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등학교4 (38/181)

///// 고등학교4

김 관장이 딸과 태호에 대해 고민할 때였다.

"회장님 오셨습니다."

춘천댁이 와서 서현이 아빠, 주지만 회장의 퇴근을 알려왔다.

"어? 오늘 어떻게 일찍 오셨지?"

김 관장은 오늘 남편이 저녁 약속이 있다는 걸 분명히 기억했다.

그게 아니어도 출장이다 뭐다 해서 집에 일찍 오는 게 손에 꼽힌다.

준비할 틈도 없이 주 회장은 거침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에서요?" 김 관장이 물었다.

"KTG 성 회장 아들이 교통사고가 났어. 큰 사고는 아니라는데 같이 술 먹자고 할 기분은 또 아니어서 다음에 보기로 했지."

주 회장은 고개를 돌려 서현을 보고 말했다.

"서현아, 아빠 왔다. 우리 딸, 아빠 안 보고 싶었어?"

고1인 딸이지만 마치 유치원생인 것 마냥 우쭈쭈 하는 말투로 물었다.

"안녕히 다녀오셨어요."

서현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했다. 주 회장은 살짝 당황했다.

"그래. 서현이 학교 잘 갔다 왔니?"

"네."

주 회장은 딸의 인사가 달라진 이유가 아마도 막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하는 이 예비 도둑놈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딸아이를 봤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었다.

보통의 서현은 골드 레트리버처럼 아빠에게 달려와 팔짱을 끼고 온갖 아양을 다 떨며 코맹맹이 소리를 했다. 그런데 오늘은 상견례 나온 숙녀처럼 점잔을 떨며 다소곳이 앉아 있으니 태호를 보는 눈이 더 차게 식었다.

"자네 이름이 태호인가?"

그래도 나름 최대한 감정을 빼고 물었다.

"권태호입니다. 제 이름을 아시네요."

태호는 주 회장이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매우 뜻밖이었다.

"서현이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모를 리 없지."

살짝 눈을 피하고 있던 서현이 고개를 돌려 아빠를 보고 소리를 빽 질렀다.

"아빠!"

"깜짝이야. 이래야 우리 서현이 답지." 그제서야 껄껄 웃으며 인상을 푼 주 회장이다.

식사가 시작되었다.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의 주 회장은 식사 내내 말 한마디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여자 친구 집에 온 사람답게 태호는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평소 까탈스럽게 밥을 먹는 태호를 봐온 서현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길지 않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차가 나왔다.

본격적인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다. 비서실에 얘기하면 하루도 안 되어 다 알아볼 수 있는 자료를, 아니 별 관심도 없는 태호의 집안 내력을, 꼬치꼬치 물어봤다. 압박 면접 같았다.

"부모님은 뭐 하시나?"

"아버지는 삼삼 회계법인 파트너 회계사이시고, 어머니는 오오 기획 차장으로 의류 쪽 광고를 많이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형제가 있나?"

"저 하나입니다."

"형제가 없어서 외롭다거나 그러지 않았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미술과 학생이라고? 앞으로도 계속 미술 쪽을 할 생각인가?"

"그러려고 합니다."

"굳이 전공을 미대로 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내가 아내에게 듣기로 자네는 테크닉으로는 이미 완성된 작가라고 들어서 물어보는 거라네."

"국내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비주얼 아트 전공에서 배울 수 있는 게 단순히 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미술 기법 정도만을 배우는 것은 아닙니다. 아시는 것처럼 기술적인 부분은 저도 이미 완성 단계에 있어서 추가적인 교육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배우고자 하는 것은 머릿속 생각을 구체화하고 그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게끔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미술 쪽도 좋은 분야이긴 한데 남자들이 하기엔 적절한지는 모르겠군. 내 듣기에 국전 출신들도 생활이 어려워 붓을 꺾었다는 얘기를 들었어."

"아직 우리나라가 국전 출신들 작품을 다 소화할 만한 시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국민들이 부유해져서 저들의 작품을 사줄 경제력을 갖춰야 가능하겠지요. 경제력 이외의 문제는 국가 차원에서의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과 홍보가 너무 부족하다는 겁니다. 정부에서 순수 미술을 문화 산업 측면에서 접근해야 하는데 그냥 방치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산업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순수 예술 활동으로 생산된 이미지가 현대 산업에서는 매우 다양한 용도로 활용됩니다. 영화, 애니메이션, 캐릭터 등등 활용처도 무궁무진하지요. 루브르 박물관을 통해 프랑스가 얻는 무형적 자산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는 얘기하는 건 차치하더라도, 가깝게 일본만 봐도 망가나 애니메이션 산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이 무시할 수준이 아니라는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국전 출신들이 모던 아트에만 몰입하는 건 다른 분야로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하는 거로 생각합니다."

"대학은 어디로 갈 건가?"

"영국의 골드스미스나 미국의 예일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뉴욕에 거래하는 딜러가 있는데 예일대를 추천해서 요즘은 그쪽으로 좀 더 기운 상태이긴 합니다."

"대학 졸업하고 활동은 해외에서 할 생각인가?"

"너무 먼 미래라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해외에서 주로 활동할 거 같습니다. 작품 제작은 한국에서 해도, 판매는 해외에서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외국어는"

"영어는 기본적으로 하고 불어 공부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일어와 중국어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의 구사는 가능합니다."

"군대는"

태호는 순간 당황했다. 군대 문제는 너무나 막연해서 생각을 정리해 본 적도 없었고, 그저 '가기 싫다'라는 생각만 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군대를 안 가겠다고 자신 있게 얘기하기엔 그렇게 말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태호가 시원하게 대답을 못 하고 우물쭈물하자 김 관장이 나섰다.

"여보. 여기까지 해요."

더 끝없이 이어질 듯했던 질문은 서현의 눈치를 받은 김 관장이 남편의 질문을 차단함으로써 끝이 났다. 처음에는 긴장해서 몰랐지만, 차츰 태호는 주 회장이 알면서도 물어본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 관장과 서현은 식사가 끝나자 태호를 배웅했다. 서현은 도망치듯 방으로 돌아가고 김 관장은 남편이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참 자식 잘 키웠어. 고1밖에 안 되는데 30을 바라보는 우리 아들들 보다 똑 부러지는구먼."

김 관장은 남편의 긍정적인 말에 다소 안심했다. 자신이 오랫동안 봐온 아이였다. 내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을 정도다.

"태호라는 애 어때요?"

"뭐가 어때? 사윗감으로?"

김 관장은 눈으로 맞다고 대답했다.

"우리 집이 평범한 집이라면 저런 사윗감을 어떻게 놓쳐?"

주 회장의 눈에는 살짝 아깝다는 눈빛이 흘렀다.

"그런데 우리가 평범한 집은 아니잖아. 벌써 서현이를 며느릿감으로 찍은 집안이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라. 벌써부터 차기나 차차기로 내정한 아들들 소개해 주겠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서 들려. 그중 몇 명은 알아주는 수재고. 나도 예술 하는 사위보다는 같이 사업하는 사위가 더 좋지 않겠어?"

김 관장은 정색하고 대답했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다른 재벌 집에 서현이를 보내요? 애 고생시키게. 데릴사위를 들여도 모자랄 판에."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그 친구는 아니야."

"너무 박하게 평가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애지중지하는 작가이기도 한대."

주 회장의 얼굴은 안타깝다는 감정이 더 크게 보였다.

"전혀. 난 그 친구를 높게 평가해. 내가 그 녀석이 그린 그림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당신 지금도 가끔 수장고에 내려가서 그 녀석 그림 보고 오는 걸 아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알지'라는 표정의 아내를 보고 주 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난 오늘 만나서 얘기 나눠본 것으로 충분히 그 녀석을 파악했어. 저 실력에. 저 외모에. 성격도 모나지 않은 것 같고. 임기응변도 괜찮고. 눈치도 있어. 아마 주위에 평생 여자가 끊이질 않을 거야. 서현이가 그사이에 끼어서 맘고생 할 게 뻔한데 뭐 하러 내 딸 고생시켜? 당신이 중심 잡고 서현이 단속해. 남자에 빠지면 걔 성격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오늘도 저 녀석에게 홀딱 빠져서 날 홀대하더구먼."

"그게 보여요?"

김 관장은 남편의 인물평에 공감을 하면서도 얼떨결에 물었다.

"나 주진만이야. 처음 보는 회사 직원들도 몇 분이면 감을 잡는데, 태어나서 쭉 봐온 딸 상태를 모르겠어? 딱 보면 알지.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 없었어요."

김 관장은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했다.

"여보."

주 회장에게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알아내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이럴 때는 빨리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나았다.

"서현이에게 아무 내색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그래? 둘이 키스라도 했어?"

"네."

순간 주 회장은 뭔가를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아내는 고개를 끄덕여 들은 내용이 틀림없는 사실임이 재확인시켰다.

"이 녀석이 감히 내 귀한 딸을? 그걸 내버려 뒀어?"

주 회장은 갑자기 머리에 피가 쏠린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둘이 좋아서 한 걸 그럼 어떻게 해요!"

"아니, 어디서? 어떻게? 그걸 당신은 어떻게 알고?"

주 회장은 충격에 횡설수설했다.

"아까 전시실에서요."

"그 녀석 전시실도 들어갔어?"

"내가 예전부터 보여주고 싶었던 그림들 보라고 허락했어요. 신기하게도 앵그르 작품을 바로 알아보고 먼저 관찰하는데, 역시 작품의 진가를 한눈에 알아보더라니까요."

태호에 대해 얘기하는 아내의 표정에서 마치 사랑에 빠진 수줍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자신에게도 오랫동안 보이지 않던 모습이다. 주 회장에게 태호는 딸의 첫 키스를 뺏은 도적놈에서 아내의 사랑마저 뺏은 파렴치한으로 변했다. 끓어오르는 분노와 질투를 삼키며 아내에게 물어봤다.

"둘 사이에 다른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겠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CCTV로 확인했어요. 키스 장면은 비디오는 지웠고요."

"당신이 그걸 왜 봤어?"

"그럼 다 큰 애들을 둘만 어떻게 남겨놔요.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그럼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았으면 될 거 아니야. 왜 애들을 그곳에 남겨둬서 사고를 치게 만들어!"

아내가 태연히 다 예측한 일이라는 얘기에 더 열이 끓어올랐다.

"키스 정도 가지고 무슨 사고라고. 당신 연애할 당시 얘기해 줘요? 처음 만난 날 어디로 데리고 갔는지? 무슨 말을 했는지? 난 서현이 같은 로맨스도 겪어 보지 못하고 이 집에 시집와서 이 모양으로 사는데. 딸아이라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서 즐겁게 살아야지."

주 회장은 눈물이라도 흘릴 듯한 아내를 보며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맸다.

여기서 아내가 삐지면 길게는 한 달까지 말을 안 했다. 그리고 그는 침묵의 한 달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주 회장은 중증 딸 바보에 끔찍한 애처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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