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3
현관에 들어서자 고운 인상의 중년의 여인이 서현을 반겼다. 서현은 춘천 이모라고 부르며 나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코코아와 쿠키 등을 내온다며 주방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좀 더 들어가자 거실이 나왔다. 거실은 의외로 작고 평범했다. 최고급 가구 등과 초대형 TV 등이 있었지만 최상류 부잣집에서 볼 수 있는 미술품들은 몇 개 없었다.
우리나라 최대의 프라이벗 컬렉션을 자랑하는 미술관을 가진 집안이다. 회사 비서실에서 집 화장실에 걸어 놓을 미술품까지 꼼꼼히 챙길 집인데 거실에 몇 점 없고 있는 작품들도 작고 소박했다. 좀 이상했다.
전에 읽어봤던 컬렉터의 기사가 떠올랐다.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 중 일부는 그림과 거리를 둔다는 내용이었다.
"혹시 집안에 전시실이 따로 있니?"
태호가 물어보자 서현은 물어볼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태호를 옆 건물로 안내했다.
"아빠가 미술품이 너무 많아서 집안에 와도 쉴 수가 없다고 아예 별도로 만들었어."
농구 코트만 한 별실은 순백의 최고급 비앙코 카라라 대리석이 깔려있어 만년설처럼 빛났다.
밝은 수준이 아닌 은은한 정도였는데 강한 빛이 미술품에 좋지 않다는 것을 고려한 듯했다. 강한 빛이 아니어도 빛에 오래 노출된 그림은 점진적이면서도 영구적인 손상을 받을 수 있다. 광퇴화라고도 부르는데, 페인트와 그림의 프레임이 빛을 흡수하며 발생한다.
실내 온도와 습도도 미술품 보존에 최적화되어 있었다. 웬만한 미술관보다 시설이 좋았다.
미술품들이 주인 잘 만난 강아지들 같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났다.
자신이 원하는 직업도 '부잣집에 강아지를 분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씁쓸했다.
벽에는 집주인의 안목을 보여주는 듯한 국내외 걸작들이 걸려 있었다.
국내 작가로는 박서근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아마 국내 서양화가로는 가장 잘 알려진 박서근은 미술 교과서에 단골처럼 나오는 대표 화가지만 정작 제대로 된 전시회도 몇 번 없었다.
수십 년 전 국내 컬렉터보다 한국에 있던 외교관과 미군들이 그의 그림을 많이 구매해 간 것이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작품을 모으는 것조차 힘들었다. 보험료가 비싼 건 덤이다.
특히 한국전쟁 이전의 작품은 정말 구하기 어려웠다. 아니,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남쪽으로 피난 올 때 대부분을 버리고 왔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작품은 자신이 아는 박서근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 얘기는 한국 전쟁 이전의 작품이라는 얘기다. 이걸 어디서 어떻게 구할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한국 작가들의 작품들이 저평가된 이유는 워낙에 위작이 많아서다. 새로운 그림을 발견해도 그 그림이 진품인지 확인하는 게 너무나 어려웠다.
이 집에 걸려있는 그림이라면 국내 최고의 전문가가 감정을 했을 테니 위작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은 2~30억, 아니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 작품은 돈이 있어도 구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태호를 더욱 놀라게 한 건 앵그르의 진품 그림 두 점이었다.
앵그르의 작품은 유럽의 미술관이라면 꼭 한 점 이상 가지고 있는 필수 아이템이다.
거래도 거의 없는데 무슨 재주로 이 그림들을 손에 넣었는지 궁금했다.
지금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는 피카소, 마네, 드가, 워홀 등의 작품들은 개인 컬렉터가 수백 점씩 가지고 있다가 한 점 두 점 시장에 푸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그림들은 미술사적 가치도 낮고 거래 가격도 낮다. 그저 허영심 강한 졸부들이 자랑할 거리 삼아 구매하는 작품들이다.
앵그르의 작품을 이런 작품들과 비교하면 절대로 안 된다. 앵그르의 작품들은 시장에 잘 나오지도 않을 뿐더러 나와도 초고가에 거래가 되었다.
피카소의 청색시대 때의 작품도 있었다. 1901년부터 1904년 사이의 작품들로 검푸른색이나 청록색 색조를 띤 게 특징이다.
태호가 피카소의 그림 중 제일 좋아하는 작품들이 이 시기의 것들이다.
앵그르의 작품도 그랬지만 피카소의 작품도 지금껏 본 적이 없는 그림이었다.
세금이나 제대로 내고 그림을 들여왔는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어야 할 작품이 집에 전시된 건 아닌지 궁금해졌다.
깨달음이 왔다. 이건 김 관장이 서현을 통해 태호에게 보이는 호의라는 것을.
이곳은 식구를 제외하면 집안에서 믿을만한 사람들에게만 보여주는 장소라는 것을.
집안 고용인들도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제한적일 것이다.
태호 자신이라도 그렇게 할 것 같았다.
*
부자 (The rich)에 대해서는 두 교수에게 배웠다. 장래 고객이 될 사람들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며 관련 서적들을 미국과 영국에 주문해서 읽었다.
부자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전통 부자와 신흥 부자. 전통 부자는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처럼 부와 이름을 상속받았다. 미국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케네디가나 록펠러가 같은 집안은 전통 부자에 견줄만하다. 그들은 부모로부터 돈과 이름뿐만 아니라 취향까지 상속받아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다.
반면에 신흥 부자는 자신의 두 손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우리가 아는 닷컴 회사의 소유자가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전통 부자들보다는 훨씬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다. 부자라는 각성도 별로 없어 집안일을 직접 하고 고용인이 있어도 그들과 한집에 머무르는 것을 부담스러워한다.
서현네 집은 역사 기준으로 보면 신흥 부자이지만 일제강점기와 전쟁으로 왕족과 귀족이라고 할 게 남아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귀족에 가깝다. 이미 삼대째 한국에서 알아주는 부잣집이니 이렇게 분류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집의 딸과의 교제라... 나쁘지 않다. 하지만 대단한 매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태호가 서현네 집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해봐야 경제적 지원 정도인데, 태호 집도 생활에 불편함이 없을 정도의 돈은 있다.
이 집처럼 집안의 모든 일이 고용인에 의해 굴러가게끔 할 수는 없지만, 생활에 불편함이 없이 사는데 필요한 집사나 비서는 충분히 고용할 수 있다.
태호는 자가용 비행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수천억짜리 요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권력. 이 집이 우리나라의 법조계 권력을 꽉 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지킬 게 많으니 권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자신에게 이러한 권력이 아직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아직은 말이다.
태호도 서현만큼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상상 혹은 망상에는 비용과 제한이 없다.
*
태호는 전시실에 걸려 있는 수준 높은 컬렉션들을 마음껏 구경했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습기와 이산화탄소가 유화를 파손시킬지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얼굴을 바싹 들이밀고 캔버스의 붓질 하나하나를 관찰했다.
진품에는 작가의 영혼을 담은 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이 태호를 끌어당긴다. 달을 끌어당기는 지구처럼, 전자를 끌어당기는 원자핵처럼 말이다.
*
전시실에서 작품을 하나하나 관람하는 사이, 김유미 이사장이 나타났다. 태호는 김 이사장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예상 범위 내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시간에 나타난 것은 뜻밖이었다.
"오랜만이에요. 태호 작가를 6학년 때 봤으니까 거의 4년 만에 다시 만나네요. 오늘은 미술관 관장이 아닌 서현이 엄마로 편하게 대해요. 나도 그럴 테니."
"알겠습니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녁은 먹고 가도록 해요. 내 춘천댁에게 솜씨 발휘 좀 하라고 부탁했으니. 조금 늦게 가도 괜찮지요?"
"네 괜찮습니다."
"그럼 나중에 식사 때 봐요."
김유미 관장은 끝까지 고1밖에 안 되는 태호에게 말을 놓지 않았다.
어리지만 에고 덩어리인 예술가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아직 어리고 부모에게 투정할 나이인 국민학교 6학년 때 일 년을 투자해 그림을 그린 예술가다. 독종이기도 했다.
끈기와 고집, 투쟁심, 반사회성, 신경과민 등등 예술가 가진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예술가가 가진 이런 특징을 나열한 사례는 굳이 논문을 뒤지지 않아도 책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성격이 지랄맞다는 건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했다. 그게 아니어도 국민학교 때부터 부모를 이기고 학교를 안 갔다는 사실 만으로 미루어 짐작하기 충분했다.
김 관장이 전시실을 떠나자 서현이 슬그머니 태호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학교에서는 할 수 없었던 적극적인 스킨십이었다.
팔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감촉과 아찔한 살냄새에 심장 박동이 귀에 들릴 듯이 쿵쾅거렸다.
오버 클락이 걸린 CPU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귀에서 이명도 들리는 듯했다.
"여기 있는 작품들에 대해 설명해 줄래?"
서현은 태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미 귀도 빨개진 상태다.
그 뒤로 둘은 별말 없이, 조금씩 움직여 더 어두운 곳으로 향했다.
전시실 안은 어디든 일정한 조도를 유지해 더 어두운 곳은 없지만, 서현은 슬금슬금 태호를 데리고 느낌상 더 어두운 구석으로 향했다.
서현은 더 바짝 태호에게 붙었고 태호는 수동적이었다.
태호의 머릿속은 폭죽이 한창 터지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 뇌가 없는 아메바 같았다.
서현은 더 대담해지기로 했다.
두 손으로 태호의 볼을 잡았다.
눈을 감고 볼을 끌어당겼다.
첫 키스는 풋사과 맛이 났다.
*
우격다짐 같았던, 짧지만 강렬한 키스가 끝났다.
서현은 도망치듯 전시실을 빠져나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태호는 입술에서 느껴지던 젤리 같던 입술을 음미했다.
몸이 버터처럼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갑자기 신혼여행지와 아기 이름이 생각났다.
*
한편 집의 보안실.
"제일 잘 나온 사진은 이 USB에 담으세요. 나머지는 영상은 모두 지워요. 오늘 본 것도 바로 잊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시겠어요?"
김 관장은 입으로는 경고를 날리면서도 한 손으로는 흰 봉투를 건넸다.
"알겠습니다, 사모님."
김 관장은 딸과 혹시 모를 예비 사위를 평생 골려 먹을 절대 반지를 손에 넣었다.
*
얼마 후, 식탁에는 김 관장과 태호와 서현이 앉았다.
김 관장은 첫 키스에 정신이 가출한 딸과 태호를 보고 혀를 찼다.
태호에게 할 제안이 있었는데 이 어린 두 녀석이 진도를 확 빼는 걸 보니 제안을 안 해도 될 듯했다.
사랑에 빠져 상기된 딸아이의 얼굴은 막 피어오른 꽃봉오리처럼 예뻤다.
딸아이가 제일 이쁜 이 순간을 담고 싶었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말이다.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그래서 일단은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림을 통해 가까워지기를 바랐지만, 속도위반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삶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결혼은 삶을 많이 겪고 너무 늦지만 않게 하는 것이 좋았다.
너무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르거나, 생에 단 한 이성만 바라보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엇나가는 일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많은 경우 그 엇나가는 순간을 제어하지 못하고 파국을 맞는다.
자신이 보기에 서현과 태호는 너무 어렸다. 적당한 제어가 필요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