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중2병 (34/181)

///// 중2병

14살 어느 즈음부터 태호는 10호 이하 (가로세로 1미터)의 비교적 작은 크기의 캔버스를 많이 구매해 작업실에 비치한 후, 유화를 그렸다.

저녁 식사 후 7시나 7시 반쯤 집에서 나간 태호는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는데, 손과 옷에 물감과 기름으로 범벅이었다.

문제는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집에는 하나도 들고 들어오지 않는 것이었다. 몇 개월 전만 해도 가로세로 1미터가 넘는 초상화 하나를 들고 와 자신들에게 보여주고 대구의 창고로 옮겼던 그림이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도 없다. 뭘 그리냐는 물음에도 이것저것 그린다고 대답할 뿐 정확히 뭘 하는지 태호는 설명을 안 했다.

"여보. 태호가 지금 사춘기에요?" 숙영이 물었다.

"그럴 나이가 되었지? 왜?" 영준이 물었다.

"매일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는데 뭘 그리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잠시 생각하던 영준.

"그럼 밤에 한번 같이 가 볼까?"

그날 밤, 부부는 11시쯤 태호의 작업실이 있는 상가 3층 맨 끝에 도착했다.

작업실은 외부에서 안이 보이지 않게 커튼이 처져 있는 상태긴 했으나 새어 나오는 불빛은 작업실이 매우 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라디오 소리도 들렸다.

부부는 밖에서 태호가 나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 그냥 작업실에 들어가기로 했다. 밖에 찬 바람이 불어 제법 쌀쌀했기 때문이다.

"태호야. 엄마야. 문 열어봐."

갑자기 급하게 뭘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오 분이 지나서야 태호는 빼꼼하게 문을 열고 고개만 쑥 빼고 말했다.

"왜 오셨어요?"

"오랜만에 아들 작업실 구경하려고 왔지." 숙영이 대답했다.

"지금은 정리가 안 되어서 보여드리기가 싫어요."

"정리 안 되어도 괜찮아. 엄마 아빠가 들어가서 정리해줄게."

"제가 정리해도 돼요. 들어오지 마세요."

"너 안에서 무슨 일을 하니?"

"아무 일 없어요."

"그런데 왜 작업실을 보여주지 않지?"

"제 프라이버시에요. 이를 존중받고 싶어요."

사생활을 존중받고 싶다는 아들의 말에 부부는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좋아. 네 사생활은 존중해. 하지만 우리는 부모로서 네가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반년 가까이 네가 작업실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상세하게 설명해 줘야 해. 특히 미성년자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했는지도 알아야겠다."

태호는 이 말을 듣고 눈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렸다.

"딱히 제가 잘못한 건 없어요. 다만 내일 저녁에 보여드리면 안 될까요?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좋아. 단, 네가 우리에게 솔직했으면 좋겠다. 아니면 아들에게 무척이나 실망할 것 같아."

다음 날 저녁, 태호의 작업실에 세 식구가 동행했다.

태호가 문을 열고, 부부가 작업실 안에 들어선 순간, 두 사람은 19세기 말 파리의 살롱에 들어온 것 같았다. 벽마다 19인치 컴퓨터 모니터만 한 캔버스에서부터 40인치 TV 크기의 그림들이 빼곡히 벽을 두르고 있었다. 그림은 죄다 덜 마른 특유의 물감 냄새가 났다.

태호는 지금까지 크기가 제법 되는 그림들을 그려왔다. 보는 순간 압도되는 듯한 그림만을 그려오던 아들이 이렇게 소품 같은 그림을 그리고 한곳에 모아 놓자 또 다른 묘미가 있었다.

군집한 그림들이 주는 감동은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 전이되었다. 어떤 컬렉터의 비밀 전시실에 몰래 들어온 듯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감동은 곧바로 파괴되었고, 한 사람은 얼굴은 엄숙 진지를 유지한 채 속으로만 열광했다.

지금까지의 태호의 그림과 결이 아주 달랐다. 파리의 살롱이나 비밀 전시실이 아니라 오스만 술탄 하렘의 애첩의 방에나 걸려 있을 법했다. 한결같이 미녀들이었고 살색이 많이 보였다.

영준은 숨죽이고 작품들을 감상했다. 아들의 표현에 대한 센스는 무릎을 탁하고 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 살색의 향연은 꿈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숙영은 머릿속에서 끊어질 듯 말 듯 한 이성의 끈을 힘겹게 붙잡고 있었다. 아들에게 해석을 요구했다.

"태호야. 이 그림들이 뭔지 설명 좀 해 줄래?" 이를 갈듯 물어봤다.

태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신고전주의의 거장 앵그르의 화풍의 영향이 깊게 베인 작품들로, 이건 오델 리스크, 이건 샘, 이건 비너스, 이건..."

얘기를 듣고 있던 영준은 깨달음을 얻은 듯, "누드는 앵그르"라고 말했다.

이 말이 낫이 되어 숙영의 이성의 끈을 잘라버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게 무슨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야? 또 왜 여기 나온 그림 속 인물들이 다 최진심, 심윤하, 채수라, 왕주현이야? 이게 누드야? 나체화지!"

"나체라니. 그냥 누드야. 이게 어딜 봐서 나체야? 엄마는 나체와 누드의 차이점을 몰라?"

순간 말문이 막힌 숙영은 아들과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지 순간 극도로 고민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아들의 올바른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그냥 지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힘겹게 진지한 척 그림을 보는 남편을 불렀다.

"당신도 듣고 판단해 봐. 나체화는 엄마가 생각하기에 관람자를 어떤 성적 충동을 일으키게 하고, 이에 따라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게 나체화나 외설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여기 있는 이 그림들은 현재 TV에 나오는 스타들이잖아. 거기에 넌 그 사람들의 나체를 그린 거고! 네 그림 솜씨면 사진보다 이게 더 자극적이야. 또 다른 문제는 여기 네 얼굴이 들어가 있는거야. 여기 이 그림은 안제리카를 구하는 로제이고. 안제리카는 금발을 했다 뿐이지 채수라 얼굴이고 여기 로제는 황금갑옷을 입었지만 결국은 네 얼굴이잖아! 또 이건 제우스와 테티스 그림 같은데, 왜 제우스 얼굴에 네 얼굴이 있니? 여기 테티스가 왜 왕주현이야? 여기 이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면 이건 소송을 걸 수도 있어. 너 이 나이에 소년원 가고 싶니? 호적에 빨간 줄 그어지고 싶어?"

"엄마. 이건 그냥 상징이야, 상징. 얘가 채수라라는 생각은 엄마의 착각이야. 채수라가 이 몸매가 나와? 걔가 그렇게 글래머러스 했어?"

태호 아빠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내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또 여기 보면, 머리카락 색깔도 금발이잖아. 또 음모가 없고 여성 생식기 부위 표현이 생략되어 있어. 마지막으로 이 그림이 음란해? 이게 어떤 성적 충동을 일으킬 만큼 야한 거야? 그냥 신화의 한 장면을 유럽인에서 동양인으로 바꾼 거야. 주제 의식은 비슷하지만, 빛의 표현이나 구도 등은 다 다르잖아. 아빠, 정말 여기 그림들이 음란해요? 막 성적 충동을 일으켜요?"

아들의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영준은 다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다가 가까스로 이성의 마지막 끈을 잡고 대답을 미뤘다. 마누라의 불꽃 튀는 눈빛이 순간 본능 속 감춰진 공포를 자극한 탓이다.

여기 이 그림들을 전부 안방에다가 걸고 싶다는 욕망이 대뇌변연계에서 강한 시그널을 대뇌피질에 쏘아 올렸지만, 그의 이성은 치열하게 그 시그널을 무시하고 이성적 판단을 내리는 데 집중했다.

문득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마광수 교수의 소설 '즐거운 사라'와 그에 따른 법정 다툼과 집행유예가 선고된 사건을 기억해 냈다. 마광수 교수의 소설은 성적 묘사의 수위는 높았으나 딱히 흥미롭거나 재밌지는 않았기에 사다 놓고 제대로 읽지도 않았던 그런 소설이었다. 하지만 이에 따라 이혼하고 직장을 잃게 만든 한국 사회의 폐쇄성이 생각난 영준은 갑자기 뒷머리가 쭈뼛 서버렸다.

"태호야. 한국은 말이다. 아직 이런 누드화에 대해 무척이나 보수적이야 그리고 폐쇄적이고. 특히 너의 나이까지 고려해서 이 그림을 판단할 게 분명해. 아빠는 너의 그림 실력으로는 이 정도의 그림은 대수롭지 않게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 정도로 성숙했다고 믿지만, 한국 사회는 그렇지 않아. 청소년기의 성적 호기심으로 그린 싸구려 그림으로 매도할 게 뻔해. 아마 너의 다른 그림까지 같이 평가 절하하겠지, 일탈한 천재 화가라면서. 그리고 우리 식구들을 공격할 거야. 아마 네 엄마와 대구 할머니는 이런 일로 크게 상처를 받으실 거야. 넌 할머니와 엄마 눈에 눈물 나게 하고 싶니?"

잠시 생각에 잠긴 태호를 보며 영준은 말을 이어갔다.

"넌 이 그림들을 어떻게 할 생각이니? 아빠는 이 그림들이 세상에 공개되면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거야. 너 그림을 팔 생각이니?"

"아니요. 계속 가지고 있을 건데요."

"세상에 공개하지 않고?"

"나만 보면 되죠. 굳이 이 작품들이 공개해 여러 문제가 발생시킬 필요는 없어요."

"그럼 그림은 어디에다가 둘 건데?"

"집에 두면 되죠."

"첫째, 이 집에 이 여러 그림을 걸게도 없고 걸 수도 없어. 이미 네 그림으로 다 찬 상태이고, 인테리어적으로도 안 맞아. 둘째, 한국에선 이건 외설이고 또 엄마가 매우 싫어할 거야. 셋째, 다른 사람들이 혹시나 보고 외부에 알릴 경우, 만약 여기 표현된 여배우들이 그림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경우 문제가 복잡해져. 너 여기 배우들에게 모델료 줬어? 아니지? 그럼 나중에 이 그림에 대한 권리를 요구할 경우 거절할 방법이 없어. 소송을 해도 질 거고 팔 수도 없어. 없애 달라고 요청하면 없애야 해. 차라리 이런 골치 아픈 일들이 안 생기게 여기 모델을 아예 바꿔버리는 것도 방법인데 그럴까? 그러자. 그게 훨씬 낫겠다."

"얼굴 좀 고치고 옷 좀 입히면 그럼 방에 걸어도 되나요?"

"아니. 이 그림들은 일반 가정집이 아닌 호텔 로비에나 어울려. 아니면 어디 궁전이나 미술관 같은 곳이나. 절대 개인 집에 놓을 만한 그림은 아니야."

"더 작게 그릴 걸 그랬나."

"뭐라고?"

"아니요. 그럼 할 수 없죠. 일단 다른 데 둬요."

"그럼 이 그림들은 다음에 대구에다가 보관할 거야. 그리고 6개월 정도 후에 바니시를 발라야 하지. 그리고 바니시를 바르기 전에 이 그림을 수정할 건지 결정해야 하고. 생각해 보니 너무 귀찮잖아. 태호야 그냥 너 이 그림들 다 고쳐. 그리고 나중에 바니쉬를 바르자."

"잠깐만요, 아빠. 생각 좀 해보고요."

이 그림들은 호르몬 반 팬심 반의 화학적 콜라보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었고 나름 매우 만족하던 그림 들었기에 고치기도 싫었다. 적당히 귀찮기도 했고.

만약 수틀리면 바니쉬를 바른 후라도 충분히 표 안 나게 고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고 작용했다. 찔러보고 안 되면 고치면 된다.

나중에 그림 판매를 핑계 삼아 얼굴이라도 보고 밥이라도 먹고 사인이라도 받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팔면 더 좋고, 후배 배우를 소개받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흑심도 작용하는 말이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이런 걸 윈윈이라고 한다. 순식간에 앞으로의 계획까지 쫙 짜버린 태호는 결론을 내렸다.

"일단 고치지 말고 보관하죠. 전 절대 이 작품들을 공개할 생각도 다른 사람들에게 판매할 생각도 없어요. 안 되면 그냥 버리면 되죠. 아니면 고치거나."

아들의 머릿속에서 드르륵드르륵 하드 디스크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지만 얼른 이 사건을 종결시키는 게 가정의 평화를 위해 좋겠다는 생각에 영준은 빠르게 클로징 멘트를 남겼다.

"그럼 이 그림들은 한 달 뒤 추석 때 대구 내려갈 때 가지고 내려간다. 이거 공부하는 데 방해돼. 엄마도 그걸 싫어할 거고."

유화는 한동안 그대로 작업실에 보관되다가 보관용 나무틀에 고정되고 흰 천으로 쌓인 채 대구에 있는 창고로 운반되었다.

그림은 손자의 그림을 광적으로 사랑하는 할아버지에게 공개되었고, 할아버지는 공장 사무실에 있는 시간 중 상당수를 유화 감상에 쓰게 만들었다.

얼마 뒤 근래 유난히 그림 구경에 빠진 남편을 의아하게 생각한 태호 할머니에게 곧 들키게 되어 추가 조치가 취해졌다.

설 즈음해서 다시 내려온 태호네 식구들은 바니쉬 작업을 위해 할아버지 창고로 각종 도구를 챙겨 갔다.

"아버지, 이 틀에 왜 못질이 되어 있어요?" 영준이 물었다.

"네 엄마가 못질하라고 난리를 피우더라. 쯧, 예술을 못 알아보는 말이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