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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4 (부제 사진작가) (28/181)

///// 패션쇼4 (부제 사진작가)

아직 한복 제작자를 구하지 못해 제작 작업은 시작할 수는 없었지만, 옷은 미리 만들 준비는 해야 하기에 치수를 먼저 쟀다. 치수는 의상과 대학원생이 쟀는데 윤 교수는 자신이 직접 재보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럼 빠르면 이 주 늦어도 삼 주 안에 연락드리겠습니다. 한복을 만드는데 그 정도 기간은 걸리네요." 윤 교수는 일련의 과정을 주도하며 연정아와 안면을 터보려고 애를 썼다.

그런 윤 교수를 모른 척하며 연정아는 곧장 태호에게 다가왔다.

"네가 태호니? 오늘 치수 잰 이유가 한복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던데. 내가 한복 입은 모습을 네가 그릴 거지?"

"그렇죠. 한복은 이런 식으로 만들 거예요."

태호는 가방에서 연정아에게 입힐 한복 일러스트를 꺼내 앞에 펼쳤다.

설명을 시작하기 전 태호는 물어봤다.

"저, 호칭을 뭐라고 해야 될까요? 연정아씨라고 하기엔 좀..."

"누나라고 불러."

"네 누나." 일 초도 안 되어 태호는 대답을 했다.

"이게 어떻게 된 옷이냐면요. 한복에 시스루를 접목한 건데..."

연정아는 설명을 듣기 위해 태호 옆에 바싹 붙었고, 태호는 정신을 아찔하게 만드는 살 내음을 만끽하며 한복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천천히 진행했다.

옆에서 그걸 보고 있는 윤 교수의 눈에는 뻘건 레이저가 나오고 피눈물도 흐르는 것 같았다.

*

주요 모델인 연정아에게 입힐 한복은 태호가 선택한 대표 한복이자 이번 패션쇼에 핵심 컨셉트가 담긴 한복이었다.

윗 저고리는 빨간색 시스루 천 한겹 만을 이용해 작업해 속이 투명히 비쳤다. 대신 손바닥 반 정도 크기의 꽃 패턴이 들어갔다. 그 밑으로 가슴 가리개가 있었는데 하얀 바탕에 화려한 꽃무늬가 들어간 천으로 구성되었다.

치마는 투명한 전 여러 겹으로 층을 만들었다. 각 층에는 다른 패턴을 넣었는데 첫 층에는 금빛으로 장식된 꽃 줄기 장식이 되어 있었고, 아래층에는 백합으로 그 아래층에도 다른 금빛 장식의 줄기로 되어 있어 살짝 떨어져 보면, 마치 한 폭의 흐트러지게 핀 꽃이 활짝 펼쳐진 것 같았다. 그 사이사이 꿀벌과 나비가 멋대로 윙윙거리며 춤을 추었고, 꽃들은 향기를 뽐내며 피어 있었다.

그렇게 겉의 다섯 개 정도의 층에 무늬를 넣고 그 안에는 엉덩이까지 가릴 만한 살색 천을 덧대었다. 모델이 입는다면 허벅지부터 발끝까지 시원스레 뻗은 다리가 다 드러나게 되고, 걸으면 그 다리 사이에 꽃과 나비가 보여 미녀가 꽃밭을 거니는 모습처럼 보일 것이다.

각각의 패턴이 들어간 층은 하나하나 따로 제작했다.

꽃 장식은 조화와 천으로 제작했고 꿀벌이나 나비는 천으로 제작해 천에 덧대었다.

전지숙이라는 한복 제작자를 섭외하고, 박선아라는 의상 디자인 학과 4학년 학생이 이번 패션쇼를 도와주기로 했다. 두 사람이 같이 작업을 했음에도 한복을 제작하는 데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 사이 태호는 연정아가 어떻게 화장을 해야 옷과 어울릴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한복 제작이 완료되면 바로 그림 제작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실제 화장이야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하겠지만 콘셉트는 태호가 잡아줘야 하기 때문이다. 화장에 대한 힌트는 숙영으로부터 얻었다.

"엄마, 내가 결혼한다면 며느리는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너 결혼할 생각은 있구나?"

"어? 몰라. 생각 안 해봤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엄마는 단아하게 생긴 여자가 좋더라."

"단아라는 단어가 잘 안 와닿는데?"

"단아라는 단어가... 국어 사전이 어디있더라? 어디 보자. 사전에는 '단정하고 아담하다'라고 적혀있네. 단정하다는 뜻은 정돈되고 똑바른 상태라는 뜻이고. 거기서 풍기는 느낌은 얌전하고 바른 느낌? 아담은 '고상하고 깨끗하다'라는 뜻이네. 옷으로 치면 정돈되고 바르고 그러면서도 품위가 있는 그런 느낌? 이런 얼굴을 한 연예인들도 있잖아."

"엄마가 생각하기엔 누군데?"

"전에는 박순애라고 인현왕후에 나왔던 탤런트 있어. 심연하도 그렇고."

"심연하는 아는데 박순애는 모르겠다. 엄마. 옷이 야한데 단아한 느낌을 줄 수 있어?"

"표정 하고 화장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표정은 이런 것 있잖아. 난 이런 야한 옷을 입고 싶지 않은데 직업상 입을 수밖에 없는 표정. 배덕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표정."

"배덕감이 뭐야?"

"있어 그런 게. 아무튼. 화장은 색조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고 좀 혈색 있는 피부색을 강조하고, 거기에 입술은 조금 진한 색을 어울릴 거야? 아니면 한복 때문에 촌스러워 보일 수도 있거든."

태호는 연정아 얼굴이 담긴 스케치북을 놓고, 숙영의 설명을 따라 색연필로 채색을 했다.

"피부는 깨끗하고 그러면서도 혈색이 돌아야 돼. 그래야 건강해 보여. 이러면 그냥 창백하기만 하잖아."

태호는 입술을 좀 더 진한 빨간색으로 칠했다.

"그래. 볼도 좀 더 혈색 있게 해야 될 거 같아. 그래 괜찮네."

태호는 이리저리 살펴봤는데 딱히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화장이었다.

"엄마, 정말 이 정도로 되는 거야?"

"엄마가 상견례 때 딱 이 정도로 화장하고 나갔어. 어른들에게는 이 정도가 제일 좋아."

"옷이 야해도?"

"어느 정도 야한데?

태호는 엄마에게 그림을 보여줬다.

"그렇게 야하지도 않네. 시원시원하니 보기 좋기만 하네."

"이 옷에 이 화장이 어울릴까?"

"머리만 더 단정하면 충분히 괜찮을 거야."

태호는 지우개로 머리 쪽을 지우고 다시 정리했다.

"이 정도면 딱이야. 엄마 옛날 모습 생각난다 아들. 엄마 처녀 때 별명이 평창동 며느리였잖니."

"그냥 엄마가 결혼 전에 평창동 살아서 그런 거 아니었어? 엄마. 근데 왜 아빠랑 결혼했어? 평창동 며느리가?"

"어... 그러게..."

*

한복 제작이 완료되자 촬영을 진행하기로 했다.

촬영은 이태원 경리단길 중간쯤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진행되었는데 윤 교수의 소개로 찾은 곳이었다.

스튜디오는 2층에 있었는데 그리 넓지 않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서 보면 바로 왼쪽에 위치해 있었다. 안은 여느 스튜디오처럼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가격을 짐작하기 어려운 각종 촬영 장비들이 비교적 각이 잘 맞게 정리되어 있었다.

스튜디오 입구의 오른 편에는 분주한 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발코니가 딸려 있었는데 날씨 좋은 초여름에 맥주를 들이켜기에 최고의 장소임이 분명해 보였다.

재밌는 건 이 스튜디오가 오늘 찾아올 사진작가의 작업실이 아니라 빌린 스튜디오라는 것이었다. 자기 스튜디오 없는 사진작가가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긴 하지만 외국에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는 작가고, 실력은 국내 최고 수준에 해외에서 더 알아준다는 소개에 믿고 일을 맡겼다.

약속 시간이 오전 10시였기에 다들 그 시간쯤에 모였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또한 윤 교수가 소개해 줬는데 이름은 정성아였다.

태호를 포함해 서로 인사를 하고 안면을 틀 때쯤 나이를 정확히 짐작하기 어려운, 온몸으로 '나는 예술 하는 사람이야'를 외치는, 한 남자가 들어왔다.

레게 머리를 하고 귀에 수많은 피어싱과 목과 손가락 등등 온몸에 있는 문신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특히나 목에 있는 문신은 빠삐용의 가슴 문신을 확대해 새겨놓은 듯한 큰 깃털 문신이었는데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 보이는 생동감이 넘치는 묘한 문신이었다.

최고급 문신이 있다면 이런 문신이겠구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손에는 레이카 (Leica) 카메라를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있었다.

왜 스튜디오를 들어오는데 손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오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아니어도 누가 봐도 기인이었다.

"양중만 선생님이세요?"

"네. 누구신지?"

"저 권태호라고 합니다."

"아, 예. 윤 교수님 얘기 듣고 왔어요."

"잘 찾아오셨어요. 저쪽에 메이크업 받고 있는 사람은 연정아라고 오늘 모델해 주실 분이에요. 그 옆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정상아 씨고. 이쪽은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신 박선아 누나고 이쪽은 전지숙 누나로 한복 전문가세요."

"네 반갑습니다. 오늘같이 작업할 양중만입니다. 좋은 작품 잘 만들어봐요."

이렇게 6명은 인사를 나누고 사진을 찍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정성아는 태호의 요구에 따라 연정아 얼굴에 물광을 내고 거기에 혈색을 더하고 입술에 강력한 터치를 줬다. 화장 후 너무나 반듯한 얼굴에 연정아 본인이 다 놀랄 지경이었다.

그 뒤 한복을 갈아입은 연정아의 얼굴은 니콜 키드먼 느낌도 났는데 마치 태호는 이게 엄마가 얘기하던 며느리 룩이라는 건가 하고 갸웃거리며 쳐다봤다.

그리고 시작된 촬영.

사진작가는 근접 촬영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와 렌즈를 계속해서 교환해 가며 사진을 찍었는데 정신없이 찍는다기보다는 한 장 한 장에 정성을 다하는 사진이었다.

그렇게 거의 한 시간을 다 찍고 나서야 밖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돌아왔다. 그리고 태호를 보더니 대뜸 물어봤다.

"태호 씨, 사진 몇 장 찍을까?"

태호는 두리번거리더니 되묻는다.

"저요?"

"어 태호 씨."

"절 왜요?"

"사진 잘 나올 거 같은데. 나 어디 가서 사진 못 찍는다는 소리는 안 들으니까 한번 찍어보는 게 어때요?"

태호는 대충 옷을 걸쳤지만 점점 그 외모가 빛을 발하는 나이였다. 키도 한 달에 1센티씩 자랐고 얼굴도 앳된 이목구비를 조금씩 벗어가고 있었다.

"태호 씨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이 청소년에서 어른으로 가는 다양한 특징들이 몸에 다 드러나는 시기에요. 지금을 놓치면 다시 보기 힘들어서 꼭 사진으로나마 간직하기를 추천해요."

아직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작업을 하면서 풍기는 아우라는 이미 탑 티어급으로 보였기에 이분이 공짜로 찍어주겠다고 하는 말에 솔깃하긴 했다. 옆에 연정아도 태호를 부추겼다.

"그래 태호야. 이 분이 딱 봐도 프로인데 한번 찍어봐 봐. 내가 너 잘생겼다고 예술만 하기엔 인물 아깝다고 몇 번이고 말했잖니."

"그럼 부탁드립니다." 태호는 마침내 승낙을 했다. 그러고는 작가의 다양한 요청에 맞춰서 사진을 찍었는데 짧게 끝날 줄 알았던 촬영은 거의 30분이나 진행이 되었다.

"태호 씨 고생했어요. 사진은 윤 교수에게 보낼게. 다음에 봐요."

"저 작가님." 태호는 장비를 챙겨 떠나려는 작가를 잡았다.

"혹시 연락처 알 수 있을까요?"

"윤 교수 통해 연락하면 되는데? 연락처는 왜?"

"나중에 촬영이 필요하면 작가님에게 연락하게요."

"아직 내 사진을 보지도 않았잖아요."

"그냥 느낌이 좋아서 그래요."

"알았어요. 내가 깜박하고 명함을 안 가져와서. 다음에 일 있으면 윤 교수 통해 연락해요. 다음에 봐요."

일주일 뒤에 받은 작가의 사진은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윤 교수님 사무실에서 받았는데 크기는 작았지만 정말 괜찮은 사진들만이 엄선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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