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시5 (23/181)

///// 전시5

수업이 끝나자 예랑은 강 교수에게 다가갔다.

아차 싶어 뒤를 보니 혜린은 그저 떠날 준비만을 하고 있었다.

자신은 두눈에 불을 켜고 수업을 들은 반면, 혜린은 수업 시간 내내 집중을 하지 못했다.

예랑은 기대를 한껏 담은 눈으로 강 교수에게 물어봤다.

"저 교수님. 저 혹시 다음에 이 시간에 참석해도 될까요?"

강 교수는 예랑의 말에 세 사람을 쳐다봤다. 예랑은 눈이 초롱초롱해서 강 교수를 쳐다봤고, 혜린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거절의 의사를, 태호는 무표정이었다.

"두 사람 다 참석하는 건가요?"

그 말에 예랑은 급하게 혜린을 쳐다봤다.

"저는 참석 못할 것 같습니다. 너무 수준이 높아서 못 쫓아가겠어요."

혜린은 급히 거절 의사를 표했다. 강 교수는 모르겠지만 태호와 한 장소에 있는 게 가시방석에 앉 아있는 듯 했다.

강 교수는 태호에게 시선을 주고 물었다.

강 교수는 태호에게 물어보며 태호가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태호, 너는 어떠니?"

"한명 정도 참석하는 것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도 고집 센 태호와 단둘이서만 한 시간 넘게 따지듯 논쟁하기에 살짝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랑을 끼워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이 수업을 참석하겠다고 얘기한 학생이 예랑이 처음이다. 그 점을 높이 샀다. 자신은 아무도 이 수업에 대해 문을 닫은 적이 없지만 몇 년 동안 아무도 참석하겠다는 학생이 없었다.

"예랑 양. 우리가 지금 한 시간 넘게 한 얘기는 이 책 내용을 기본으로 하긴 하지만.. 사실 얘기를 하다 보면 그냥 두서없이 여기저기 점프해서 진행되는데 괜찮겠어?"

"노력해 볼게요. 꼭 참석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다음 주 이 시간에 참석하도록 해요."

강 교수는 예랑에게 다음 주까지 읽어와야 될 책과 분량을 알려줬고, 혜린은 그 어마어마한 분량에 깜짝 놀랐다.

"책을 이렇게나 많이 읽어요?"

"이번 주는 예랑 양 생각해서 좀 적게 낸 건데. 저 녀석은 일주일에 두 배 이상 읽어야 해."

"왜요?"

"이런 식으로 듣는 수업이 하나 더 있어. 대한대에서."

"아... 네..."

이 괴물 같은 자식은 이런 수업을 하나 더 듣는다니. 세상이 불공평한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잰 학교도 안 다니는 애니까 이렇게 읽을 시간이라도 있지. 예랑 양하고는 환경이 달라."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아, 그리고 다음에 만나면 그냥 예랑이라고 불러주세요. 교수님이시잖아요."

"그래. 다음부터는 그러지."

*

얼마 뒤 강 교수가 고대하던 곳에서 연락이 왔다.

조계사에서 중앙회관에 두 그림을 전시하고자 한다는 연락이 왔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일주일 뒤 한 달이 되면 바로 중앙회관에 그림을 옮기기로 하고 중앙 회관 어디에 전시할지 동선 등을 논의했다.

지금도 학생들로 버글거리는데 조계사 중앙 회관에서는 아마 더 많은 관람객이 올 거다.

그럴 경우 작품이 훼손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품의 이동을 논의할 때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터졌다.

해인사의 큰 스님이 입적하셨다.

*

강 교수나 김 교수는 태호가 성철 스님을 담으려고 그린 그림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다만 큰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은 태호가 다소 우울해하기에 이유를 물어보다가, 태호가 성철 큰 스님을 실제로 만난 적이 있고,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는 말을 했다.

두 사람은 태호가 어떤 그림을 그린 것인지 호기심이 동했다.

태호는 곧 큰 스님과 찍은 사진과 자신의 그림 사진을 가져왔는데, 그림은 지금 대구의 태호 할아버지의 창고에 보관 중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태호의 사진을 찍은 그림을 가지고 중앙 회관 사무실을 찾았고, 손쉽게 조계사 측의 전시 허락을 받았다.

태호는 할머니에게 전화를 해 전시를 위해 그림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했다.

업체를 통해 그림은 할아버지 창고에서 바로 서울 조계사로 이송됐다. 그렇게 태호의 작품 2점이 서울 종로에 전시되게 되었다.

*

태호의 그림은 한 달 정도의 전시 기간을 계획하고 전시를 시작했으나 전시 기간은 점점 더 늘어났다.

입소문을 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중앙 회관에 찾았고, 더불어 큰 스님 입적과 관련된 사회 현상에 편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추모 방송에 단골처럼 등장했고, 덕분에 탱화도 노출이 많이 되었다.

불교 신자들은 멀리서 서울까지 찾아와 구경을 하고 갔는데 종교화가 아니라는 이유로 조계사 측에서 절을 하는 것은 철저히 막았다.

하지만 합장을 하고 지나가는 보살들까지는 막지 못했기에 마치 성지 순례하듯 많은 신자들이 서울 종로로 향했다.

그렇게 그림들은 조계사의 보물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태호네는 감히 돌려달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조계사 분위기가 태호를 보면 머리를 깎이고 가사를 입혀 중을 만들 분위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총무원장이었던 현의 스님이었다.

해인사에서 다비식을 마치고 서울로 다시 올라온 스님은 중앙 회관을 중심으로 길게 이어진 줄을 보고 놀랐다.

그게 이번에 전시된 그림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직접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는 그림 앞에 섰을 때 다시 한번 크게 놀랐다. 탱화 상단 그림의 크게 그려진 부처님의 눈이 자신의 자아를 꿰뚫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아래의 유혹을 네가 어떻게 견뎌내는지 내가 지켜보겠다'라는 메시지로 읽혔다.

위 석가모니불 옆에 있는 나찰들은 마치 이 정도 유혹도 못 이기면 널 베겠다는 기운이 느껴질 정도로 살기등등했다.

그 찰나에 느껴지던 시험을 이겨낸 스님은 살짝 떨어져 이 그림의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다. 불화는 좀 알아도 다른 예술품에 박식한 건 아닌 스님이지만 그림에 대해 순수하게 감탄했다.

"선재로다. 이 그림을 그린 게 누구라고 했는가?" 옆에 비서실장 역할을 하는 혜민 스님이 대답했다.

"권태호로 대구의 성호 거사님의 손으로 지금 13살입니다."

"아, 그분의 손이라고? 근데 13살이라니?"

"큰 스님을 그린 것 같은 저 그림은 10살에 그린 그림이고, 이 탱화는 작년부터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허허. 마치 부처님이 내려주신 아이 같군. 마치 그 신라의 화가 있지 않은가? 황룡사에 그림을 그렸다는? 솔 뭐였는데"

"솔거 말씀입니까?"

"그래. 마치 전설에 나오는 화가 같구먼. 나중에 중요한 불사가 있다면 그 아이에게 맡기는 것도 방법이겠어"

"알겠습니다, 스님."

"이 그림은 언제까지 전시하게 되는 건가?"

"한 달을 기한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늘려야 될 거 같습니다. 점점 입소문이 퍼져 서울에서도 오는 관람객들이 늘어나고 있고, 대구 동화사에서도 전시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지. 최대한 길게 잡아서 전시하고 가능하면 영구 전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게. 그러고 보니 우리는 이런 작품을 전시할 공간도 마땅히 없어서 신자들을 길 밖에 내모는 구만. 쯧쯧. 이 문제도 다음에 안건으로 올리는 방법을 찾아보게나."

"네 스님."

*

태호의 그림에 홀딱 반한 사람은 불교계에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속 큐레이터인 김다영 학예사는 토요일 오후에 우연히 종로를 지나다가 사람들이 긴 줄을 서 있기에 알아보니 이게 그림을 관람하기 위해 길게 이어진 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더욱 놀라웠던 점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국민학교 학생이라는 사실이었다.

다영은 여기서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예로부터 종교와 예술은 한 뿌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종교가 예술을 혹은 예술이 종교를 서로 이끄는 관계이다.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에 있는 예술품을 관람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돈과 시간을 써가며 방문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게 한국에서 일어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잘 알려진 작품도 아닌 한 국민학생이 그린 그림으로 말이다.

어떤 그림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날 일정을 뒤로 미뤄버리고 2시간을 넘게 기다려 그림을 관람했고, 거대한 충격을 받았다.

종교적 색채를 강하게 띤 작품이긴 했지만, 종교화는 아니다.

요즘 입적 소식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성철 스님의 모습이 담긴 그림에서는 대놓고 고흐와 클림트의 콜라보 같은 작품이 그려져 있었다.

그 옆에 놓인 거대한 그림은 탱화를 모티브로 했음이 틀림없지만, 불화, 동양화와 서양화를 섞어 놓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탱화의 상단부는 탱화의 양식을 차용했지만, 연작의 하단부는 부처와 보살들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테크닉 전부에 동양화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하단 그림 중앙에 있는 관세음보살은 그 묘한 중성적인 느낌과 색기라고 해야 될지 아니면 퇴폐적인 섹시함이라고 해야 할지 표현하기 애매한, 마음을 조여오는 그 매력이 눈빛과 합쳐져서, 나중에는 위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관세음보살의 눈빛은 반짝이는 수많은 별들이 담긴 은하수처럼 회오리치며 빛났는데 마치 소설에 나오는 혼돈의 세계를 표현한 것인 듯했다.

눈빛까지 자세히 확인을 하고 나니, 관세음보살 뒤로 보이는 보살들이 마치 유혹에 넘어간 관세음보살의 노예들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도 이 유혹에 넘어간, 그림에 담긴 보살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갑자기 든 섬찟함에 서둘러 회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그림을 자세히 다 확인을 못 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영은 다음날 미술관으로 돌아가 이 그림의 전시를 추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태호의 그림에 깊은 관심을 보인 곳은 비단 이 두 곳뿐만이 아니었다. 전시 요청은 김 교수와 강 교수에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강 교수와 김 교수는 여기저기서 이어지는 태호 그림에 대한 전시 요청 전화를 무수히 받았다. 의도한 것이긴 하지만 너무 전화를 많이 받으니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제일 끌리는 전시는 당연히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요청이었지만 그림을 현재 들고 있는 조계종 쪽도 나쁘지는 않다.

작품을 알리고 더불어 태호의 이름을 알리기도 좋았기 때문이다. 다만 너무 종교화 쪽으로 치우치지 않을까 걱정은 되었지만, 태호가 앞으로 이쪽은 더 그릴 생각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

세 사람은 의견을 교환한 후 계획을 확정지을 생각이었다. 그림은 6개월 정도 전국 사찰을 돌며 전시를 한 후 국립현대미술관과 다른 주요 미술관 들을 순회공연하듯 돌아가면서 전시를 할 계획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판매하기로 했다. 최대한 비싼 값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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