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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2 (36/181)

///// 고등학교2

"엄마, 엄마, 엄마. 내가 우리 반에 정말 잘생긴 애 하나 있다고 했잖아. 태호라고. 그런데 걔가 그림을 정말 미친 듯이 잘 그려. 나 오늘 미술 시간에, 나 그림 그리는 것도 잊어버리고, 걔 그림 그리는 것만 멍하게 쳐다봤다. 내가 보기 시작한 후에, 걔 주변에 반 애들이 삥 둘러싸고, 태호 그림 그리는 것만 쳐다봤어. 선생님도 애들이 그림 안 그리고 태호만 쳐다보니까 혼내시려고 왔다가 그림 그리는 거 같이 쳐다봤다니까."

서현은 집에 오자 학교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깨알같이 엄마에게 설명했다.

김유정 관장은 미술관 일정 하나가 취소되어 일찍 퇴근했다.

덕분에 딸아이의 수다를 즐겁게 경청할 수 있었다.

둘째와도 열 살 차이가 나는 늦둥이 서현은 김 관장에게는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이었다.

딸의 얘기를 듣고 보니 문뜩 태호가 떠올랐다.

그 나이대에 그렇게나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흔하지 않았다.

얼마 전 태호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놀라운 소식이었지만, 바빠서 흘려들었는데 태호가 입학한 학교가 딸아이와 같은 학교 같았다.

살짝 화가 났다. 단순 사실이라도 자기 딸아이와 같은 학교에 다닌다면 중요한 소식인데 말이다.

"혹시 그 학생 이름이 권태호니?"

"엄마가 걔 이름을 어떻게 알아?"

서현은 깜짝 놀라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가 모르는 게 있는 줄 아니? 호호호"

"아, 뭔데. 엄마가 걜 어떻게 알아? 뭐야?"

김 관장은 딸아이를 더 골려 주려다가 눈에 스위치가 확 올라간 걸 보고 얼른 태호에 관해 설명해 주었다.

"그러니까 엄마가 걔가 13살에 그린 그림을 샀다는 거야? 얼마 주고 샀는데?"

"계약에 의해 밝힐 수 없게 되어 있어."

"내가 남도 아닌데? 알아도 되잖아. 엄마 딸 서현이 입 무거워."

"하아... 어디 가서 얘기하고 다니면 안 된다."

"절대. 절대 안 해."

서현은 손을 입술에 댄 후 지퍼 닫는 시늉을 했다. 눈은 이미 궁금증에 반짝였다.

"10억."

"엄마, 무슨 그림이 10억이나 해?"

서현은 부잣집 딸이지만 10억이 얼마나 큰 돈인지는 잘 알았다. 아빠가 그렇게 좋아하는 차도 10억을 넘는 게 드물었다.

"지금이야 10억이 비싼 가격처럼 보여도 태호가 성장하면 10억이 아니라 100억, 1,000억이 될 수도 있어."

"걔가 그렇게나 대단한 아티스트가 될까?"

서현은 엄마가 미술관 관장이지만 미술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태호가 그림을 잘 그리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성장한다면 충분히 가능해. 부족한 부분은 우리가 도와줄 수도 있고."

자신이 늘 고민하던 부분이었다. 어떻게 하면 태호가 훌륭히 성장하도록 도우면서 자신과의 인연도 계속해서 유지할까.

"무슨 말이야?"

"미술관이 태호를 후원한다는 얘기야. 필요한 명성 등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거지. 이미 우리는 10억이라는 돈을 들여서 태호에게 큰 경력을 선물했어. 일종의 투자지."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서현. 갑자기 태호의 그림이 보고 싶어졌다.

"혹시 그림 볼 수 있어?"

"미술관 수장고에 있으니까 다음에 가서 보렴."

"지금 보고 싶은데... 사진 같은 건 없어?"

"사진? 잠시만."

김 관장은 아빠를 닮아 참을성이 조금 부족한 서현을 배려해 비서에게 전화해서 그림의 축소 사본을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서현이 간식 먹고 씻고 머리를 말리는 사이 사진이 도착했다.

"서현아, 와서 그림 봐라."

위층에서 쪼르륵 내려온 서현은 그림을 보고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걸 걔가 그렸다고? 그것도 국민학생 때? 이게 가능해?"

"1년 넘게 작업해서 그린 그림으로 알고 있어. 태호는 국민학교 중학교를 안 다녔어."

"어? 그건 무슨 얘기야? 학교를 안 다니고 어떻게 이 학교에 입학해?"

"검정고시로 합격했어."

"우와, 대단한 애구나. 그래서 그랬나?"

혼잣말을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딸을 보며 김 관장은 슬며시 궁금해졌다.

예술가의 전설은 이런 사소한 이야기에서 탄생하는 법이다.

김 관장은 빨리 대답하라며 딸을 슬쩍 보챘다.

"태호가 학교 다니는 걸 못마땅해하더라고. 난 그냥 학교 다니는 게 싫어하는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엄마 말 들어보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 듯한데?"

"학교를 처음 다니니 답답할 수도 있을 거야."

"학교를 안 다니고 어떻게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는 어떻게 한거야?"

"한국에서 제일 전도유망한 미대 교수 두 사람에게 사사하고 있어."

김 관장은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 태호의 과거에 관해 설명했다.

서현의 눈동자가 몽롱하게 변했다.

위대한 아티스트와 그의 뮤즈.

서현의 상상은 뭉게뭉게 커지고 있었다.

태호에게 관심이 생긴 이후 이미 머릿속으로 예술 영화 두 편을 찍었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딸의 모습에 김 관장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딸의 고집, 승부욕, 거기에 수집욕까지. 이걸 알기에 약간 불안했다.

"나 걔 집에 데려와도 되지?"

"집에 데려오는 거야 괜찮은데. 그 친구가 불편하지 않을까?"

"뭐가 불편해?"

"내가 네 엄마라는 걸 태호가 알까? 와서 날 알아본다면 불편해할 수도 있지."

"태호가 엄마를 기억할까?"

"알지 않을까? 만난 적도 있고. 자신의 첫 후원자인데?"

"그런가? 내가 한번 물어볼까?"

"아니다. 됐다. 작품에 대한 거래는 태호보다는 두 교수와 태호 부모를 통해 이루어진 거니까 태호가 기억 못할 수도 있지. 한번 인사한 게 다니까. 생각해 보니 후원자로 만나는 거보다는 서현이 엄마로 친구 엄마로 만나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고 좋네. 데리고 오기 전에 엄마한테 알려줘. 이모들 잘 준비하라고 할게."

"알았어, 엄마. 고마워."

*

서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간절히 가지고 싶은 것이 생겼다.

가지고 싶은 것이 돈으로 구할 수가 없는 것이라면 공략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아빠처럼.

아빠도 원하는 회사를 뺏을 때는 꼼꼼히 계획을 세우신다.

우선은 정보 수집이 먼저다.

엄마의 비서를 통해 서점에서 책을 구했다. 예술가와 그의 뮤즈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영화도 몇 편 있지만 죄다 미성년자 관람 불가였다.

볼려고 맘 먹으면 못 볼 것도 없지만 자신은 바른 생활 소녀이기에 시도하지 않았다.

19금.

서현은 왜 이 영화들이 19금인지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해할 수 있었다.

'발정난 개 같다'라는 표현을 왜 사람에게 쓰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처음에는 어렵고 이해가 안 되어 남성의 성 기능 관련 책도 찾아봤다.

예술가 중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을 수록 발정난 개 같다는 소리를 들을 확률이 높아진다.

예술가 중에 특히 많았다.

서현은 자신의 남자가 발정난 개가 될 확률이 높다는 사실에 살짝 우울했다.

피카소며 클림트며... 왜 아내 혹은 여자친구가 그리 자주 바뀌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곧 의아해졌다.

태호는 자신 앞에서도 어떠한 이성에 대한 호기심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게이?

다빈치도 미켈란젤로도 게이였다는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진퇴양난이다.

발정난 개여도 문제지만 게이면 더 문제다.

아까 둘 사이에 태어날 아이 이름까지 지어놨는데 이러면 모두 나가리다.

책을 통해 학습한 내용은 바로 실생활에 적용했다.

학교 여시들의 접근은 바로 차단했다.

서현의 성격을 아는 여학생들은 감히 도전하지 않았다.

학생의 60~70%가 같은 중학교에 다니다가 이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서현은 이미 중학교 때부터 성격 나쁜 걸로 유명했다.

학교 여학생들은 저 여시가 얼른 태호와 차던 차이던 관계가 끝장이 나기를 원했다.

가능하면 서현이 차이는 게 속은 후련하겠지만, 나중에 태호에게 대시하는 사람에게 무슨 보복을 할지 모르니, 태호가 차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초단 기간에 사귀고 헤어지길 희망했다.

벚꽃이 피는 것처럼 사귀고, 벚꽃이 지는 것처럼 이별하라.

여학생들은 공책에다 서현의 얼굴을 그리고 이런 문구를 적어 놓은 후 칼로 긁으며 저주했다.

서현은 조심스럽게 태호의 주위를 맴돌았다.

자신의 여성다움을 한껏 드러낼 수 있는 몸매 보정 속옷을 챙겨 입었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렸다.

태호 주위에 페로몬을 뿌리고 다녔다.

우연을 가장한 스킨십. 밝고 건강한 미소를 보여주며 자신의 생식 능력을 어필했다.

최대한 건전하게.

일주일이 지나고, 여자의 감으로 알아본 태호는 게이가 아니었다. 고자는 더더욱 아니었다.

혈기 왕성한 10대 청년임이 분명했다. 무언가 억지로 본능을 억누르고 있었다.

이 정도의 인내심과 자제력이면 스님이나 사제가 되어도 대성할 것 같았다.

문제는 태호가 자신을 여동생으로 본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몇 주 전과 다르게 태호와 서현은 제법 친해졌기에 서현은 태호가 웃는 모습을 몇 번 볼 수 있었다.

태호가 짓는 웃음은 아빠 웃음이었다.

저 아빠 미소 대신 애인을 보는 간절한 눈빛으로 바꾸고 싶었다.

한 달여를 공을 들인 후에야, 서현은 태호를 자기 집으로 초대할 수 있었다.

집에서 뭘 할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날아갈 듯이 짜릿했다.

서현은 태호의 입술이 맛보고 싶어졌다.

*

서현이 태호를 집에 데려온 날, 김 관장은 일정을 조정해 그날 오후 스케줄을 비웠다.

딸아이가 잘생겼다고 극찬하는 얘기를 듣고 태호의 모습이 꽤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빠르게 크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모습만이 기억에 남은 관장은 성장한 태호의 모습이 궁금해졌다.

상견례 자리 같기도 했다. 딸아이에게 물들었는지 자신도 이게 웬 설레발인가 싶기도 했다.

딸로부터 태호와 집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괜히 자신도 기대감에 설레었다.

서현의 집에 도착한 태호는 대학교 입구만 한 넓은 정문과 구치소 같은 높다란 벽을 보고 놀랐다.

부잣집 딸인 줄은 알았지만 한남동에 이렇게 큰 집에 사는지는 예상 못 했다.

한남동에 길을 잘못 들어섰을 때 아빠가 개인 주택이 올림픽 경기장만 하다며 뭐가 이렇게 크냐며 감탄했던 집이 바로 이 집이었다.

정문을 들어서니 분재를 연상시키는 잘 정돈된 나무들과 기암괴석으로 장식된 정원이 나타났다. 아파트 한 동은 들어갈 수 있을 거 같았다.

마당 반대편에서 커다란 골든레트리버 두 마리가 전력 질주를 해와 서현을 덮쳤다.

서현의 얼굴을 침으로 범벅을 만들어 놓았다. 태호를 향해서도 꼬리를 흔들며 반가워했다. 잘 훈련된 개들 같았다.

서현이 볼살을 잡고 양옆으로 늘리자 인절미처럼 늘어났다. 곧 고용인 한 명이 나와 두 마리를 데리고 사라졌다.

집이 보였다. 프랭크 게리가 다자인 한 집의 외관은 거대한 은빛 선박을 연상시켰다. 한 척이 아닌 여러 척이었다.

우리나라에 프랭크 게리가 디자인 한 집은 한 곳뿐이니 서현이 어느 집 딸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다시 보니 서현의 얼굴에서 김 관장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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