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남준
헐렁한 멜빵바지에 와이셔츠.
장난기 가득한 얼굴.
어수룩함도 엿보이지만 행동 하나하나에서 드러나는 예술에 대한 치밀한 계산과 도전 정신을 가진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최고의 아티스트다.
그는 비디오 아트 창시자이며 전위 예술가로 이름을 떨쳤으며 예술사 (Art History) 교과서에 나오는 유일한 한국인 이기도 하다.
태호네 식구 3대가 지금 이 분을 만나러 가는 중이다.
이번이 초면도 아니었다.
*
몇 년 전, 태호 할아버지 생신을 맞아, 태호네 식구는 대구에 갔다.
토요일 저녁 식사를 한 후 집에서 커피와 과일을 먹으며 TV를 보고 있을 때였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 씨가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만든 ..."
TV에서는 백남준 작가의 새 작품 다다익선을 소개하는 멘트가 흘러나왔다.
태호는 강 교수가 얼마 전 언급했던 예술가라는 걸 깨달았다.
"강 교수님이 기회가 되면 꼭 만나보라고 한 분인데?" 태호가 말했다.
"이분 나도 들어는 봤어.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 뵙고 인사를 드리면 좋겠다."
숙영는 태호를 생각해 말을 꺼냈다. 정말로 가능하다고 생각해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어, 이 친구 나랑 같은 학교 나왔는데? 나랑도 친했어. 이 집 집안 식구들 모두 같은 학교를 나왔지."
태호 할아버지는 당신과 백남준 작가가 어릴 적 일본 순사가 노닐던 종로에서 같이 놀던 '깐부' 사이라는 걸 밝히셨다.
이 얘기에 반색한 숙영이 시아버지를 졸랐다. 이런 인맥이 흔한 인맥은 아니지 않은가?
"한번 만나볼 자릴 만들 수 없을까요?"
"그래, 내 알아보마."
할아버지가 전화 몇 통을 돌려서 얻어낸 전화번호를 바탕으로 영호가 전화에 방문에 두발로 뛰어서 마침내 백남준 작가와 통화할 수가 있었다.
"아이고 남준이, 나 지철이야! 권지철! 기억나?"
"이게 누구야. 지철이 형? 지철이 형 맞아? 내수동 살던?"
그렇게 두 사람은 거의 40년 만에 만났다.
옆에는 태호네 식구도 같이 있었다.
*
88년도에 잠시 귀국해서 다다익선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을 제작하고 난 후 줄곧 외국 (주로 미국)에서 지내셨지만 그래도 가끔 이렇게 귀국하셨고 태호네 집안 3대도 기회가 되면 이분을 만났다.
전에 뵈었을 때 엄마의 욕심으로 태호가 그린 유화도 한 점 챙겨서 가져가서 드렸는데 너무나도 좋아하시며 그림 솜씨는 자기보다 낫다며 칭찬해 주셨다.
"그 할아버지는 어째서 내 그림이 더 낫다고 하신거야?
엄마 말 대로라면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훌륭한 예술가라고 했잖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예술가란 그림 그리는 실력 혹은 조각 실력으로 판가름 난다고 생각했던 어릴 때라 백남준 작가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분은 그림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하는 분이 아니야.
비디오 아트라고 영상과 전위 예술을 하셔.
엄마가 아는 범위에서 말하자면, 전위 예술 중에서도 행동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하시는 걸로 알아.
너에겐 생소할 거야."
"비디오 아트는 영상으로 한다고 하니까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해는 되는데, 전위 예술이 뭐야?
행동으로 뭘 한다는 건지 모르겠어."
"전위란 앞전 자에 지킬 위라는 한자어로 된 단어인데 프랑스어로는 아방가르드 (Avatgarde)라고 하고 영어 표현으로는 커팅에지 (Cutting-Edge)라고 하기도 해.
그리고 한국말로 하면 최첨단 예술 정도로 해석하는 게 적당할 거야.
지금까지 나온 적이 없는 새로운 표현을 시도하는 예술 경향이나 운동인데 범위는 예술 영역 전체라고 볼 수 있지.
엄마가 들은 얘기로는 이분은 피아노를 치시다가 도끼로 피아노를 부숴버리는 퍼포먼스를 자주 하셔.
좀 색다르지?"
'색다르다' 라기보다는 컬처 쇼크다.
갑자기 왜 멀쩡한 피아노를 부수지?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진 거지?
남들이 안 하는 걸 하면 그게 예술인가?
색다른 모든 것이 다 예술이라는 건가?
태호는 지금까지 단어로만 듣던 예술 사조의 실제 모습을 알게 되자 머리가 멍해졌다.
이 정도로 전위 예술에 대해 설명을 할 수 있는 엄마도 대단했지만 태호의 호기심을 채우긴 부족했다.
태호는 그 뒤로 도서관을 뒤지며 이 분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찾아봤다.
전위라는 단어만큼 이쪽 예술은 어려웠다.
전위 예술가란 좋게 얘기하면 예술의 최전방에서 사투를 벌이며 앞서나가는 전사였고, 나쁘게 얘기하면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짓을 천연덕스럽게 벌이는 똘아이(?) 였다.
남들보다 한 발을 먼저 나가는 게 아닌 10-20년을 앞서 가다 보니 한참을 비주류 혹은 B급 예술로 취급 당했다.
나중에야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로 교과서의 한편을 당당히 차지하겠지만.
그것도 예술사의 맨 뒷장에 말이다.
재밌게도 백남준 작가는 미술 영역에서 조각가로 구분된다.
실제로는 영상을 이용한 작품을 만들었음에도 말이다.
태호는 백남준 작가에 대해 알아보면서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 분이 돈을 버신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보통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무언가를 만들어서 판다.
그게 그림이던 조각이든 간에. 하지만 이분은 뭘 파신 게 없다.
"할아버지, 그 백남준 할아버지는 돈을 버세요?"
태호는 도서관에서 찾아낸 이 놀라운 사실을 차 옆자리에 타고 계신 할아버지에게 물어봤다.
나중에 불쑥 이런 궁금증이 그분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꼭 풀고 가는 게 낫겠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걔가? 굳이 뭐 하러? 돈밖에 없는 집인데."
태호의 예상대로 금수저 집안이 맞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 할아버지 나이가 지금 예순이 다 되어가시는데 지금까지 돈을 한 번도 안 벌고 사실 수 있나?라는 궁금증이 생겼다.
"얼마나 부자시길래 그렇게 사실 수 있어요?"
"그 집안 돈이 은행보다 많았다는 얘기가 있었어.
그 옛날에 그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무슨 궁궐에 온 줄 알았지.
정말로 집에 없는 게 없었어. 그 당시에 집에 캐딜락도 있었어."
그 당시 캐딜락이라니... 워낙에 부자집이니 집이 크고 고급차가 있는 것 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하면 은행보다 돈이 많을 수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 집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때 한국에서 제일 큰 방직공장을 했어.
내가 알기로는 원래 그 집이 상인 집안이었기도 하고."
"혹시 그 할아버지가 그림도 잘 그리셨어요?"
"아니야, 태호야. 내가 기억하기로, 네가 그 남준이보다 훨씬 잘 그린다.
비교가 안 돼. 그러니 너도 그 백남준이 보다 훨씬 훌륭한 예술가가 될 수 있을 거다."
태호는 할아버지의 대답에 만족한 듯 혹은 다소 안도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돈이라는 화두는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는 연희동의 어느 한정식집에 도착했고, 예약된 방에서 대기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백남준이 방으로 들어왔다.
태호 할아버지와 백남준은 크게 포옹을 나누었고 태호네 식구들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 우리가 이게 얼마 만에 보는 거지?"
"내가 88년에 한국 와서 보고 얼마 전에 입국했으니까 한 3년 정도 되었지."
"난 작년에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3년이나 되었어.
내 며늘아기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자네가 한국에 돌아온 줄도 몰랐을 거야.
그래, 이번에는 얼마나 있다 갈 건가?"
*
두 사람이 풀어놓기 시작한 얘기 보따리는 방안을 1940년대 종로로 옮겨 놓았다.
술잔이 비워질수록 얼굴은 붉어져 갔다.
백남준의 이야기는 종로에서 도쿄로 그리고 독일의 서부 도시들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로 흘러갔고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방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박장대소를 했고 특히 할아버지는 밥상을 두드려가며 좋아했다.
태호는 백남준의 대화를 모두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근저에 흐르는 예술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자신감, 그리고 천성에서 묻어 나오는 쾌활함은 분명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백남준의 이야기에서 텐션이 조금씩 떨어진다고 느껴질 때 태호가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장래 내 뒤를 이어 한국을 대표할 만한 예술적 자질을 가진 어린 친구. 이 할아비에게 뭘 물어보고 싶어?"
"할아버지가 작품 중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시던데 그 퍼포먼스가 무슨 의미를 가진 건가요?
할아버지 인터뷰에는 전통적인 예술 방식과의 작별을 의미한다고 하던데요.
악기를 부수는 것에서 전통적인 예술 방식과의 작별이라는 해석이 어떻게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피아노를 처음으로 부순 건 나지만 정작 이 피아노를 부수는 걸로 유명해진 건 내가 아니라 요제프 보이스라는 친구야.
나보다 한 10살쯤 많은 양반인데 얼마 전 타계한 친구지."
백남준의 표정에서 절친을 잃은 상실감이 여실히 드러나 태호 식구들을 안타깝게 했다.
요제프 보이스는 플럭서스 (흐름, 변화, 움직임을 뜻하는 라틴어 플러스에서 유래하였으며 1960년~1970년대에 일어난 국제적인 전위 예술 운동)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피아노를 부순 이유는 간단해. 피아노가 부서지면서 나는 소리도 음악이거든."
*
태호의 할아버지는 이번 만남의 목적을 꺼낼 타이밍을 잡고 있었다.
손자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친구 덕을 좀 보면 어떤가 하는 약간은 뻔뻔한 생각까지 하면서 말이다.
친구의 얘기를 곰곰이 들어보니 저 바닥도 매우 폐쇄적이고 끼리끼리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니 말이다.
"계속해서 외국에서 생활한 건가?"
"그래야지. 어찌 되었던 뉴욕이 전 세계 중심 아닌가?
독일에서의 활동도 좋았지만 이제는 뉴욕에서도 인정을 받고 싶으니."
"그럼 나중에 내 손자 태호 좀 챙겨줘. 이 아이가 자네가 갔던 길을 갈 거 같아."
"하하 하하. 정말인가? 좋은 일이야. 혹시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생각해둔 게 있을까?"
"제가 미국에 갔을 때 할아버지 전시회가 있으면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제가 꼭 갈게요."
"그게 단가?" 백남준은 뭐든 받아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리고 할아버지 친구분들도 소개해 주시고요."
"태호가 아주 똑 소리가 나는 구만. 내가 가진 걸 모두 다 받아내겠다는 생각인데? 하하하."
재밌다는 듯 웃던 백남준은 생각과 표정을 정리한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외국 나가서 제일 힘들었건 건 그 부분이었어.
흔히 말하는 연줄이 없었지. 고급스럽게 얘기하면 마케팅 능력이고. "
"예술계는 그나마 덜하지만, 인종차별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해.
네가 아는 예술가는 대부분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아니면 미국인이나 영국인일 거야.
유색인종은 무척이나 드물지. 기껏해야 일본인이나 중국인 정도? 그게 다야."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네 실력 뿐만 아니라 조력자가 있어야 돼.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어 줄 큐레이터, 네 작품을 팔아 줄 딜러, 네 작품을 사줄 콜렉터.
이렇게 세 사람이 존재해야 하지.
난 큐레이터는 몇 명 알지만 딜러나 콜렉터는 아는 사람이 몇 명 없어.
난 작품을 팔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내가 아는 큐레이터들은 태호 너에게 다 소개시켜주마."
*
한참 얘기를 하다보니 슬슬 일어날 시간이 되었다. 태호의 할아버지는 3년만에 만난 친구를 위해 준비한 선물을 소개했다.
"자네도 이제 나이가 있으니 더 몸 관리를 잘 해야 되지 않겠어?"
좀 부은 듯한 몸집의 백남준을 본 할아버지는 걱정이 된다는 듯 물어봤다.
"난 꽤 건강해. 지병이 없진 않지만."
"지병이라면 혹시 당뇨?"
"어찌 알았나?"
"어렸을 때 들은 적이 있는 거 같아. 자네 할아버지도 소갈로 고생하셨었다고 했었지."
"어, 그랬지.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당뇨가 있어. 집안 내력이니 어쩔 수가 없어."
"내 그럴 줄 알고 한국의 당뇨 명의를 한 명 알아봐 놨어.
일주일 뒤, 한서 대학 병원인데 한국에 온 김에 전신 CT 촬영까지 다 하고 가게.
이미 다 계산했으니 비용 걱정은 말고."
백남준은 당황한 얼굴로 친구의 선물을 극구 사양했다.
"이런 선물은 받을 수 없네. 자네에게 너무 큰 부담이잖나."
"이게 뭐가 부담인가? 내 어릴 적 자네 집에서 먹었던 바나나 값이라 생각해.
난 그때 먹었던 바나나 맛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어.
그리고 틈틈이 내 손자 좀 잘 봐주고. 수수료라고 생각해도 좋고.
자네가 건강해야 이 모든 게 가능하지 않은가."
*
이주 뒤 백남준의 CT 촬영 진단 결과가 나왔고 태호는 숙영을 통해 백남준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CT 사진에서 뇌동맥류가 발견되어 긴급 수술에 들어갔다고 한다.
걱정했던 당뇨도 문제지만 머리에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는 뇌동맥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다행히 수술 결과가 양호하여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철저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의사의 소견에 따라 식이요법부터 시작하는 건강 관리에 들어가셨다고 했다.
이게 계기가 되어 태호네 집안 식구들 모두가 다 전신 CT 촬영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기도 했다.
백남준 작가가 몸을 거의 추스르고 출국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태호는 할아버지에게 부탁해 백남준 작가의 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제일 궁금했던 건 현재 미술계 동향이었다.
유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용품을 챙겨서 백남준 작가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백남준 작가는 한국에 올 때면 호텔보다는 둘째 누이의 집에 머물렀는데 한남동에 있는 이층 양옥으로 부동산에 대해 잘 모르는 태호가 봐도 무척이나 비싸 보이는 건물이었다.
집이 큰 만큼 창고도 넓었는지 없는 물품이 없었는데 다행히 이젤도 있어서 그림 그리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화구를 모두 펼친 후 연필을 들고 스케치를 시작했다. 한참을 말없이 그리다가 태호가 쓸쩍 물어봤다.
"제가 피카소 같은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피카소만큼 유명해져야지." 바로 대답이 나왔다.
"피카소만큼의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그만큼 유명해져야 된다고요? 피카소처럼 유명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법에 어긋나는 게 아닌 범위에서 언론에 자주 노출되는 게 필요해.
나도 그걸 늦게 깨달았지. 진작에 알았으면 내가 앤디 워홀만큼이나 유명해졌을 거야."
태호는 언론에 노출 되어야 한다는 말은 이해했지만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언론에 노출 되는 방법 중에 제일 쉬운 방법은 네 작품이 방송을 타는 거야.
네 작품이 특출나거나 혹은 충격적이면 방송에 탈 확율이 높아지지."
"할아버지 작품도 굉장히 충격적이지 않았나요?"
"내 작품 활동은 충격적이었지만 대중이 기발하다고 즉각적으로 느끼지는 못했어.
이쪽 계통 사람들만 기발하다고 즉각적으로 반응했을 뿐이야.
대중과 예술가의 간극이 너무 크면 미친놈 소리만 들을 뿐이지."
"언론에 노출되는 다른 방법으로는 네 작품이 경매 사상 최고가를 갱신하면 돼.
좋은 작품이 비싼 것인지, 비싼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경계가 애매하지만 말이야.
물론 예술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 작가에게나 해당되는 얘기야."
"나중에 라디오나 방송에 출현할 기회가 생기면 절대 주저하지 말고 응하도록 해."
"기회가 된다면 패션 쪽에 진출해 보는 것도 고려해 볼만해.
분명히 예술은 패션과 만나게 되어 있어.
패션을 하위 문화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대중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 분야야."
백남준은 패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한동안 설명했다.
*
태호는 백남준 작가를 몇 번 더 방문해 초상화를 완성해 나갔고 백남준으로부터 생생한 뉴욕 예술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완성된 그림을 받은 백남준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태호를 꼭 안아주었다. 마치 친 손자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