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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공산 동화사1 (16/181)

///// 팔공산 동화사1

태호의 대구 할머니는 연중 행사로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대구 팔공산에 위치한 동화사에 갔다.

동화사는 조계종 제9교구 본사로 매우 큰 절이기에 찾는 사람들도 많았고 또 길도 잘 정비되어 있기에 다니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며느리는 물론 태호까지 늘 데리고 이 절을 찾았다.

이제는 키도 훌쩍 큰 태호를 데리고 절을 찾는 건 태호 할머니의 큰 낙 중 하나로, 늘 당신이 조금이라도 더 기운이 있을 때 다녀야 된다며, 며느리와 손자를 데리고 동화사부터 근처 암자까지 다 돌아다녔다.

태호 할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이 절을 다녔는데 태호 할머니 역시 당신의 할머니 손에 이끌려 이 절을 다니셨다고 한다.

태호가 어렸을 적 자폐아 징후가 보인다는 말에 제발 손자를 낫게 해달라고 빌기 위해 더욱 절에 자주 왔고, 태호가 낫고 나서도 마찬가지로 낫게 해서 감사하다며 더 열심히 다니셨다.

워낙에 집안 대대로 절에 다녔고 오랫동안 열심히 시주를 한 탓에 동화사 보살들 중에 태호네 할머니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탓에 태호가 동화사에 오면 절 공양간에서 일을 도와주는 보살부터 주지스님까지 다 한 번씩 와서 '니가 그 태호구나'라든지, '벌써 이렇게 컸어요?'라며 알은체를 하고 갔다.

동화사는 그 오래된 역사에 걸맞은 다양한 유물을 보유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이나 비로암 삼층석탑과 당간 지주 등이 있다.

김창기 교수의 말에 따르면 보물로 지정된 그런 작품들보다는 대웅전이나 극락구품도 가 더 볼만하다며 그 둘을 잘 보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갔다 와서 느낀 점에 대해 얘기해 보자고 해 태호는 그야말로 숙제를 하는 마음으로 이번에 동화사에 왔다.

몇 번을 동화사에 왔었지만 대웅전에 대한 별 특별한 감정이 없었던 태호는 이번에도 역시나 뭐가 특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재빠르게 대웅전은 포기하고 극락구품도를 찾아보려고 지나가는 스님에게 물어봤더니 극락구품도는 저 산 위에 동화사 암자인 염불암에 가야 볼 수 있다고 한다.

태호 혼자 보낼 수 없었던 세 사람은 결국 끙끙 거리며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올라가 염불암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염불암은 꽤 작은 암자지만 동화사에 있는 보물 중 상당수는 이 암자에 몰려 있다.

아기자기하면서도 오랜 세월을 견뎌낸 세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암자다.

정면에 보이는 극락전 앞으로 보물로 지정된 염불암 청석탑이 있고 극락전에서 우측 뒤편에는 삼각뿔 모양의 바위가 있다.

그 한쪽에 새겨진 부처 상이 마애여래좌상이고 그 바위 옆 면에 새겨진 부처 상이 보살 좌상이다.

마애여래좌상이란 바위면에 조성한 앉아있는 여래불상을 말한다.

태호는 극락전에 있을 극락구품도 구경은 뒤로하고 바로 이 마애여래좌상 앞에 섰다.

이 좌상은 연꽃이 새겨진 화려한 대좌에 앉아 있었으며 얼굴은 살짝 각지고 입가에는 약간의 웃음을 띠고 있었다.

두 손에는 선정인의 수인을 맺고 있었는데 그 손 사이에는 꽃줄기를 잡고 있었다. 태호의 두 눈을 확 사로잡은 건 역시나 선이다.

마애여래좌상은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선으로 윤곽을 나타내는데, 태호는 마치 누가 바위에다가 손가락을 콕 찍어서 단숨에 이 선들을 다 그려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힘차게 뻗은 선들을 정으로 쪼아서 표현하기는 힘들었을 거라 생각했다.

한참을 그렇게 어떻게 이 마애여래좌상을 만들었을까 상상을 하다 정신을 차리고 극락전의 극락구품도를 보기 위해 들어갔다.

극락구품도는 염불암 극락전 영단 (부처님 상 뒤)에 있던 불화로, 관무량수경이라고 하는 극락을 묘사하는 경을 비단에 그린 그림이다.

그림의 중심은 극락으로 중생을 이끄는 부처인 아미타불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무아미타불이라 말하는 그 아미타불이 있고, 부처님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일원상(一圓相)이 다소 강조된 게 특징이다.

기초 불교 지식조차 없는 태호에게는 상단부에 세 부처가 있고 중간 부분은 하얀 바탕에 식물들이 자라나 있는데, 이게 연못과 연꽃을 상징할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으로 연꽃은 연못에서 보통 자라니까. 하단부에는 좌우로 일련의 사람들이 뭔가를 듣고 있는 듯한 구도와 얼굴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태호는 좁은 공간에 '정말 많은 인물을 다닥다닥 붙여 놓았구나'라는 감상을 제외하면 별로 와닿는 게 없었다.

그래서 곧 극락전을 나와서 자신에게는 훨씬 흥미로운 마애여래좌상으로 앞으로 갔다.

그때 갑자기 바위의 누군가가 태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곧 태호에게 말을 건 사람은 마애여래좌상의 부처가 아닌 바위 안에 다른 부처라는 걸 깨달았다.

*

그 부처는 바위에 앉아 오른발은 아래로 내리고, 오른팔은 쭉 뻗은 채로 오른쪽 무릎에 앉혀 있는 유희좌라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머리에는 보석으로 장식된 관을 썼는데 극락전에서 봤던 부처와는 다르게 보관은 그리 크지 않고 소박해, 흡사 모자를 살짝 덮어쓴 모습이었다.

옷으로는 붉은색과 청색 그리고 황금색이 두루 섞인 대의를 양 어깨를 반달 모양으로 걸쳤고 곧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복부와 하반신을 바지처럼 감쌌다.

옷 주름은 복잡하지만 부드러웠는데 다른 부처상에서 볼 수 없는 마치 진짜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볼륨감이 느껴졌다.

구슬을 꿰어 몸에 다는 장신구를 영락이라고 하는데 이 부처는 여러 가지의 다양한 색깔의 보석들이 금빛 은빛 줄에 엮여 손목, 발, 팔뚝, 목 등에 장엄하게 걸쳐져 있었다.

너무나도 반짝거려 마치 흑인 랩 가수나 셀럽의 장신구를 연상시킬 정도였다.

오른손 손가락은 부드럽게 활짝 펼쳐져 있었는데 어느 미인의 손가락인 양 너무나도 고왔고, 아래로 내린 오른쪽 발과 들어올린 왼쪽 다리에서 보이는 양발은 아담하면서도 통통해 흡사 여인의 발처럼 보였다.

거의 8.5등신에 가까울 정도로 작은 머리에 귀와 귓불은 옆에서 보면 부처의 그것처럼 과장되어 있지만 앞에서 보면 보일 듯 말 듯 표시가 안 났고, 그러면서도 앙증맞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전체적으로 몸의 선이 매우 곱지만 상체는 근육이 어느 정도 발달되어 있어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갸름한 얼굴은 고요하고 편안했지만 가늘고 긴 반개한 눈은 정확히 태호를 응시하고 있었고 눈매는 약간의 개구쟁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있었다.

눈동자는 황금빛을 포함한 마치 여러 가지 보석이 섞인 듯이 반짝였다.

마치 흑요석에 황금과 사파이어, 루비 등의 보석을 액체처럼 가열한 후 주걱으로 둥글게 두어 번 섞으면 나올 듯한 눈동자였다.

그리고 따뜻할 것 같은 볼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면 크지 않은 입과 관능적인 붉은 입술이 자리해 있는데 입술을 벌리면 하얗고 고른 치아가 보일 것 같았다.

그 부처의 등 뒤 위쪽에는 거대한 크기의 좌상을 한 부처가 앞을 내려다보듯 위치해 있었고, 그 앞과 양옆으로 수없이 많은 다른 부처나 보살들이 머리에 광배를 한 채, 손에는 무기나 부채 심지어 뱀이나 용 등을 들거나 몸에 걸치고 앞에 앉아 있는 부처를 에워싸듯 병풍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마치 각 잡힌 군인처럼 위압감이 있었는데 앞에 앉아 있는 부처가 명령을 내리면 태호를 순식간에 토막을 낼 수 있을 정도로 기세 등등하고 살벌했다.

반면 부처의 좌우에는 손으로 수인을 하거나, 꽃과 호로병, 보리수를 든 보살들이 있었는데 머리와 목 등 몸 곳곳에 화려한 장신구들을 해 마치 까르띠에나 티파니 또는 미키모토 모델들을 보는 듯했다.

눈 웃음치고 살짝 흘기는 듯한 눈 웃음은 묘한 색기까지 감돌았다. 보살들이 입은 대의는 앞의 부처와는 다르게 가슴을 완전히 가리고 흘러 내려가 다리를 부드럽게 감싸, 드러난 맨살은 거의 없었지만 봉긋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강조한 듯한 옷차림은 어린 태호가 보기에도 상당히 선정적이었다.

"태호야? 왜 여기서 졸고 있어?"

영숙은 마애여래좌상 앞에 앉아서 꾸벅 졸고 있는 태호를 흔들어 깨웠다.

"네! 네? 어... 엄마?"

태호는 한참을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러다 그게 꿈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듯 옆에 마애여래좌상을 바라보고 또 엄마를 바라봤다.

"꿈꿨니?"

"어? 어... 그러게. 그게 꿈이었네."

"좀 있으면 해 떨어지겠다. 내려가자."

"잠깐만. 엄마, 펜이나 종이 가진 거 없어?"

"없는데? 왜? 필요해?"

"꿈을 꾼 거 같은데 잊어버리기 전에 좀 그려 놓고 싶어서."

"그래? 저 밑에 극락전 앞에 사무실처럼 있던데 가서 좀 얻어보자."

엄마는 A4 정도 되는 크기의 노트와 펜을 얻어왔다.

태호는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기에 노트에 펜으로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꿈이었다고는 하나 머릿속이 뿌연 듯 생각나는 것이 많이 없었다. 먼가 희미하고 부정확했으며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그 혼돈을 상징하는 눈은 기억이 나고, 머리 위에 있던 좌 불의 황금빛 눈동자도 기억이 나는데 그뿐이었다. 그냥 큰 특징들만 기억이 날뿐 세부 사항들은 금세 머리에서 지우개로 지워진 듯 사라졌다.

태호가 3D로는 기억을 잘 못해도 2D는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걸 비추어보면 뭔가가 마치 기억을 막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결국 태호는 생각나는 몇 개 장면과 전체적인 느낌만 그림이 아닌 이미지에 대한 묘사만 생각나는 대로 적을 수밖에 없었고 불과 앞뒤 한 장도 다 채우지 못했다.

2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마치 장면 10개 정도 기억한 느낌밖에 없었다.

"엄마. 내가 잠깐 졸았잖아. 그 짧은 순간에 부처를 봤어."

태호는 자신이 본 부처의 모습을 설명해 줬고, 곧 할머니에게까지 자신이 본 장면을 설명해 줬다.

"태호야. 아무리 봐도 네가 관세음보살님을 뵌 거 같다. 아이고. 이를 어쩌나. 신통방통 하네."

태호 할머니는 손자가 꾼 꿈에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리고 그 꿈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골몰했다.

"내가 지금까지 들어본 꿈 중에 제일 좋다. 이건 왕후 장상 다 따 놓은 기라."

태호가 무슨 용꿈에 돼지꿈이라도 콤비로 꾼 듯 입단속을 시키더니 내려가서 복권을 사자고 하신다.

"할머니. 이건 그런 재물운 같은 꿈은 아니고요. 음... 뭐랄까, 이런 느낌을 받았어요. 자기를 그려달라고 나를 부른 느낌?"

그러자 할머니는 더 좋아하시면서 그럼 퍼뜩 그려보라고 다그치신다.

"근데 할머니. 여기 다시 와봐야겠어요. 스케치할 도구들 챙겨서 이번 한 번으로는 안 될 거 같아요. 기억이 나려다 말다 그래요."

할머니는 흔쾌히 다시 오자고 하시면서 암자 사무실에 내려가 거기 일하고 있는 스님에게 인사를 했다.

"스님, 제가 동화사에 평생을 다닌 박정숙입니다. 여기 주지 스님 행자 생활 마치시고 막 스님 되셨을 때부터 제가 찾아뵙고 인사한 사이이지예."

"예 보살님 안녕하세요. 저도 몇 번 뵌 거 같네예. 안녕하시지예?"

"예 스님. 시주 좀 할라 하는데 어디다 하면 되는교? 염불암은 오랜만에 왔더니만 이제 다 잊아뿐네예."

"지금 앞 건물 기와 교체하거든 예. 그거 좀 도와주시면 됩니더."

"알겠습니다, 스님."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십만 원짜리 자기앞 수표를 꺼내 봉투에 넣어 시주함에 넣고 이름과 소원 등을 적었다.

"스님, 저기 앉아있는 저 아가 제 손자인데 예. 그림을 좀 잘 그리예. 근데 자가 저 여래 좌상을 좀 그려보고 싶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꺼?"

"예, 그럼요. 뭐가 문제가 될 게 있겠습니까. 와서 그리면 되지 예."

"지는 잘 모르겠는데, 저 아가 그림이 잘 안 그려진다고 하면서 자주 와봐야 되겠다고 해서 예. 나중에 간이 의자 하나 빌릴 수 있겠습니꺼? 제가 주지스님께도 얘기해 보겠습니다."

"간이 의자 하나 빌리는 게 뭐 대수라고 그리 애 안 쓰셔도 됩니더. 나중에 하나 빌려서 쓰시지 예."

"감사합니다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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