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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쇼2 (26/181)

///// 패션쇼2

며칠 후, 발해 대.

태호가 강 교수에게 한복 얘기를 꺼내자 전화 두통으로 전국기능경진대회 입상자 리스트를 바로 가지고 왔다.

"잘 아는 의상 디자인 학과 교수가 알려주더라. 김 교수도 연락을 했었고. 난 언젠가 네가 이쪽에 관심을 가질 거라고 생각해왔거든."

"정말요? 어떻게요?"

"너 지난번 탱화에서 본 그 옷들이 구조는 단순하지만 패턴 등은 정말 화려했어. 더 화려한 걸 추구할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있으면 제작해 보고 싶은 게 사람 심리니. 이왕 시작한 거 패션쇼까지 가는 건 어떠니?"

"그림으로 어떻게 패션쇼를 해요?" 태호는 깜짝 놀랐다.

상상조차 못했던 제안에 태호는 놀랐다.

"옷은 만들면 모델이 입고 런웨이를 돌지? 똑같이 그림도 런웨이 돌면 되지. 그림 무게도 얼마 나가지 않으니 남자 모델들이 들고 돌면 될 거야. 패션쇼를 하는 데 동의하니? 나와 김 교수는 네 의견을 존중할 거다."

"해보고 싶어요. 재밌을 거 같고요."

생각지도 못했지만 교수의 제안을 듣고 크게 반겼다.

"좋아. 만든 옷과 그림은 어떻게 할지 생각한 적 있니?"

"옷은 다 팔 거고, 그림은 몇 개 빼고는 팔겠죠?"

강 교수는 태호의 말에 약간의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판다는 결정을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먼저 판다고 하니 말이다.

"몇 벌이나 만들려고 생각했니? 콘셉트 그림 보여줘 봐."

태호는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 강 교수에 건네줬고 강 교수는 스케치북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림 한 장을 펼쳐 태호에게 보이며 말한다.

"이건 한복이니 속옷이니? 허, 이건 아예 상의가 없네? 프랑스에서 30년 전엔 가능한 거라도 한국에서는 지금도 안 되는 게 있어."

강 교수는 그림 몇 장을 더 골라 태호에게 건넸다.

"여기 이 그림들은 한국에서 패션쇼에 못 올려." 그러더니 스케치를 하나하나 세어본다.

"15장 정도 쓸 수 있네. 이것만 가지고 패션쇼는 못 할 거 같은데? 한 패션쇼를 하려면 옷 100벌은 있어야 돼."

"100벌이나요?"

"그래봐야 100벌 돌리는데 1시간 정도나 걸릴까? 30초마다 한 벌씩 보여준다고 계산해 봐. 20-30초마다 나오니까 60분도 안 걸릴 거야."

"교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전에 설치 예술 작품 놓고 패션쇼를 한 적이 있어서 알지. 옷도 그림도 팔 생각이 있다라... 패션쇼도 하고 전시회도 하고 그래야겠네. 너 그림 얼마나 더 걸릴 거 같아?"

"한 2주는 걸릴걸요?"

"생각보다 빠르네.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있는 그림을 베이스로 패턴 좀 바꿔서 넣어봐. 여기 있는 그림은 전부 괜찮아."

*

태호는 2주 뒤에 그림을 완성해왔고 그걸 강 교수에게 보여줬다. 강 교수는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어 윤 교수. 나야. 지난번에 얘기했던 그림 다 된 거 같아. 한번 들고 내려가 볼께. 알았어. 그때 시간 맞춰 갈께. 그래."

전화기를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의상디자인 학과 윤진환 교수. 네 그림보고 필요하면 교정해 줄거야."

둘은 얼마 후 시간을 맞춰 내려갔다.

"이쪽은 윤진환 교수."

"여기는 권태호. 14살. 무직. 이력은 전에 말해줬고 그림은 얘만큼 그리는 사람을 못 봤어."

"처음 뵙겠습니다. 권태호입니다."

"반가워요. 윤진환이에요. 이렇게 잘 생겼다고 말 안 했잖아."

얼굴은 태호를 보고 있지만 말은 강 교수에게 했다.

"그래? 난 자주 봐서 잘 모르겠던데. 원래 인물은 좋았어."

"무슨 탤런트인 줄 알았다. 태호 학생. 생각 있으면 담에 연락 줘요. 어디든 찔러봐 줄 수 있으니까."

윤 교수는 연예계 쪽에 발이 넓은지 장담을 했다.

"무직이라니까."

"뭐가 무직인데."

"없을 무에 직업 직"

"학생 아니야? 정말 무직? 학교 안 다닌다는 얘기?"

강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더 놀란다.

"정말? 우와. 정말 대단하네."

"빨리 그림 봐줘."

강 교수는 얘기가 딴 데로 새려고 하자 재촉했다.

"알았어. 어디 보자."

한참을 그림 한 장 한 장을 천천히 넘겨보던 윤 교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내가 가져도 될까 태호 학생?"

"무슨 말씀이신지."

"디자인은 눈에 하나도 안 들어오고 그림만 들어오는데? 일러스트 실력이 정말 대단해."

"네..."

"가져간다는 건 농담이고, 그 정도로 좋다는 얘기니까. 보통의 의상 디자인 일러스트는 아니라서 좀 낯선데, 난 이게 더 좋네. 훨씬 내추럴하잖아."

그리고 말없이 5분을 더 그림을 보던 윤 교수는 양해를 구하더니 밖에 나갔다가 10분이 더 지나서야 들어왔다.

"어디 갔다가 온 거야?"

"확대 복사했어. 도저히 아까워서 그림 위에다 직접 마킹 못하겠다."

그러더니 윤 교수는 그제서야 그림 하나 하나에다 열심히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옆에 서적이나 잡지까지 찾아보며 메모를 남겼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첫 장이 거의 메모로 도배가 되고 나서야 다시 태호에게 건넸다.

"한 장 되었으니까 태호 학생이 한번 읽어봐 봐."

태호는 받은 노트를 쭉 읽어봤다. 메모는 여러 가지였다. 한복에 들어갈 비단 종류부터 시스루를 표현하기 위해 적당한 옷감.

그리고 같은 디자인에 다른 컬러를 추천하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거기에 실은 어떻게 써야 되며 바느질 방법까지 온갖 디테일이 다 들어가 있었다.

태호가 곰곰이 상상해 보니 이렇게 만들면 과연 자기가 디자인한 옷이 맞긴 한 건지 의문이 들 정도 많은 다른 옵션들이 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온갖 소품들이 옵션처럼 들어 있었는데, 소품들은 태호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핸드백, 머리띠, 거기에 구두, 목걸이, 귀걸이까지 거의 풀 패키지다. 태호가 옷과 패턴을 고민한다고 바빠서 놓쳤던 부분인데 윤 교수는 열정적으로 그 부분을 파고 들어갔다.

"액세서리가 들어가니까 좀 분위기가 바뀌는 거 같은데요. 이러면 곤란한데..."

"뭐가 곤란하다는 거야?"

"액세서리가 옷의 분위기를 바꾸는 걸 원하지 않아요. 일단 다 보고 판단하죠."

가방에서 다른 스케치북을 꺼낸 태호는 첫 장을 기준으로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연필로 빠르게 스케치를 진행해갔다.

윤 교수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태호 뒤에서 태호가 하는 작업을 구경했다. 이미 한번 그려본 그림이긴 하지만 손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쭉쭉 그림을 그려나가는 것이 신기했다. 그렇게 10분 넘게 작업을 한 후 복사를 하겠다며 태호는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빨리 작업하는 게 가능한 거야?"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어?"

"나 소름 돋은 거 봤어? 저 정도면 복사기야."

"가로 세로 2미터나 되는 그림들을 일 년 넘게 그린 독종이기도 하지. 젤 외모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학교를 안 다닌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나 잘못 들은 줄 알았어."

"쟤 학교 안 다녀. 국민학교는 검정고시로 통과했고. 중학교도 자퇴했어."

"와. 학교 안 다니면 뭐 하는 거야?"

"나한테 배우고, 대한대 김창기 교수한테 배우고."

"아, 그 동양미술 쪽 교수 말하는 거지. 그쪽으로는 우리나라보다 일본하고 중국에서 더 알아준다고 하던데. 그래 너랑 그 양반한테 뭘 배우는데?"

"미술사, 철학, 역사, 현대미술, 시사 상식 이런 것들?"

"뭘 어떻게 가르친다는 건지 감을 못 잡겠군."

"주로 토론. 책이나 잡지 분량 읽어보게 해 놓고 책 내용에 대해 물어보고 답하고 이런 거."

"수업은 쫓아오고?"

"지금이 3년째인가? 대학 학부 과정은 이미 넘어섰지. 지금은 대학원 석사 과정 수준은 충분히 되고"

"수업료 같은 것도 받은 거야?"

"돈 벌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하지만 지난번에 저 녀석 그림 팔면서 수수료 명목으로 주더라."

"너 그래서 얼마 전에 차 바꾼 거야?"

"노코멘트."

"이야. 대단한데. 천재 제자가 알고 보니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던 거야?"

"저 녀석은 어차피 스스로 빛날 녀석이었어. 나와 김 교수를 만나 빛나는 시기가 조금 빨라진 것뿐이지. 나를 안 만났다더라도 다른 사람이 가르치고 있을 거야. 쟤 부모님도 충분히 그럴 재력이 되는 분들이고. 아님 미국에 갔을 수도 있지. 미국에는 저런 천재를 별도로 교육하는 기관이 따로 있다고 하던데. 외국인을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시민권을 줘서라도 미국에 주저 앉힐 나라니."

윤 교수도 지인 중에 그렇게 미국에 정착한 교수가 많았다.

"흠... 나도 저 천재 친구에게 숟가락을 얻어도 될까?"

"무슨 말이야?"

"시스루야 실제적으로 나온 지 오래된 콘셉트지만 그걸 저렇게 과감히 한복에 적용할지 몰랐어. 태호가 디자인 한 옷들은 사실 다른 드레스에 다양하게 적용이 가능하거든. 시스루만 하더라도 앞으로 2-3년 아니 그 뒤까지 계속 먹힐 수 있는 아이디어야. 한복에만 적용하고 말건 아니라는 거지."

윤 교수는 이번 패션쇼가 상당히 중요한 이정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태호에게 숟가락 얻겠다는 얘기는 똑같이 대한 대에서도 나왔다.

김창기 교수는 동향이며 학부 시절 선후배로 알던 사이인 허수현 교수에게 일러스트의 리뷰를 요청했다.

"교수님. 이게 그 태호라는 친구가 그린 일러스트에요? 뭘 해야 되나요. 별로 봐줄 게 없는데."

대한대 의류학과 허 교수도 태호의 일러스트를 본 후 딱히 지적할 만한 부분이 없었다.

다만 그림을 보니 직접 제작해 보고 싶은 마음만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물론 태호의 일러스트에 자신의 취향이 더해진 옷들을 말이다.

"발해 대에서 연락이 왔어. 그쪽은 이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태호와 함께 공동 패션쇼를 준비할 생각인가 봐. 윤진환 교수라고 의상 디자인과 교수가 있는데 그 사람이 의상 디자인 총괄할 거고. 무대는 강 재범 교수가 총괄할 거야. 지금 준비 중인 작품을 런웨이 근처에 설치할 생각인가 봐."

"강 재범 선배요? 우리 선배죠? 혹시 교수님도 참여하시나요?"

"나도 참여해. 수묵화 세 작품 정도가 담긴 한복을 제작하기로 했어."

"교수님 작품까지 들어가면 대단한 무대가 되겠네요. 이미 다 결정된 거 같은데 절 보여주신 이유가 뭔가요?"

"허 교수도 참석할 수 있어?"

"그래도 될까요?"

허 교수는 짧게 고민하고 대답했다.

"작품이 더 필요해. 지금처럼 가면 발해대 잔치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특이하게 강 교수와 얽힌 문제에 대해서는 자존심을 세우는 김 교수였다.

"네. 이런 콘셉트 보고 옷 만들어 볼 욕심이 안 난다면 이 바닥 떠야죠."

허 교수는 벌써 욕심이 생긴 듯 말했다.

"좋아. 그럼 허 교수도 참석하는 걸로 학장님에게 보고 올릴께."

"네. 대충 언제쯤 무대가 선다고 봐야 될까요?"

"아무래도 가을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저쪽이 그러던데, 업계 무대 다 끝나고 좀 한가해지면 하자고. 아니면 다른 부대 비용이 꽤 든대."

"그렇죠. 외국보다는 덜 해도. 그림은 놓고 가실 거죠?"

허 교수는 그림에 눈독을 들였다.

"아니. 허 교수가 필요하면 한 부 복사해서 보는 게 좋을 거 같아. 그 그림들 탐내는 사람들이 많거든."

허교수는 살짝 놀랐다. 이 그림들에 누가 벌써 침 발라 놨다는 생각에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림도 아마 나중에 자선 경매에 올라올 거야. 그때 사."

허 교수의 표정에서 진한 아쉬움을 읽은 김 교수는 구매 방법을 알려줬다.

"정말요?"

살짝 밝아진 표정의 허 교수.

"어. 다들 그거 액자에 넣어서 집이나 사무실에 걸어 놓고 싶어 하던데?"

"네! 그러면 딱일 거 같아요."

"하하. 그림은 비싸게 팔릴 거야. 걔 그림이 이미 비싸게 팔린 적이 있거든."

"그래요? 그렇게 유명해요?"

"그림은 유명한데 그걸 그린 사람이 태호라는 건 잘 모를 거야."

"그런가요?"

"하지만 그림을 본 사람들은 다들 갖고 싶어해. 허 교수처럼."

"맞아요. 정말 간단한 선과 그 위에 더해진 채색일 뿐인데 이 사무실 어디에 걸어도 어울리고 예쁠 거 같은 그림들이에요."

"나중에 낙찰 잘 받아. 돈 좀 깨질 거다. 나 간다."

김 교수는 태호의 올가미에 또 한 명이 엮였다고 생각하며 교수실 문을 열었다.

"안녕히 가세요 교수님."

학교 이름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에, 교수들은 행사와 그에 다른 예산에 대한 내부 승인을 받기 위해 첫 회의를 발해대에서 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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