은 그 녀석과 키스했을까?

질투심이 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서현은 왜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을까?"

태호는 자기가 서현을 잘 몰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현은 왜 가수를 좋아할까?

노래 잘 부르고 춤 잘 추면 멋져 보이니까.

태호는 붓을 놓고 거울 앞에서 춤으로 유명한 유 씨 가수의 가위 스텝을 따라 했다.

엿장수 가위 같았다.

노래를 잘해야 할까?

놓았던 붓을 잡고 슬픈 언약식을 불러봤다.

상갓집 곡소리 같았다. 아님 고음불가던가.

태호는 서현을 비로소 이해했다.

서현을 향했던 미움이 가시는 걸 느꼈다.

득도한 것 같았다.

*

숙영은 태호를 데리고 학교에 갔다. 자퇴서를 내고 짐 등을 챙겨서 나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한 학기였다.

일주일 후, 이 학기 첫날, 태호의 자퇴 소식은 학교를 강타했다.

서현은 충격으로 얼이 빠진 듯 보였다가 오후에는 조퇴했다.

"왜 나한테는 말 한마디 없었어?"

서현은 기어코 태호를 찾아내 따졌다.

"아, 미안. 학원 다닌다고 바빴어. 깜빡했네. SAT 하고 AP 시험 준비하려고 보니까 너무 정신이 팔렸나 봐. 잘 지냈지?"

태연한 대답에 서현은 뚜껑이 열리는 듯했다.

"잘 지냈지! 네가 내속을 다 긁어놓기 전까지는!"

"그렇구나. 미안해."

서헌은 태호가 좀 변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더 이상 자신을 여자친구가 아닌 동생을 보는 듯한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첫 키스 이후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품 넓은 행동이다. 자신의 키스와 스킨십을 갈망하던 지난날과는 달랐다.

서현이 첫날 이후 한 번도 키스를 허락한 적이 없었다. 밀당을 했다. 자신이 대시로 했던 첫 키스를 살짝 부끄러워했다. 이에 보상받고 싶었고, 춤과 노래는 못하지만 멋진 이 남자를 자신에게 매달리게 하고 싶었다.

지난 한 달간 몰래 다른 남자도 만나봤다. 큰맘 먹고 밖에서 데이트도 해봤지만, 힙합 보이에게 끌리는 게 없었다.

춤은 전기톱처럼 날카로웠으며 노래는 군가처럼 박력이 넘쳤다. 춤은 모르겠지만 노래 실력은 별로였다. 방송은 립싱크 빨 이었다.

영혼이 끌리지 않았다. 자신에게 노골적인 스킨십을 요구해 왔고 시도도 했지만, 철저하게 거부했다. 지난주 개학 전에 확실히 정리했다. 다시 태호에게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춤도 못 추고 노래도 못하고 연애 센스도 없지만, 키워서 데리고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첫 키스의 기억은 가슴 깊이 핑크빛으로 남아있었다. 그런데 태호가 없어진 것이다.

태호의 목소리에서 어떤 거리감이 느껴졌다. 이해심 넓은 목소리지만 자신을 따듯하게 이해해 주기보다는 타인을 혹은 남의 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벽이 느껴졌다. 자신을 보면서 말이다.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왜 그런 거야?"

"대학 가야지? 그 학교에선 준비하기 어려워."

"그래."

'왜'라고 묻지 않았다.

서헌은 이번 주말에 만나자고 얘기하려다가 말았다.

거부당할 거 같았다.

그동안 태호에게 서운했던 모든 것들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자신에게 연락도 없이 학교를 그만둔 건 괘씸하지만 연락하지 말라고 한 건 정작 자신이다.

"준비 잘해."

"알았어. 잘 가."

"그래."

서현은 돌아갔다.

그래도 이렇게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건 좋았다.

눈물은 나지 않았지만 허전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만나자는 전화를 해 왔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현과는 완전히 연락이 끊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