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션쇼1
김창기 교수는 처음에는 미술과 연관된 진도만 나갔지만 태호가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게 좋지 않다는 판단하에 역사 서적도 읽게 했다.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대상을 이해하는 것 또한 필수였다. 거의 진학에 대해서는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 강 교수와는 다르게 김 교수는 태호의 진학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서 검정고시 준비 일정 등까지 물어보곤 했다.
"태호야. 넌 중학교를 갈 거니?"
"아니요. 별생각이 없어요."
"학교를 가기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니?"
"또래들을 만나기 싫어요. 이해도 안 되고. 걔들도 날 이해 못할 테고. 시험이나 성적이니 얽매여야 되고.
특히나 하루 종일 이미 알고 있거나 알고 싶지 않은 것들을 들으려고 앉아 있는 게 생각만으로 숨 막히고 끔찍해요. 교수님은 그런 걸 어떻게 버티셨어요?"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한 거지. 너처럼 고민하면서 한 게 아니야. 더군다나 나 때는 너같이 선택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었으니까."
"만약 선택해야 된다면 저처럼 선택하시겠어요?"
"지금 네가 하는 선택은 너니까 할 수 있는 거 같아. 넌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학벌이니 인맥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데, 그건 너 정도 되니까 가능한 거야. 재벌들도 학벌이니 인맥에서 못 벗어나."
"왜죠?"
"사람이 모이면 어디서든 파벌이라는 게 생겨. 뭐 대단한 게 아니라 그냥 좀 더 친하냐 아니냐 정도 일수 있지만.
그 파벌을 이루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같이 투쟁하지. 그게 자리던 돈이든 간에. 내가 보기엔 넌 그런 거에 초월해서 혼자서도 먹고 살 자신이 있어서 신경 안 쓰는 것으로 보이는 거고."
"아직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은 안 해봤어요. 국민학교나 중학교는 안 다녀도 괜찮을 거 같다고 판단이 들어서 안 다니겠다고 한 것 뿐이에요. 고등학교는 생각 안 해봤고요."
"고등학교 입학할 생각은 있고?"
"필요하다고 판단이 들면요."
"그래. 알았다. 자 이제 오늘 진도 나가보자. 르네상스부터 들어가야 되지?"
"네, 교수님."
얼마 후, 태호는 중학교도 국민학교와 비슷한 방법으로 자퇴했다.
*
김예랑은 강 교수의 수업을 듣게 된 것을 계기로 자신의 많은 것에 변화를 주기로 했다. 일단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였고, 학부 졸업 후 작품 활동에 매진하려던 것도 잠시 접고 먼저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맘먹었다.
취직을 준비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았지만, 자신은 일 년 앞으로 다가온 졸업 준비와 대학원 진학 준비, 그리고 강 교수의 수업 준비를 하다 보니 어떻게 시간이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여기에 혜린은 그 사건 이후 활동을 크게 자제하는 분위기여서 자신을 흡족하게 했다. 많이 성숙해진 듯 했다.
*
"이 손안에 있소이다!"
월요일과 화요일 밤, 태호네 식구들은 대하사극 황명회의 마지막 장면에 유덕화가 외치는 이 대사를 듣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몇 달을 그렇게 같이 사극을 보다 보니 태호는 한복이 매우 단조롭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엄마. 왜 저 사극에 나오는 사람들이 옷이 다 비슷해?"
"무슨 얘기니? 다 다른 비단옷을 입고 있잖아."
"여자들 입은 옷들이 너무나 단순해. 색도 그냥 한 두 가지 색깔이고 여러 가지 문양이 들어가긴 하는데 이렇게 보니까 다 그게 그거고. 또 죄다 금빛뿐이네?
엄마 저 한복에 자수를 안 놓았지? 왜 안 넣었지? 그리고 왜 몸매가 드러나는 게 하나도 없어?"
"아무래도 유교 문화권에서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지는 않았지. 색깔은 엄마도 모르겠다. 나름 색깔도 다양하고 이쁘지 않니?"
"다들 비슷해 보이는데?"
"엄마도 책을 찾아봐야 알 거 같은데? 저 시절 유럽 애들도 칙칙하고 단조로운 옷을 입었을 거야. 왜 영화 보면 게들 옷들도 단조롭잖아. 오히려 저 한복이 비단이라 더 가볍고 이쁠걸?"
"그럼 한복이 꾸준히 변화했어? 유럽에서 18세기부터 옷들이 매우 화려해지잖아."
"엄마가 알기로 조선 전기보다 후기로 갈수록 치마가 더 짧아지고 좀 더 타이트 해졌다 정도로만 알고 있어."
숙영은 자신이 한 대답이 맞는지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아들, 몇 시인데 이런 걸 이 시간에 물어봐. 지금 11시야 11시. 지금 자야지. 아니면 키 안 큰다! 성장 호르몬은 밤 10시에서 새벽 2시 사이에 나온단 말이야! 너 내일부터 황명회 보지 말고 일찍 자!"
*
18세기 유럽은 바로크라는 무거운 외투를 벗고 로코코라는 하늘거리는 레이스를 입은 시대였다. 귀족들이 고상한 도덕의 가면을 벗고 사랑과 쾌락을 좇는 경박한 시대이기도 했다.
이때의 조선은 영조의 치세 시기로 의복에도 변화가 생겨 저고리가 짧아졌고 품도 몸에 맞도록 개량되었다. 단 이 정도였다. 17세기부터 시작된 유교의 교조화 덕분인지 이 이상의 파격은 보이지 않았다.
" 왜 한복에는 이런 로코코 같은 양식이 없었지?"
화려한 귀족 문화가 꽃 피는 시기가 한 번쯤은 있을 만도 한데 조선시대에 없었다는 게 의아했다.
다음날부터 태호는 도서관을 뒤져가며 한복과 로코코 양식의 의복에 대한 자료를 찾아봤다. 만약 로코코의 화려함을 한복에 적용할 수 있다면 한국 의류 역사에 새로운 한 획을 그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가 드라마를 보며 한복을 그려보겠다고 생각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건 로코코 양식의 아이콘인 마담 퐁파두르의 다양한 초상화였다.
퐁파두르의 초상화들은 소매에는 주름 장식이 달려 있고 스커트 양쪽 옆을 주름으로 풍성하게 부풀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림들이 많았는데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모습이다.
화려한 색채와 그에 더해진 섬세함. 태호가 매우 좋아하는 장르다. 태호는 퐁파두르의 초상화에 담긴 드레스 중 화려한 꽃무늬가 있는 드레스에 시스루를 접목시킨 한복을 타이틀로 잡았다. 한복과 레이스의 조합은 태호가 밤마다 본 사극에는 없었다.
"엄마, 만약 한복 치마가 여러 개의 레이어로 되어 있고 각 레이어가 아주 얇아서 안쪽 치마가 비친다면 예쁘지 않을까? 난 엄마가 그런 한복을 입고 런웨이를 걸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한복이 있다면 입어보고 싶겠지. 기회가 된다면 런웨이를 걸어보는 것도 좋겠고. 그런데 네가 왜 한복 제작 얘기를 꺼내니? 한복 그림을 그려보려고?"
"상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제작해 보고 그걸 작품에 담는 게 난 더 좋은 걸."
태호는 예전에 백남준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해 주었던 조언을 기억해 냈다.
"패션은 순수 예술보다 파이가 크다.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Tier1 레벨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는 대형 셀럽과 동급이거나 그 이상이다."
그날부터 태호는 한복 일러스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
숙영은 태호가 그리는 한복 일러스트를 볼 때마다 새삼 감탄했다. 자신이 아는 패션 일러스트는 마치 일본 만화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팔다리가 젓가락처럼 길고 가는 목에 주먹만 한 머리를 한 모습이었는데, 태호의 일러스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케치 같았기 때문이다.
컨셉만을 표현한 보통의 일러스트와는 다르게 정말 모든 디테일이 다 들어 있었다. 일러스트 자체만으로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있어 보였다.
한복을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는데에는 적잖은 비용이 들겠지만 숙영은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
김 교수에게 한복 제작을 의뢰할 만한 한복 제작자를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물어봤다.
"갑자기 한복 제작자는 왜? 갑자기 패션 쪽을 찾으니까 의아해서. 무슨 생각으로 한복을 제작해 보려고 하는 거야?"
"TV로 황명회를 보는데 한복이 전부 천편일륜적이고 뭐랄까 따분해요. 좀 예쁘고 화려한 한복을 만들어 보고 싶어졌어요. 그리고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려고요. 전에 백남준 할아버지도 패션 쪽도 좋은 경험이라고 기회 되면 해보라고 하셨거든요."
"화려한 한복? 그림? 거기에 백남준 선생님이라... 하하. 너답다. 한복 제작자라... 괜찮은 한복 제작자는 사실 많아. 전국기능경기 대회라고 들어봤니?"
"아니요."
"한복 제작자는 거기 수상자 중에 찾아보면 될 거야. 네가 정확히 원하는 게 한복 제작자가 어떤 스타일이야?"
"제가 콘셉트를 그리면 그거에 맞춰 따라 옷을 제작해 줄 사람이오."
"어떤 콘셉트의 옷을 생각하고 있는데?"
"하나는 sheer 룩인데요. 이브 생로랑이 1968년에 디자인한 옷이 있더라고요. 한복은 속살이 비치면 안 되니까 여러 겹으로 층을 주려고요.
그리고 그 층에 패턴이나 장식을 따로 넣게 되면 정말 다양한 연출이 가능할 거예요. 둘째는 한복에 들어갈 천 자체를 문양을 다양하게 넣어 보려고요.
색깔도 다양하게 하고. 무엇보다 좀 예쁜 모델이 입었으면 좋겠네요. 그래야 그림이 좀 살죠."
"그럴 생각이면 의류학과 애들을 써 보는 게 어때? 네가 옷 콘셉트를 만든다고 해도 그걸 실제 구현하는 건 다른 전문가가 해야 돼."
"대학원생이 해도 될까요?"
"그 정도도 못하면 대학원생 간판 놔야지. 그리고 사진은? 너 설마 모델 세워놓고 그림 그릴 거 아니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너라면 사진 찍은 거 바탕으로 해도 되지 싶은데. 어때?"
"있으면 도움이 되겠어요."
"사진은 강 교수에게 물어봐 봐. 쓸만한 사람 찾을 수 있을 거야."
"네."
"다시 한복으로 돌아가서, 강 교수가 전국기능경진대회 입상자들 주소나 전화번호를 받아줄 수 있을 거야. 받은 자료에 아마 나이도 포함되어 있을 거고. 그럼 그중에서 좀 젊은 사람 중에 하나를 선택해."
"왜 젊은 사람인가요?"
"이쪽 경력 20-30년 된 사람들이 이제 막 중학생인 네 말을 듣겠니?"
"아, 그렇네요. 강 교수님에게 얘기해 볼께요."
"한복 디자이너가 괜찮은데 네가 중학생이라는 이유로 거절하면 나한테 알려줘. 방법을 찾아봐 주지."
"감사합니다. 교수님."
"그럼 오늘 진도 나가자."
*
"태호가 한복을 제작하고 그걸 그려보고 싶어하는데, 도와줄 수 있어?"
김 교수는 태호와의 수업이 끝나자 강 교수에게 태호가 한 얘기를 전했다.
"그 녀석은 한가할 틈을 안주네. 작년에 그림 가지고 우리 고생 많이 했잖아."
"그리고 아파트 한 채 값을 받았지."
"그래. 태호가 원하는 게 그게 다야?"
"백남준 선생님 얘기를 하더라. 선생님이 태호에게 패션 쪽 경험도 쌓아보라고 조언을 해준 적이 있는가 봐. 태호가 적극적이야."
"그럼 판을 좀 더 키우는 건 어때? 패션쇼까지 진행해 보는 걸로."
"나쁘지는 않은데 그게 가능할까?"
"가능할 거 같아. 태호 일러스트 보고 최대한 가능한 방향으로 확인해 볼게. 태호에게 먼저 패션쇼 하는 걸 찬성하는지 물어봐야겠군."
"그 녀석 일러스트를 보면 하고 싶어질 거야. 그림이 정말 괜찮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