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3
"교수의 강의처럼 들릴 수 있긴 하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종교화란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보통 종교시설에 설치되는 게 종교화죠.
저건 원작자가 절에서 겪은 자신의 상상을 주제로 만든 작품으로 종교적인 어떤 목적도 여성을 상품화하거나 희롱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순수 회화 작품으로 이해해 주시면 됩니다. 오히려 이런 의미로 해석도 가능하죠. 원작자는 저 그림을 통해 현재 불교의 부패와 타락을 지적하려고 만든 작품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르게 해석을 해 볼까요? 상단의 삼존불은 주위의 나찰들과 함께 아래에 위치한 저런 거짓되고 타락한 무리를 응징하려고 한다고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자 그럼 저 아래에 보이는 관세음보살이 정말 관세음보살일까요? 아니면 관세음보살을 가장한 지옥의 마귀일까요? 이런 다양한 해석을 바라고 이 작품의 전시를 추진한 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렇게 잘 그린 탱화를 본 적 있습니까?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작품 중이거나 아니면 여러분들이 아는 부처님을 주제로 삼는 작품 중에 저렇게 다양한 색으로 디테일을 완벽히 살린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까?
더 쉽게 얘기해 볼까요? 여기 있는 분들 중 저런 스타일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적 있습니까? 관세음보살 뒤에 있는 보살을 마치 명품 브랜드 모델처럼 그린 작품 본 적 있나요?
저 부처와 보살들을 표현하는 색과 질감이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 또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아십니까?
혹시 이 그림을 렘브란트의 야경이라는 작품과 완성도를 비교해서 생각해 본 사람이 있나요?
중앙 박물관에 있는 반가사유상들과 이 관세음 보살상과 비교해서 생각해 본 사람 있나요?
이 작품은 지금 나열한 것들을 곱씹을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는 사실들만으로도 매우 높은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잠시 숨을 돌린 교수는 말을 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그림은 천이 구해지는 대로 덮을 예정이니 앞의 학생들은 최소 하루 정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절대로 작품에 손상을 끼치는 일은 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은 원작자가 일 년을 넘게 공을 들여서 제작한 작품입니다.
자신의 의견이 존중받는 것만큼 작품 제작에 대한 노고도 존중받아야 합니다. 또 이건 부탁이자 경고입니다.
저 작품에 손상이 갈 경우 적지 않은 금액의 손해배상 청구가 들어갈 수 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쓸데없는 얘기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강 교수는 태호가 있는 쪽으로 가서 함께 작업실로 돌아가려고 했다. 커다란 흰 천을 사서 저 작품을 완전히 가리려고 하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김혜린이란 학생이 질문을 던졌다.
"교수님은 저 작품이 어떤 종교적인 목적도 여성을 상품화하거나 희롱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의도가 없다고 하셨는데, 원작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어 얘기하실 수 있지요?"
"제가 그런 생각 없이 그려서요." 태호는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구 팔공산에 있는 동화사나 염불암에 전화하셔서 작년 3월부터 6월까지 팔공산을 휘젓고 다니며 그림을 그린 학생 하나 본 적 있냐고 물어보시면 됩니다.
거기서 얻은 영감을 주제로 14개월 넘게 그린 그림이에요. 그림 그리는 건, 강 교수님이 처음부터 보셨기 때문에 제 작품인 거 잘 아십니다."
잠시 시위 중이던 학생들을 태호는 쑥 훑어보더니 말한다.
"이 작품 파손할 거 아니시죠? 이 어리고 불쌍한 꼬맹이가 일 년 반 넘게 고생하며 만든 작품이에요. 부탁드려요."
배꼽 인사를 하는 태호다. 이제는 많이 커서 옛날 같은 맛은 안 나지만 저기 누나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어필이 되기를 바라면서 한 인사였다.
"교수님, 가시죠. 천 사야 되잖아요."
*
강 교수는 뒤따라 오는 태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너 욱하는 성질 있구나?"
"짜증 나잖아요. 저걸 왜 페미니즘하고 연관시키는지 이해가 안 되네요. 너무 이쁘게 그려서 그런가?"
"저러다가 테트리스도 문란하다고 할 거 같은데?"
"그게 뭐가 문란해요?"
"너 아직 그런 상상력은 없구나? 애는 몰라도 돼."
"무슨 얘기 신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교수님. 저 그림이 렘브란트 그림이랑 견줄만한가요?"
"아니."
"그럼 아까 왜 렘브란트랑 그 불상 얘기는 꺼내신 거예요?"
"그래야 사람들이 더 관심을 갖지! 니가 렘브란트? 일 이십 년 후면 모를까 지금은 턱도 없어."
강 교수는 태호를 집에 데려다주고, 포목점을 들러 그림을 덮을 만한 가장 싼 천을 산 다음 바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서 사다리까지 직접 빌려 수위 아저씨들과 함께 가져온 천으로 그림을 덮어 버렸다.
*
이 조그만 해프닝은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천리안/하이텔 같은 온라인과 술집 같은 오프라인을 통해 학교의 다양한 커뮤니티에 쫙 퍼졌다.
그리고 다음날 더 많은 학생이 그림을 구경하기 위해 왔지만 그림은 이미 꽤 두꺼운 천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던 상태였다.
그러자 오히려 학생들 사이에서는 그림 관람을 방해하는 천을 치워버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와 학생회와 학교 교수회에까지 전달이 된 상태였다.
강 교수는 그 얘기를 듣고는 더 골치가 아파졌다. 생각 같아서는 바로 내려버리고 싶은데 저 큰 작품을 전시할 다음 장소가 아직 섭외가 안 되었다.
명동성당에도 문의를 해봤지만 불교 색채가 묻어나는 작품을 자신들이 먼저 건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김 교수 얘기로는 조계사에 문의는 했는데 아직 답변을 못 받은 상태라고 했다.
그리고 그 삼일 뒤 국내 일간지 사회/문화면에, 천으로 가려진 그림을 찍은 사진이 담긴 기사가 하나 올라왔다.
*
"발해대에 전시된 탱화는 왜 천으로 가려질 수밖에 없었나?"
전시 일보, 나전시 기자
발해 대 현대 미술관 1층 정문에는 폭 3미터 높이 2미터의 그림 두 점이 이 주전부터 전시되어 있었다.
두 점이 한 쌍인 작품으로 탱화의 양식을 빌린 현대미술 작품이며 섬세하게 그려진 관세음보살 상이 인상적인 작품이다.
전시를 시작한 이래로 재학생들의 큰 관심과 호응을 받아왔으며 전시되어 왔으나 현재 일부 재학생들의 반발에 천으로 그림을 가려 놓은 상태이다.
전시를 중단하고 철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재학생 김혜린 양 (21) 은 "지나치게 선정적이며 성을 상품화하고 여성을 성적 희롱의 대상을 삼은 그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시를 주도한 미술대학의 강재범 교수 (44)는 "그림의 해석에는 다양한 해석이 따를 수 있으며 김혜린 양의 주장도 가능한 해석 중 하나"라며, "일부의 학생들에게 불쾌감을 줬다면 철거할 수 있으며 다음 전시까지 그림을 가리겠다"라고 밝혔다.
강 교수는 이 작품을 렘브란트의 야경이나 국보인 반가사유상들과 비교하며 설명할 정도로 높게 평가하며, "관람을 하지 못한 학생들을 위해 다음 전시 장소를 빨리 찾을 예정"이라고 밝혔다.
"다음 전시에는 지금같이 공개된 장소가 아닌 제한된 장소에 전시할 예정이며, 사전에 경고 문구를 작성하여 지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작품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권태호 (13) 군은 '대구 동화사 염불암에서 얻은 영감으로 제작한 작품'이라며 "김혜린 양이 주장하는 의도는 전혀 없다"라고 말했다.
취재 결과 이 작품은 발해 대에 전시되기 전 대한 대에서도 한 달간 인기리에 전시되었던 작품으로 당시 제작자가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었다.
태호 군은 실제로 동화사에서 작품 제작을 했음이 밝혀졌다. 동화사 주지인 지주 스님은 인터뷰에서, "작년 3월부터 6월까지 석 달 이상의 기간 동안 염불암에 있는 마애여래불상에 매일 108배를 하는 등, 어리지만 신심이 대단했다"라며 "태호는 몇 달을 마애여래불상 앞에서 스케치를 해온 것이 맞다"라고 밝혔다.
이어, "서울에 갈 일이 생긴다면 꼭 그 작품을 보고 싶다며 이번 일이 잘 해결되기 바란다"라는 당부의 말도 전해왔다
학생들의 의견은 그림을 볼 자유를 달라는 쪽으로 크게 기운 형편이다. 재학생인 김재범 군 (22)은 "일부 여학생들이 주장하는 의견은 너무 페미니즘에 전도되었다"라고 주장하며, "미스코리아 대회의 비키니 심사 같은 진짜로 여성을 상품화하는 행사에는 별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엄한 예술 작품에 화풀이하는 격"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주위에 아직까지 이 그림을 못 본 학생들이 많다"라며, "학생들이 예술 작품을 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해 달라."라며 인터뷰를 마쳤다.
현재 작품 철거에 대한 의견은 총학생회와 교수회 등에 올라간 상태이며 이번 주 안에 최종 결정이 나올 예정이다.
*
"엄마, 이거 우리가 본 그 탱화에 대한 기사 맞지? 왜, 발해대에서 전시한다고 했잖아?"
수지는 한 일간지 신문에 난 기사를 들고 엄마와 할머니에게 갔다.
"이거 맞네 맞아. 그럼 태호가 우리가 이촌동에서 봤던 그 태호네?"
"매일 108배를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고? 이거 참말이가? 어린 아가 이런 신심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대단하데이." 할머니는 손녀의 도움으로 기사를 읽어보고 크게 놀랐다.
"내 어쩐지 절을 하고 싶더라니. 에잉, 왜 못하게 해가지고."
"수지야, 이 그림 다시 보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되니?"
"다음 전시회가 아직 안 잡혔다고 해요. 잡히면 같이 가요."
"그러자. 어미야, 아범에게도 말해 놔라."
"예, 어머니"
*
기사가 나가고 난 후 학교 측에 작품을 다시 전시하라는 압박은 더 높아져 갔다.
강 교수는 전시 재개를 하지 않았는데, 학생들과 한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또한, 조금이라도 그림이 상한다면 그 죄책감을 감당할 자신도 없었다.
그림이 계속해서 천으로 가려져 있자 강 교수에게 전시 재개 일자를 물어보는 전화도 늘었다.
*
"미대 강재범 교숩니까?" 살짝 나이 든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네, 그렇습니다. 누구시죠?"
"학교 총장입니다."
"네? 네! 총장님. 어쩐 일로 저에게 전화를 주셨나요?" 강 교수는 재작년에 부임한 총장의 목소리를 기억해 냈다.
"그 그림 전시 문제가 내 귀에까지 들려오고 있습니다. 그 전시 재개가 어렵습니까?"
"네. 학생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되어서요."
"강 교수, 왜 이렇게 융통성이 없어요. 학생들에게 연락해서 전시 허락받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둘 중 하나를 하세요. 그림을 전시를 하던지,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게 치우던지요. 아셨죠?"
"네, 총장님. 학생들 의견을 다시 물어보고 재개 여부를 결정하겠습니다. 심려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작품을 학교 내에 전시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에 가서 봤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재 전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강재범 교수는 미술학과와 철학과를 뒤져 김혜린 학생을 찾을 수 있었고, 다음날에 겨우 전화 통화가 가능하게 되었다.
"김혜린 학생. 왜 연락했는지는 아시죠?
"네, 교수님. 학교 내에서 미친년으로 찍혀 조리돌림 당하게 만든 그 그림 때문이겠죠." 혜린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