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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하다1 (12/181)

///// 사사하다1

화요일 오후는 김창기 교수 (대한대 동양화과)의 작업실을, 그리고 목요일 오후에는 강재범 교수 (발해대 서양화과)의 작업실을 방문했다.

학교 측에는 조카 정도 되는데 자기 작업실에 일주일에 몇 시간씩 데리고 있겠다고 알렸다.

태호는 한 달을 집의 도우미 아줌마와 함께 학교를 방문했다.

그리고도 대학에만 들어오면 길을 못 찾아 경비실에서 교수들을 찾아준 게 여러 번이다.

그렇게 작업실을 찾는 지점 하나하나를 찍어서 알려주고 나서야 다음부터 헤매지 않았다.

태호는 심각한 길치였다.

교수들은 태호의 수준을 확인한 후 어떻게 교육을 할 것 인지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자신들이 외국에서 경험한 방법이다.

기본적으로는 토론 수업이었다.

태호에게 일주일 동안 일정 분량의 책을 읽게 한 후, 책 내용 중 궁금한 사항이 있으면 질문하고 교수들은 책 내용과 관련하여 태호의 생각을 물어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태호가 가지고 있는 많은 책들이 미술 관련 서적으로는 유명한 책이어서 자신들도 기본적으로 아는 책들이었다.

그 외 자신들이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책을 빌려주어 태호가 읽을 수 있게 했다.

태호가 책을 읽고 질문을 하면 교수들은 답변을 했다.

그리고 좀 더 생각할 거리가 있는 문제들은 짧은 에세이를 써 오게 했다.

진도 자체는 그다지 빠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태호는 시간이 넉넉했고 급할 것도 없었으며 무엇보다 태호가 어렸다.

김창기 교수가 처음 가르친 분야는 미술사였다.

그는 역사가 바뀌는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와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미술사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였다.

한국 입시에서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누가 언제 무슨 예술 작품을 만들었냐는 건 그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예술 정신과 장인 정신을 혼용해서 쓰고 있어. 지금도 둘을 헷갈려 하지."

"여기 에르메스 가방이 있어. 가방 하나에 천만 원을 넘어가는 최고가의 가방으로 유명해."

"여기서 가방을 생산하는 사람들은 가방만 30년을 넘게 만든 장인들이야.

가죽에 관한 관한 한 최고라고 누구나 인정하지.

자, 이 장인들을 예술가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니야.

장인은 장인일 뿐. 예술가가 아니지.

그 장인이 만든 가방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말은 할 수 있겠지만 장인이 예술가가 되지는 않아."

"이 장인 중 한 사람이 새로운 가방을 디자인하고 생산했어.

획기적인 생각이 들어간 가방이어서 사람들이 가방에 대해 가졌던 생각을 바꿀 정도였어.

그 뒤 그 장인이 떠올린 사상이 들어간 수많은 가방이 만들어졌지.

그럼 이건 예술품일까? 난 그렇다고 생각해.

단 그 획기적인 생각이 담긴 첫 가방만이 예술품이 되는 거지."

"내가 생각하는 현대 미술에서는 예술가는 곧 사상가야.

자기의 철학을 형상화하는 사람이고.

그게 가죽이 되었던, 돌조각이 되었던 중요하지 않아.

매체가 중요한 게 아니야.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냐가 중요한 거야."

김 교수는 단순한 지식이 담긴 미술사를 가르친 건 아니었다.

철학과 사상 등 인문학과 예술의 인과관계를 더 중요시하며 가르쳤다.

“고대로 올라갈수록 고고학과 미술사의 경계가 애매해지긴 해.

남아 있는 유물을 예술작품이라고 해야 할지 정의 내리기가 어려우니까.

보통 미술사를 정리할 때 초기 문명은 유럽, 이집트, 중동, 중국으로 구분을 시작을 해.

그 뒤로 유럽은 점점 더 세분화되어 가지만 이집트는 기원후로 넘어가면 로마에 복속되면서 사라지고 중국은 그 비중이 점점 더 줄어들지.

지금의 역사를 쓴 승리자들이 유럽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중국을 비롯한 동양은 유럽만큼 크게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과 동양도 계속해서 바뀌었지만 유럽만큼은 아니니까.

거기에 한반도는 중국의 한 변방으로 취급받는 정도야.”

“왜 중국의 예술, 혹은 동양의 예술, 이 서양에 비해 정체된 모습을 보인 걸까요?”

설명을 들은 태호가 질문했다.

“서양인의 눈으로 보기엔 동양의 미술이 정체되어 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본질은 그게 아니었지.

예술에 대한 접근 자체가 달랐던 것뿐이야.

서양 예술은 대상을 재현해 내는데 관심이 많았어.

그래서 대상을 관찰하고 수학적으로 수치화했지.

흔히 얘기하는 신체 비율에 쓰이는 8등신이나 2^(1/2) (루트 2) 같은 수치들이 그 예지.

반면에 동양은 정신적인 면을 강조했어.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담아내는 것보다는 그 대상이 가진 본질, 즉 철학이나 세상의 이치 등을 표현하는 걸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그 결과물도 달랐지.”

“다른 이유로는 시장의 형성이야.

시장에 수요가 있다면 사람들이 공급을 하지 않을 리가 없어.

한 예로 수요가 매우 컸던 도자기의 경우, 송나라 징더전에서 만들던 도자기는 당시 전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했지.

유럽에서 회화가 발달한 이유도 수요와 공급으로 보면 간단히 설명할 수 있어.

르네상스 당시 유럽은 축적된 자본이 있었고 이를 통해 예술을 구매 혹은 지원할 여력이 있었거든.

수요가 있으니 자연스레 공급이 따라오는 거지.”

“르네상스는 프랑스 말로 재생이야.

중세 이후, 즉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에, 유럽에서는 문화적, 예술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는데 사회적으로 큰 변화라 재생 (르네상스) 수준이라고 부르게 되었지.

가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인본주의가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고 인간의 삶을 탐구하고 감상할 수 있게 해준 거야.

그리고 예술은 아이디어가 확산되고 발전되는 수단이었어.

14세기에 시작은 이탈리아반도의 각 도시 국가에서 시작했고, 뒤이어 전 유럽으로 퍼졌어.

프랑스를 거쳐 영국과 독일로 퍼졌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독일의 종교개혁이 원인이 되어 서유럽 교회가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고, 이는 그동안 이탈리아를 풍요롭게 했던 로마 가톨릭의 수입이 줄어들게 만들었어.

여기에 신항로의 발견으로 동방과의 무역을 독점하여 부를 축적하던 이탈리아의 다른 돈줄마저 끊었지.

그 뒤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쇠퇴할 수밖에 없었고.

이처럼 예술은 철저히 수요에 의해 공급된다는 점은 매우 흥미로워.”

“대상의 재현을 목표라면 카메라가 발명된 이후에는 서양의 예술은 쇠퇴를 했어야 되지 않았을까요?” 태호가 물었다.

"카메라가 발명된 초기에는 분명히 그러한 위기의식이 있었지.

하지만 곧 사진은 회화를 위한 부속물 혹은 보조 도구로 여겨졌어.

초상화를 위해 장시간 앉아 있어야 하지만 사진은 그럴 필요가 없었고, 순간적인 동작을 잡아낼 수 있는 것도 사진이니까 훨씬 쉬웠지.

그중 가장 유명한 예는 전력질주하는 말의 네 발이 지면에서 떨어지는지에 대한 논쟁을 사진으로 증명한 일이 있었지.

말의 네발은 공중에서 모아진다는 것을 사진 촬영으로 밝혀낸 일이 있었어.

그전까지는 말이 그렇게 다리를 움직일 것이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거든."

"사진이 발명된 시기가 19세기 초반인데 당시 미술 사조인 인상주의는 사진의 등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인상주의 화가들은 과학적 색채 이론을 배경으로 직접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고 했었거든."

“사진의 등장은 초상화 화가에게는 꽤 치명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회화는 사진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집중하게 만들었다는 의미가 있지.

그게 바로 현대 미술이 태동하게 만드는 큰 계기가 되었기도 해.”

“사진의 발명이 현대 미술을 초래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태호가 물었다.

“역사는 그렇게 한 가지 팩트 만으로 바뀌지 않아.

사진이 많은 원인 중 하나라는 거지 전부는 아니니까.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원인이 되는 게 맞지.

근대 미술로 넘어가게 된 가장 주요한 이유도 프랑스 혁명 후, 교회와 귀족에게 종속되던 예술가가 혁명 후 사회적 위치가 높아지게 되었어.

더 이상 교회에 귀족에게 납품만을 하는 게 아니라 관전이나 살롱, 개인전, 그룹 전시를 통해서 작품을 다양하게 유통할 수 있게 된 거지.”

“19세기 후반부터 당시 수많은 새로운 발견은 많은 사회적으로도 급격한 변화를 이끌어냈고 이는 미술에서도 마찬가지였어.

정말 다양한 미술사조가 등장하게 되고 다양한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해.

지금도 유명한 화가인 피카소, 루소, 마티스, 클레, 달리, 몬드리안 같은 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지.”

“마르셀 뒤샹 없이 현대 미술을 논하기 불가능할 정도로 뒤샹은 현대 미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예술가야.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작품은 ‘샘’이라고 이름 붙인 남성용 소변기였는데, 1917년 당시 뒤샹은 뉴욕 독립미술가 협회의 전시회에 전시 작품으로 제출했지.

당시 전시회의 출품 조건은 어떤 작품도 출품 가능하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독립 작가협회와 사이가 안 좋았던 뒤샹이 협회를 비웃기 위해 다른 일용직 노동자 이름인 ‘R. Mutt’라는 가명으로 이 작품을 출품했거든.

지금 남아 있는 건 뒤샹이 추후 주문한 이탈리안 장인이 만든 복제품이고 원본은 사진으로만 전해지고 있지.

내 생각엔 독립 작가협회에서 파손 시켰을 거야.

그 뒤로 이 작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미술관들이 많아 지자 뒤샹은 복제품을 하나 둘 만들어 팔다 보니 16개나 되는 복제품이 전 세계 미술관에 전시되고 있어.”

“예술품은 사회, 문화, 종교 등 모든 것들이 집약된 결과야.

예를 들어 설명하면 불교가 융성했기 때문에 불교 예술이 나온 거지, 불교 예술이 불교보다 먼저 나온 게 아니라는 거야.”

“훌륭한 예술품이 비싼 가격에 거래된 이유는, 수요와 공급에서 보면 수요가 공급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 예술품은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아이콘이기도 해.

당시의 왕성한 사회 문화적 활동의 결과물이 예술품인 것이지.

그렇기에 수요가 높은 거야. 그리고 공급은 제한적이지.

예술품을 제작한 작가는 죽고 없거나, 이미 당시에 만들어 놓은 작품들은 다 팔리고 없을 테고.

시대가 지난 후에 만든 것은 복제품일 뿐이야.

뒤샹의 샘처럼 말이지. 물론 그래도 비싸게 팔렸어. 하하.”

김창기 교수는 서양에 중심을 둔 미술사와는 별개로 동양 미술사도 꽤 많은 시간을 들여 가르쳤다.

다만 자료가 제한적이어서 한중일 삼국을 중심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한중일 예술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먹과 종이 혹은 실크에 매체를 쓴다는 점이지.

먹은 굳은 소나무 그을음과 접착제로 만드는데, 벼루에 물과 함께 갈면 먹물이 생기고 이를 동물의 털을 이용해 만든 붓에 묻혀 종이나 실크에 그림을 그리지.

이게 왜 가장 큰 특징이냐면 그림이 일회성이라는 거야.

표면이 흡수성이 있는 실크나 종이에 그림을 그리니까 그림을 지우거나 수정을 할 수가 없어.

또한 물을 흡수하는 특징 때문에 비단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릴 경우 빨리 그려야 되기도 해.

즉 숙련된 사람들 만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거지."

"한반도의 예술은 기본적으로는 중국과 일본의 예술과 비슷해.

왜냐하면 미학이나 기술, 형식 등을 공유했으니까.

하지만 차이점은 자연과의 조화를 강조했다는 점이야."

“중국에서 제일 발달한 예술은 도자기라고 봐야 돼.

지금도 한점에 수천에서 수억 원에 거래되는 징더전에 있던 어요에서 생산된 도자기는 당시에도 왕실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한 사치품이었어.

연간 수만 점이 생산되었고 공급되었지.

그 뒤로도 명과 청을 거치면서 더 화려해지고 정교해졌어.

이 중국 도자기의 인기는 유럽에서 도자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19세기까지 이어지게 되었지.”

"아마 일본 미술 작품 중에 제일 유명한 건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라는 19세기 작품을 거야.

목판화고 19세기 인상주의 거장들을 매료시킨 작품이지.

드뷔시의 '바다'라는 교향시를 작곡하게 된 계기도 바로 이 그림이고."

"일본 만화 업계는 가쓰시카 호쿠사이를 일본 만화의 원류로 봐.

실제로 호쿠사이 만화라는 그림책이 유명한데, 만화라는 명사 자체가 호쿠사이의 만화에서 왔고, 오늘날 일본 만화에서 볼 수 있는 많은 만화 기법들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어."

김창기 교수는 동양화에 대한 기초를 가르치기는 했다.

거기에 그는 인문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 비평 등 글쓰기를 강조했다.

거의 매주 짧던 길던 한편의 에세이를 써오게 했고 교정을 해주었다.

또 틈틈이 일어와 중국어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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